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의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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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데?”
재훈이 피곤하다는 듯 두 눈 사이를 주무르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가죽이 푹 꺼지는 소리가 마치 오랜 피로로 굳어있던 몸이 지르는 비명처럼 들렸다.
“병원, 결정 났어요.”
“······.”
재훈의 시선을 들어올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올려다보았지만 역시나 주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길.”
지난 해, 대통령이 바뀌었다. 그리고 영리법인 허가제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솔직히 선배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우리나라로서는 잘된 일이라는 생각, 지울 수가 없네요.”
“뭐?”
재훈의 목소리가 뾰족한 창이 되었지만, 주영의 철판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사실 선배의 뜻대로 된다면 좋긴 하겠죠. 부자들에게 고급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고수익을 얻고, 그 수익을 저소득층에게 돌려 돕자는 이야기.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까, 라고 묻는다면 4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거든요.”
재훈은 어금니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그렇지 않아요? 선배가 아무리 도덕적으로 운영을 한다고 해도, 영리병원은 수익성을 먼저 추구할 수밖에 없고, 선배의 눈 밖에서 벌어지는 과잉진료나 인력 감축의 현실을 모두 부정할 순 없을 거예요.”
그 말에 재훈이 반박을 하려 했지만, 주영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강남의 그 병원 아시죠? 결국 현 정권 들어서 온갖 부패와 비리가 드러나면서 문을 닫고 말았잖아요. 우리나라 현실에서 영리병원은 도덕적으로 운영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고요.”
“하지만 결국 이 나라에서 영리병원이 세워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나서서 제대로 된 기준을 보여주면 돼. 도덕적으로 운영되는 영리병원이 안 된다는 것은 비관론자들의 말일 뿐이지. 이미 검토가 끝난 이야기잖아.”
주영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현 정권에서는 영리의료법인설립은 불가능해요. 허가가 안날 테니까.”
주영은 들고 있던 서류철을 재훈에게 건넸다. 재훈이 받아보니 보건복지부에서 내려온 공문이었다. 읽어봐야 결국 주영의 말을 보기 좋게 늘린 것에 불과했다.
“좋아, 그럼 지금 짓는 병원은 어떻게 할 건데?”
“일단은 비영리 의료 법인으로 가야죠. 대신 투자금의 한계가 있으니 규모는 축소할 필요가 있겠죠.”
재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솔직히 수익 창출이 되지 않는 병원을 만들 의지가 있느냐는 물음을 먼저 던져야겠죠?”
비록 재훈이 의사의 길을 걷고는 있다지만, 병원 설립의 이유는 단순하게 보자면 수익 창출이 목적이었다. 단순히 병원 이사가 되거나 하는 건 의미가 없었으니까.
물론 현 의료법 하에서 적당히 법망을 피하며 수익성을 제고하는 방법도 있긴 했다. 강남의 모 병원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 병원은 결국 사회적 질타를 받다가 현 정권에서 진보적 성향의 집권당과 정부가 휘두른 망치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대부분 국민들은 환호했고, 소수의 재력가들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생각 좀 해봐야겠어.”
어쩌면 다시 4년이 지난 뒤, 영리의료법인 허가가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때까지 될지 안 될지도 모를 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재훈에게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다.
“연회장님 말씀대로 하위 계열사 하나를 맡으시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재훈이 주영을 째려보며 물었다.
“아버지와 형님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라는 뜻이야?”
두 사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 싶었기에 선택한 것이 여태껏 손이 닿지 않았던 의료법인이었다. 만약 계열사를 맡는다면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불안에 몸을 떨어야 할지도 몰랐다.
“알았어. 일단 시간을 갖고 생각을 좀 해보자. 어차피 엎어진 거 천천히 하자고.”
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실습 나가신 건, 조금 적응이 되셨나요?”
“죽을 맛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재훈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마치 60년대 히피의 재림, 혹은 19세기 말의 보헤미안 스타일의 재훈에게 하루 1시간, 1분, 1초도 자유롭지 못한 실습 생활이란 죽음과도 같았으니까.
