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의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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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초의 선생님들은 늘 일에 치여 산다. 학기 중간이라고 해도 바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특히 학기 초와 말에는 온갖 서류들로 인해 선생님들은 진이 빠질 정도였다. 각종 공문서와 교원잡무와 행정업무 등으로 부담을 느끼지 않는 선생님이 없을 정도였고, 때문에 지난 40여 년간 학교 현장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지적되던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업무경감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수업이 끝난 후에도, 교무실에 남아 서류작업을 하던 박헌영은 들고 있던 펜을 놓고, 기지개를 폈다. 한껏 뭉쳤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통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고개를 돌려 목근육을 풀어주려 했더니, 창밖으로 주황색 노을이 넘실대고 있었다.
“박 선생, 일 많이 남았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희재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헌영은 책상에 남은 생활기록부들과 공문서 다발을 대충 훑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다 못하겠어. 내일 하지 뭐.”
본래 오늘 일은 내일로 미뤄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오늘을 살 수 있으니까. 희재가 손가락을 꺾어 입가에 대고 시늉을 했다.
“한 잔 콜?”
헌영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의자 등받이에 걸쳐 뒀던 재킷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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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 좋네. 오늘 술 좀 잘 들어갈 거 같은데?”
가끔 그런 날이 있지. 소주 첫 잔이 너무 달아서 기분이 상쾌해지는 기분이 드는 그런 날.
헌영은 술잔을 내려놓은 뒤, 앞에 놓인 계란말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쪽 반은 어때?”
“뭐? 앞 뒤 자르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란 거야?”
희재는 평소에도 다소 까칠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영어과를 맡은 희재는 예전 미국 유학 당시, 너무 고생을 해서 그런지 자기가 생각해도 성격이 조금 까탈스럽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보기에는 ‘조금’이 아니라 ‘거의 매사에’ 까칠한 면이 있었다. 본인만 그 심각성을 몰라서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반에 문제가 될 만한 아이들이 없냐는 이야기지. 아니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그런 까칠한 성격의 희재가 헌영과 친해지게 된 계기는 별 거 없었다. 둘 다 술을 좋아했다는 것. ‘애주가’와 ‘중독자’의 사이 어디쯤에 위치할 법한 두 사람이었다. 헌영이 아직 미혼인 것에 반해, 희재는 결혼을 한 입장임에도 술자리는 꼬박꼬박 챙기고 다녔다. 심지어는 오늘처럼 먼저 술자리를 제안하기도 했고.
“아, 사실 나도 들었지. 너희 반에 문제아 있다며? 다행히 우리 반엔 그런 애는 없어. 근데 모르지. 어디 애들이 ‘나 문제아요’ 하고 사고치나? 예고편도 없이 바로 본편 클라이맥스로 뛰어드는 게 이맘 때 애들인데.”
희재가 김치부침개 하나를 입안에 가득 채워 놓고 우물거렸다. 헌영은 희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술을 적셨다.
“하긴 그런 면에서 보면 예고편도 믿을만한 건 아니지. 어떤 영화는 예고편만 화려하고 본편은 밋밋해서 실망스러운 것도 있으니까. 반면에 예고편은 별 거 없는데 본편이 역대급인 영화도 있지.”
“뭔가 의미심장한 이야기 같은데?”
희재가 부침개를 찢다가 헌영을 바라보았다. 헌영은 피식 미소를 짓더니 잠시 술잔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입을 열어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사실 우리 반 애들 중에 본방 전에 선 공개라고 하나? 미리 간을 좀 보여준 애들이 몇 있어. 한 녀석은 교감선생님한테 인증을 받은 터라 경계를 했는데, 가만 살펴보니까 이 놈, 쭉정이도 보통 쭉정이가 아냐. 비실비실해 보이는 외모도 그렇고, 숫기도 없고. 그냥 설렁설렁 보면 흔해빠진 중딩이더라. 일탈 같은 건 꿈도 못 꿀 애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잘 됐네? 사고 안 칠 것 같단 소리 아냐?”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치던 희재가 묻자, 헌영이 고개를 절래 저었다.
