미스터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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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don’t you say about your fault?”
뭘 잘못했는지 말해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단유는 더 이상 버티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다. 게다가 최대한 수업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 조심했던 자신의 태도가 ‘잘못’이라는 지적에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단유는 이것이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위치에서 발생된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It was wrong to have been keeping silence.”
“What?”
말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라는 단유의 말에 선생님은 어리둥절했다.
“As impossible an experience as talking English through time may be, it should become the precious time when I can learn. But I couldn’t best my way, and it is my fault, of course. So, I’m sorry.”
아이들과 선생님은 모두 얼이 빠진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심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고, 선생님은 1달여간 이상 좀처럼 존재감을 드러낸 적 없던 아이가 이토록 유려한 발음과 문장력을 구사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야, 방금 단유가 뭐라고 한 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영어 좀 잘한다고 생각했던 아이들도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영어만 썼던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발음과 학교에서 배운 적 없는 문장에 놀란 탓이었다.
“쟤 교포야?”
“아닐걸?”
곳곳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도 선생님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다만 조금 시험하고픈 욕심이 생겨, 평소보다 빠르게 말을 해 보았다.
「수업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 지금까지 참여를 하지 않은 이유가 뭐죠?」
「개인적인 이유입니다.」
‘private’ 이란 이유라도 일단 수업시간에 벌어진 일이기에 선생님은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수업시간이 끝나고 따로 이야기를 할까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이번 수업 때는 더 이상 고개를 숙이거나 수업에 비참여적인 행동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시겠죠?」
「네.」
단유는 선생님이 말을 빠르게 하든, 어려운 단어를 섞든 다 알아듣고 제대로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업 중이라 한 사람과 오래 대화할 수 없어 이 정도로 마쳤지만, 굳이 레벨 테스트를 해 본다면 아마도 ‘High intermediate’ 혹은 ‘Advanced’ 정도의 단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단유가 말하는 개인적 이유가 굉장히 궁금해졌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교실 앞으로 돌아갔고, 단유는 제자리에 착석했다.
「아, 이름이 뭐죠?」
단유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한 탓에 많이 차분해진 상태였다. 깊은 숲속의 차가운 샘을 떠올리게 하는 차분한 어조로 이름을 밝혔다.
“My name is Kim, dan-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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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난 뒤, 가장 먼저 단유에게 달려온 이는 역시 지태였다.
“너 영어 엄청 잘하네? 왜 그 동안 말 안 한 거야?”
“뭘 말하라는 거야?”
“영어 잘 한다는 거? 왜 감추고 있었어?”
“내가 영어를 잘 하든 못 하든 그걸 너한테 말하는 게 더 웃기지 않아? 넌 니가 뭘 잘한다고 자랑하고 그래?”
지태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말했잖아? 나 서예 잘한다고. 할아버지한테 배워서 서예도 잘하고 한문도 잘한다고.”
아, 맞다. 지태는 이런 아이였다. 자기애(自己愛)가 풍부한 녀석.
“난 그런 성격이 아니고, 굳이 떠벌리면서 자랑할 만한 꺼리는 안 돼.”
“그게 왜 자랑거리가 아냐? 우리 반에서 제일 영어 잘할 거 같은데? 그치?”
어느새 단유 주위로 몰려든 아이들을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는 지태의 말에 몇몇 아이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 지금까지 너처럼 발음 좋은 아이들은 본 적이 없어!”
발음이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를 구분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리고 되게 어려운 단어도 많이 썼지?”
그 단어가 어려운지 쉬운 지를 구분할 능력이 되지 않지만.
“아까 했던 말은 무슨 말이야? 임파서블 어쩌고저쩌고 한 거. 영화 제목 이야기는 아닌 거 같은데?”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영어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어야 하는데 난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그래서 죄송하다고 이야기 한 거야.”
아이들은 오오, 하며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온갖 질문이 이어졌다. 외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느냐, 부모님이 영어를 잘 하시냐, 학원을 다니느냐, 어떤 학원을 다녔느냐, 공부는 어떻게 하느냐, 영어 발음은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냐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청문회처럼 단유를 앉혀놓고 둘러선 아이들의 폭풍 질문에 단유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굳이 회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서 하나씩 ‘진실 되게’ 대답해주었다.
“외국에 나간 적 없고, 부모님 안계시고, 학원 다닌 적 없고, 공부는 책만 보고, 발음은 그냥 어쩌다보니.”
단유의 진실하고 솔직한 답변은 무성의와 무책임의 극치였다. 적어도 아이들의 귀에는 그랬다. 그래서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영어를 그토록 잘 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님 안 계신다고? 외국에서 일하시는 거 아냐?”
한 아이의 질문에 당황한 건 오히려 단유가 아닌 지태였다.
“야, 그런 개인적인 질문은 하면 안 되지.”
하지만 단유는 지태를 말렸다.
“괜찮아. 나 부모님 안 계셔.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보육원에서 살았어.”
아이들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질문을 한 아이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돼.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리고 보육원에서 살았기 때문에 학원 같은 곳에 간 적은 없어. 그리고 책만 보고 공부한 것도 사실이야. 그것 말고는 공부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초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단유는 보육원에 살았던 사실이나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에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을 느끼지 않았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 일이었기에.
“그럼 초등학교 때 영어 수업 듣는 거랑, 책 외에는 따로 영어 공부 한 적 없고?”
“응.”
그야말로 수능 만점자가 교과서만 보고 수업 열심히 들었어요, 대답하는 격이었다. 아이들은 지난 시간동안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공부했던 것들이 다 부질없는 짓이었던가, 자괴감에 빠졌다.