“그렇게 버티기 힘들면 그만둬요.”
주영이라면 차라리 그 시간에 가진 돈으로 먹고 놀겠다. 가끔 재훈을 이해하기 어려운 주영이었다. 도덕적 영리의료법인을 세우겠다는 재훈의 망상도 그렇고, 의사에 대한 직업적 소명의식에 불타는 것이 아님에도 의사가 되겠다며 저렇게 죽은 얼굴을 하는 꼴이라니.
“야, 그래도 응원을 해줘야지. 그렇게 쉽게 포기하란 말이 나와?”
“그럼 진짜, 진심으로 이야기 해봐요. 왜 의사가 되려는 거예요?”
“뽀대 나잖아? 영리의료법인의 이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단순히 경영만 하는 사람인 것보다는 의사인 게 남들 보기도 좋지.”
어이가 없으면서도 말을 받아주는 주영이었다.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의사 출신 이사장보다 전문 경영인 출신 이사장이 더 신뢰가 가지 않을까요?”
“그런가?”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멀리 두는 재훈을 보며, 주영은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아마 현재 재훈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 연회장님을 제외했을 때 바로 자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훈은 쉽게 속을 비추지 않았다. 지금도 대충 장난처럼 어물쩍 넘기려하는 것을 보면 그랬다. 그래서 주영은 늘 재훈에게 벽을 느꼈다. 재훈이 아무리 장난을 치고, 농담을 하고, 주영이 막 대들 때도 허허 웃으며 넘긴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가 그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애들은 잘 지내고 있지?”
연 초에 아이들을 만난 뒤로는 재훈도 바빠서 제대로 이야기를 전해듣지 못했다. 물론 특별한 일이 있었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이야기가 있었을 터이니,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것은 큰 사고가 없었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잘 지내죠. 누구랑은 다르게 워낙 착실하고 똑똑한 아이들이니까요.”
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에 내려놓은 서류를 집어 들었다.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좀 더 기다려야 하나. 생각은 해보겠다고 했지만 오래 끌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할아버지도 오래 기다려주시지 않으실 테니.
“교육 사업 어때?”
주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 뜻대로, 라는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재훈도 그냥 꺼내본 말이었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주영이 인사를 건네고 먼저 돌아서는데, 재훈이 붙잡았다.
“잠시만.”
주영이 돌아보자, 재훈이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주영이 영문을 몰라 빤히 바라보는데, 재훈의 손이 주영의 얼굴을 향해 뻗어졌다. 주영은 흠칫 놀라며 살짝 얼굴을 뒤로 뺐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재훈은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눈 아래를 가리켰다.
“눈썹 떨어졌어.”
무슨 말인가, 잠시 궁리를 하던 주영은 이내 붉어진 얼굴을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평범하게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온갖 감정과 사투를 벌였던 자신의 속내를 들킨 기분이었다.
‘억울해.’
이럴 거면 차라리 그만두면 되는데, 또 그건 쉽지가 않았다. 비교대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하은처럼 깔끔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그만둘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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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이 되면서, 아이들의 놀이문화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운동장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할 것 없이 바글바글 했던 운동장이 한산해 보이는 게 가장 대표적이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초등학교보다 훨씬 작은 수의 학생들이 다닌다는 것도 이유일 것이고, 축구 아니면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없던 것에 비해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몇몇 아이들은 농구에, 또 소수의 아이들은 테니스에 빠지기도 했기에 운동장을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운동장에서 땀 흘리면서 노는 아이들이 절대적으로 줄었다는 것이 큰 이유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때는 더 심하대.”
명수가 스탠드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말했다. 옆에 앉아 있던 단유도 아이스크림을 아작 깨물며 으적으적 씹어댔다. 명수가 아이스크림을 천천히 즐기는 것에 비해, 단유는 아이스크림을 씹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 덕분에 편하게 축구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렇긴 하지. 그런데 축구하려는 아이들이 많지가 않아. 그래서 경기하기가 힘들어.”