“그건 모르지. 니 말대로 갑자기 홱 돌아버릴 수도 있는 거니까. 괜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부르겠어? 그런데···사실 지금 모습만 보면 얌전하고 문제가 될 소지는 별로 없어 보여서, 말없이 주의만 기울이고 있는 중이긴 하지.”
희재가 술잔을 들었다. 헌영도 맞잔을 들어준 뒤 말을 계속 이었다.
“근데 걔 말고 선공개를 한 놈이 있는데, 이게 골 때린단 말이야.”
“왜? 험악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생긴 것만 보면···TV에 나오는 아이돌? 연예인급? 그 정도로 잘 생긴 놈이야.”
“그런 애가 있어? 그런 애가 있으면 벌써 소문이 나고도 남을 일 아닌가?”
헌영은 잠시 그 얼굴을 떠올렸다. 말없이 서 있던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커서 줄을 세우면 얼굴이 두드러지게 보일 때가 있었다.
“일단 내가 걔한테 관심을 갖게 된 게 입학식 때인데, 애들이 앞에 이렇게 줄을 서 있잖아? 그럼 사실 궁금하잖아? 올해는 어떤 애들이 우리 반에 들어오나, 궁금하잖아? 그래서 이래 둘러보는데, 딱 눈이 마주친 거야. 근데 이 놈이 나랑 눈싸움을 하기 시작하네?”
“눈싸움?”
“응, 딱 눈을 이래가지고 날 보는 거야. 무슨 생각이 들겠어? 아, 이 놈 심상치 않은 놈이구나, 그런 생각이 탁 스치고 지나가는 거야. 그래서 이 놈 언제까지 그러나보자, 하고 나도 계속 쳐다봤지. 그런데 끝까지 눈을 안 돌려! 계속 날 보는 거야! 와, 이 놈. 이거 처음에 제대로 안 잡으면 큰일 날 녀석이겠구나, 감이 오더라고.”
눈을 부릅뜨고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상황재현을 하는 헌영의 말에 점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희재는 술잔도 내려놓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고 쳤어?”
“사고는 무슨. 그게 선공개였다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헌영은 잔뜩 힘을 주던 눈에 힘을 풀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잡고 들었다. 희재가 궁금하다는 눈으로 맞잔을 부딪쳐주자, 헌영은 한 번에 술을 털어 넣었다.
“이 놈이 보통 놈이 아닌 거였지. 이 놈, 영재라네?”
“영재?”
학기 초, 헌영은 단유의 보호자를 만났다. 법정 후견인을 대신하여 왔다는 사람은 현재 단유와 명수를 돌보고 있는 보육교사 출신의 박애란 선생님이었다. 박애란 선생님을 통해 단유와 명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헌영은 살짝 충격을 받기도 했고 다른 선입견이 생기기도 했었다.
“고아라고?”
“응. 그래서 아, 이 놈 한 성격 하겠구나. 언제든 한 번 큰 사고 칠지도 모르겠구나. 경계해야 할 놈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까 이 놈이 그 ‘은둔형 천재’? 뭐 그런 스타일이더라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희재에게 헌영은 몇 주간의 관찰 결과를 알렸다. 거의 대부분 교실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는 모습이나, 늘상 책을 끼고 있다거나, 평소에도 거의 있는 듯 마는 듯한 모습으로 존재감을 지우고 살아가는 아이에 대한 관찰이었다.
“아마 우리 반에서 제일 얌전한 아이라면, 그 녀석일걸? 내 수업 시간에도 절대 아는 티를 안내고 그래.”
수학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헌영은 자신의 수업시간에 몇 번 불러서 시켜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학기 초라 진도가 많이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어려운 난이도의 테스트를 하기란 어려웠고, 때문에 단유가 진짜 영재인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몇 번이고 가졌던 선입견들, 으레 그러겠거니 하고 짐작했던 자신의 생각을 계속 부셔대는 아이라는 점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지금 그 아일 보면, 사실 조금 미안해지는 기분도 들어. 학생들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행동, 말, 생김새 등으로 쉽게 짐작해버리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헌영의 급작스러운 고해(告解)에 희재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헌영의 고백은 사실 모든 교사들이 가진 고민이기도 했으니까.