만약 종례를 위해 선생님이 오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자괴감에 계속 깊어만 갔을지도 모르겠다.
“뭣들 하는 거야, 거기! 제자리로 돌아가!”
선생님은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했고, 사냥꾼에 등장에 놀란 새들처럼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리로 찾아갔다.
선생님이 교탁 앞에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교실은 사고 난 유조선처럼 점점 혼탁해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단유가 드러냈던 놀라운 모습 때문에 흥분과 열기가 남은 상태에서 선생님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검은 기름 같은 죄책감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점심시간에 3반이 저질렀던 일들이 선생님께 보고되었음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처벌이나 결과는 아직 알지 못하는 상태. 이제 그 죄를 물을 심문관이 앞에 서 있으니, 아이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심문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아까 반장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히 반장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선생님은 너희들이 자못 기특하다는 생각도 했었기에 지금 선생님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배신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
‘배신감’이란 용어를 통해, 아이들은 이야기의 결말이 좋게 끝나지는 않으리라 짐작했다.
“반의 단합을 위해서 축구 시합을 허락했더니, 주먹질로 단합을 해? 그것도 학교 운동장에서, 다른 사람들도 버젓이 보는 가운데에 싸움을 벌여? 그게 학생들이 할 짓이야!”
헌영의 격앙된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매운 떡볶이 3인분을 먹고 물을 안 마신 것처럼 붉어진 헌영의 얼굴을 똑바로 볼 용기가 아이들은 없었다.
“반장 일어나.”
지태가 머뭇대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장은 이 사태를 어떻게 책임질 거야?”
지태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미 7반에 가서 사과까지 하고 화해를 했다고 밝힌 상황.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봐야 선생님의 화를 재우진 못할 것 같았다. 동시에 이미 화해를 해서 오해를 푼 상황인데 왜 화를 내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에 더욱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반에서 폭력사건이 일어나도 화가 날 판에, 다른 반 애들이랑 패싸움을 해? 그래놓고 니들끼리 오해를 풀었으니 봐달라고? 그러면 아무 일 없는 게 돼? 응?”
“···아닙니다.”
선생님은 지태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 부분을 지적했다. 사실 헌영의 입장에서 이 싸움은 자기들끼리 풀었으니 괜찮다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게 되면, 나중에 또 다른 문제가 벌어졌을 때도 자신의 통제 밖에서 자기들끼리 일을 해결하겠다고 나설 게 분명해보였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왜 규칙이 있고, 이 사회에 왜 법이 있는데? 너희들끼리 싸우고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생각은 도대체 누가 먼저 한 거야? 게다가 아무도 선생님한테 싸움이 벌어졌을 때 안 왔어. 사고가 터졌으면 먼저 선생님한테 와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아냐!”
지태는 이를 악문 채로 고개를 숙였다.
“반장, 왜 바로 안 왔어?”
지태는 머뭇대다가 선생님의 추궁이 이어지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들 말리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야!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헌영이 탁자를 세게 두드리면서 지태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진짜 지태는 막다른 길에 몰린 느낌이었다. 어떤 대답을 해도, 선생님으로부터 긍정적인 이야기는 들을 수 없을 것이란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말만 하면 다냐고! 너나, 너희들이나, 지금 이 일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했던 일인지 몰라? 만약 또 다른 사고가 났을 때도 너희들끼리 해결하겠다고 선생님한테는 이야기도 안 하고, 응? 그러면 어떻게 되겠냐고!”
지태는 주먹을 쥐었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엄청나게 큰 죄를 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선생님께 이야기하러 가기 전, 그러니까 7반에 가서 화해를 하러 가기 전, 하고 난 후, 단유로부터 긍정적인 이야기도 들었고, 오해도 잘 풀렸기에 마음 한 구석에는 안심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었나 보다. 그런데 그 마음이 일순간에 부서지고 짓밟히니, 더욱 두렵고 분하고 죄스러웠다.
“싸운 사람 다 일어나 봐.”
싸운 사람이라고 하니, 정확히 누굴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어 다들 머뭇댔다.
“안 일어나!”
결국 최초 7반 공격수를 떠밀었던 기훈을 시작으로 몇몇 아이들이 일어섰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단유도 함께 일어섰다.
“몇 명이야? ···8명? 이게 다야? 어디서 눈치를 보고 있어! 안 일어나?”
주춤대던 몇 명이 더 일어섰다. 사실 싸운 아이도 있고 말린 아이도 있었지만, 분위기상 다 일어서야 할 것 같았기에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략 20명 정도가 일어나자, 선생님의 눈에 불길이 서렸다.
“니들 뭐야? 응? 깡패야? 일진이야? 어디 학교에서 함부로 주먹질을 해!”
헌영은 소리를 지를수록 차오르는 분노와 열기를 참을 수 없었던지 팔을 걷어 올리고, 목을 죄던 카라넥 티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뭐야! 딴 애들이 싸우고 있으면, 이 중에서 한 명이라도 선생님한테 와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아냐? 다들 구경만 하고 있었어?”
일어서지 않은 아이들도 좌불안석이 되어 불편한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할 말이야 왜 없겠는가, 마는 지금 입을 열면 그야말로 불난 곳에 기름뿌리는 짓이리라.
일어선 아이들의 면면을 보자니, 어떤 아이들은 입술이 터져 있고, 어떤 아이들은 볼이 벌겋게 부어오르기도 했다. 헌영은 속에서 터져 나오는 열을 참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