운동장이 한산해서 좋은 점이 있다면, 단점도 존재했던 셈이다.
“그래서 예전에 반 대항경기 했던 식으로 하려고 하는데, 좀 도와줘라.”
한 반에 4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는데, 이 중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대략 20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 그런데 축구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는 20명이 되지 않았고, 그 모든 아이들이 다 같이 나와서 즐기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어서 한 반의 아이들끼리 시합을 벌이기가 곤란할 때가 많았다.
“나는 힘이 없고, 지태한테 물어봐. 지태가 우리 반 반장이니까.”
“그러니까, 도와달라고.”
“응?”
“지태는 니가 말하면 금방 오케이할 걸?”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명수를 바라보니, 명수는 왜 그러냐는 눈빛이었다. 설명을 요구하자, 명수가 히죽 웃었다. 그냥 웃기만 했다.
“···그래서 명수네 반이랑 반 대항 축구시합을 하자고 하는데, 니 생각은 어때?”
다음 날, 등교 이후 만난 지태에게 단유는 명수의 제안을 설명했다. 단유의 이야기에 지태가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뭐. 우리 반에도 축구 좋아하는 아이들 있을 테고, 반 대항 시합이면 구경하는 재미도 있겠네. 점심시간에 할 일 없이 교정 산책 하는 아이들도 줄어들 테고.”
말은 교정 산책이라지만, 사실은 어둠의 유혹을 받아 방황하는 몇몇 아이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단유 역시 그 의미를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2, 3달을 함께 지내다 보니 정말 다양한 아이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외부의 일에 큰 관심을 쏟지 않는 단유라도 들리는 귀를 닫고 살지 않는 이상, 어떤 아이들이 어떻게 학교생활을 하는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광종이는 정말 학기 초 반짝 두각을 드러낸 ‘애송이’였다. 진짜배기들은 말없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점점 무리를 짓고 있었다.
흡연자가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신기하게도 선생님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 아이들이 처벌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조심성 없던 몇몇이 현장에서 적발되는 사례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흡연자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내가 그 아이들을 모두 선도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되도록 건전한 놀이문화를 제공하는 게 반장으로서의 역할이 아닐까 싶어.”
‘반장역할론’이라고 거창하게 수식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전 단유의 조언을 들은 이후, 지태는 조금 자신감이 과잉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적극적인 것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학기 초만 해도, 지태는 모두에게 적당한 호감의 상대였는데, 지금은 몇몇 학생들―그들이 소위 불량스러운 무리의 일원임은 분명했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조금 있다가 쉬는 시간에 잠시 이야기해서 선수 뽑고, 내일 점심시간에 한 번 붙는 걸로 하면 되겠지.”
단유는 별 다른 고민 없이 쭉쭉 계획을 세워나가는 지태의 추진력에 감탄했다.
1교시가 끝나고 지태가 교탁 앞으로 가서 아이들을 잠시 자리에 붙들었다.
“···이런 이유로, 축구 시합 제안을 받았는데 좋을 거 같아. 우리 반에도 선수 구성해서 반 대항 시합을 하면 재밌기도 할 거 같고. 어때?”
반 아이들은 대체로 나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대체로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지, 모두가 좋아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일부는 기분 나쁘다는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별 것도 아닌 걸로 사람 붙잡고 있네.”
광종이 자리에서 벌컥 일어나더니 뒷문으로 나갔다. 잠시 교실 안이 썰렁해지긴 했지만, 지태는 곧 표정 관리하면서 선수 구성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지태가 발견한 이 축구 시합의 또 다른 장점은 ‘통합’이었다. 평소 불량스러움을 마음껏 발휘하던 몇몇 아이들이 선수로 뛰겠노라고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불량’스럽다는 기준과 ‘축구를 좋아한다’라는 것은 상관관계가 없었다.
“오케이, 준열이까지 11명.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교체 선수까지 뽑아 놓자. 어때?”
그렇게 해서 14명의 선수가 선출되었고, 이 결과는 명수에게 전달되어 다음날 점심시간, 비공식적 반 대항 경기가 펼쳐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