“사실 다른 선배 교사들에 비하면 이제 겨우 5년?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내가 아이들을 미리 재단하고 평가하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자만에 빠졌던 거 같아. 사실 그 아이는 이유도 없이 나한테 미움을 받은 셈이잖아? 비록 내가 그 아이에게 어떤 해코지를 한다거나, 불이익을 준 일은 없지만 그래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렇게 말하면, 나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난 조금 다른 생각이야. 우선 우린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면 안 돼. 그 아이 한 명에게 붙은 전담 교사도 아니고, 맡은 아이만 무려 40명이야. 헌영아, 우린 교사야. 모두에게 공평하고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법원의 판사가 그렇듯이, 교단에 선 교사는 그래야 한다고 봐. 그래야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헌영은 희재의 열변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이렇게 노력함에도 교실은 언제나 살얼음판이지. 언제 어디에서 금이 가고 구멍이 날지 몰라. 선두에 서든, 뒤에서 밀어주든 교사는 모든 아이들을 관찰하고 이끌어야 하는 법인데, 몇 사람에게 치중한다는 건 다른 사고를 야기할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넌 교사지, 신부나 목사가 아니야. 머릿속에서 저지른 일을 가지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
헌영은 가타부타 말없이 소주잔을 들었다.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리며 소주를 마신 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니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몇 몇 학생들을 주의하고 경계하는 내 태도가 나쁘지 않다고 봐. 병아리 감별사? 뭐 그런 직업 있잖아? 수없이 많은 병아리들 속에서 암수를 구별하는 그런 거. 교탁 위에서 바라본 아이들이 바로 그런 병아리 같아. 그리고 난 빠른 시간 안에 그 아이들을 구별해내야 돼.‘근묵자흑’ 맞나? 검은 얼룩이 있으면 빼내고, 녹이 슬면 닦아내고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지. 그런 역할을 교사가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해.”
희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기울였다. 가끔 이런 이야기가 나오긴 해도, 오래 가지 않는다. 오늘의 자리는 가볍게 마시는 자리였으니까. 헌영도 희재와 다르지 않았다. ‘교사의 자질’ 혹은 ‘교사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는 것이 미덕.
“아무튼 그렇다. 우리 반, 조금 스펙터클한 구성이더라고. 문제아로 찍힌 애. 문제아로 찍힐 뻔 했지만 사실은 모범생. 모범생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문제아.”
“그건 또 누구야? 문제아는?”
“있어. 그냥, 문제아.”
헌영은 피식 웃으며 술잔을 채우려 병을 들었는데, 병이 비어있었다. 희재와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며 마지막 술잔을 채우고 비웠다.
술자리를 끝내고 나오는 길, 주중이라 간단하게 먹자며 서로 소주 한 병씩만 마셔서 그런지 조금 알딸딸한 느낌 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2차 갈까? 아쉽지 않아?”
“내일 수업도 있는데 여기까지 하지 뭐.”
아쉬움을 남기고 두 사람은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헌영은 괜한 이야기를 했다며 자책했다. 이왕 말을 꺼낸 김에 다 털어놓을 걸, 하는 마음도 들었다.
사실, 지욱이나 단유 정도는 그냥 이런 아이도 있더라 하는 정도였다. 긴장감 넘치는 예고편에 비해 심심하기 짝이 없던 본방송이라 다른 의미에서 안심했던 헌영은, 예고편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주연급 인물의 등장 때문에 하루하루가 피 마르는 느낌이었다.
“하아.”
별것도 아니지만 괜히 신경 쓰게 만드는 녀석. 다른 문제아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문제아였다. 하지만 이 역시도 어쩌면 자신의 선입견일 수 있었다. 아직까지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아이였으니까.
헌영은 술을 마셔서 열이 오른 탓인지, 살짝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다 곧 도착지임을 알고 버스의 차임벨을 눌렀다. 몇 안 되는 승객들은 버스 안을 울리는 벨소리에도 무관심하게 바깥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누가 벨을 누르던, 혹은 버스에서 내리던, 승객들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게 누구든 그저 잠시 동안 버스 안의 공간을 공유했을 뿐인 ‘타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