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03화 (203/956)

Sunris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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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이 진짜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데 말을 해주지 않는 건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 가운데, 선생님과 아주머니가 돌아왔다. 이후, 아주머니가 솜씨를 발휘하여 매니저와 수련은 아이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잘 먹었어. 다음에 또 보자.”

검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쓴 수련은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긴 뒤 배웅 나온 세 사람을 향해 손을 들 때였다. 갑자기 매니저가 단유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서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매니저는 손을 흔드는 수련을 끌고 돌아갔다.

두 사람이 돌아간 뒤, 명수는 단유를 데리고 TV앞으로 갔다. 또 한 번 더 영상이 재생되고, 이제는 노래가 꽤 익숙하다고 여길 정도가 될 무렵 명수가 물음을 던졌다.

“정말 싫어?”

“응?”

명수가 손가락으로 TV를 가리켰다.

“연예인.”

단유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 많이 벌잖아?”

단유는 피식 웃으면서 TV를 껐다.

“돈은 니가 더 많이 벌 거잖아? 국가 대표 돼서.”

명수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히죽 웃었다.

“맞아.”

“그런데···.”

단유가 잠시 말을 끌었다. 명수의 눈치를 보다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뒷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들었다.

“지금은 이 정도로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뭐야?”

“아르바이트 비.”

영문을 몰라 눈만 껌뻑이던 명수가 뒤늦게 의미를 알아차리고,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단유도 손을 들어 거실이 울릴 정도로 세차게 손뼉을 마주쳤다.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냐며 돌아볼 정도로.

****

입학식 이후 3일 뒤, 토요일을 맞이하여 명수는 주영과 함께 유소년 클럽 가입테스트를 받으러 떠났다.

“넌 안 갈래?”

“괜찮아요. 오늘은 그냥 집에서 기다릴래요. 읽을 책도 있고요.”

주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단유는 명수에게 다가가 잘하라고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명수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사실 단유도 가보고 싶긴 했는데, 어제 저녁 명수가 혼자 가서 테스트를 받을 테니 따라오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갔다 와서 깜짝 놀라게 해줄게.”

단유는 명수의 속내까지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하여 토요일 오전, 명수는 주영과 함께 유소년 축구 클럽이 있는 축구장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명수를 흘끔 바라보던 주영은 명수가 중요한 것이라도 되는 듯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는 물건의 정체가 궁금했다. 물어보니 축구화라고 했다.

“석고가 사준 축구화요.”

그저께 시내에 나가서 한참을 고르고 고른 신발이라며, 살짝 끝을 보여주는데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빨간 축구화였다.

“비쌀 거 같은데?”

이제껏 긴장한 듯 말이 없던 명수는 그 질문을 받자 평소의 명수처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단유가 제안을 받은 때부터 해서 며칠 전 갤럭시즈의 매니저가 찾아와 주고 간 영상과 아르바이트비(費)―단유는 단호히 아르바이트였음을 주지시켰다―에 이르기까지 구구절절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축구화 하나를 고르기 위해 얼마나 신중하게 선택을 했는지를 설명하며 뿌듯해했다.

“그런데 왜 오늘 혼자 가겠다고 했어? 단유도 따라가면 좋지 않아? 단유가 응원해주면 힘이 나지 않겠니?”

그러자 한참을 밝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명수의 얼굴이 싹 굳었다. 잘못 말했나 싶은 생각이 스치고 지날 때, 명수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석고가 같이 가면 좋긴 한데요, 어쩌면 석고 때문에 제대로 선택을 하지 못할 거 같아서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명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석고는요, 제가 잘하든 못하든 절 응원할 거예요.”

“그렇겠지.”

“제가 잘해가지고 클럽에 가입할 수 있게 되면 다행이긴 한데요, 만약에 제가 잘 못해가지고요, 클럽에 못 들어가면요, 석고는요,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줄 거 같아요.”

“그···렇겠지?”

“그러면요, 제가 포기하기 힘들 거 같아요.”

“뭘 포기해?”

“클럽에 들어가는 거요, 사실 저 클럽 안 들어가도 상관 없거든요. 돈도 많이 들어서 매달마다 돈도 내야 하는데, 제가 돈이 없잖아요. 아, 형이 내준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그래도요. 이 신발도 사실 석고가 사준 거라서 신기는 해도요, 가격이 너무 비싸서요, 다음에는 신발 어떻게 사요, 그리고 체육복도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래서요, 사실은요, 테스트만 받고 그냥 오려고요.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제가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지.”

명수의 이야기는 조금 두서가 없긴 해도 이해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지난 번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아예 클럽에 가입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랄까.

단유도 그렇고, 명수도 마냥 어리게만 볼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성장과정에서 다른 아이들과 다른 과정을 거쳐 온 아이들이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눈칫밥을 먹었을까? 속없이 웃는 것처럼 보이고, 틈만 나면 놀 생각만 하는 명수라도 속에는 저리도 많은 걱정과 부담을 안고 살았나보다,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아렸다.

그런 와중에 구김살 없이 자란 것이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형이나 누나가 도와주는 게 그렇게 많이 부담스럽니?”

“어릴 때는 몰랐는데요. 지금은 좀 그래요.”

명수는 호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것도요, 매달 돈이 나가는 거라면서요? 정말 몰랐거든요. 그런데 그 돈도 되게 많이 나가더라고요. 석고가 계산해줬는데, 1년 동안 나가는 돈이 어마어마해서요. 솔직히 쓰기가 좀 그래요.”

“안 그래도 돼. 그 정도는 너희들이 마음껏 써도 형이나 누나한테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게 아니고요. 나중에 저희가 이걸 갚으려고 하는데요, 너무 많이 쓰면 나중에 갚기 힘들잖아요.”

주영은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고정된 시선이 흔들리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살짝 흐릿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전방주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선배는 얘들 생각을 알고 있을까?’

나중에 가서 의견을 나눠봐야겠다, 생각한 주영은 잠시 입을 닫고 운전에 집중했다. 명수도 말할 분위기는 아니라고 생각한 것인지 입을 닫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3월 첫 주의 주말이라 그런지, 아니면 모처럼 날씨가 풀려서 기분이 좋아진 탓인지 나들이를 나온 차량들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이 입은 옷과 차의 색깔은 여러 가지였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봄빛이라 불릴만한 색깔 하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

“명수야, 늦겠어.”

단유가 현관에서 기다리자 방에서 허겁지겁 튀어나온 명수가 윗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은 모습으로 달려 나왔다.

“가방은 챙겨.”

명수는 빈손을 바라보더니, 제 머리를 툭 치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다녀오겠습니다.”

선생님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은 오피스텔을 빠져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명수가 디지털 숫자판을 보며 투덜댔다.

“우리 집 너무 높은 거 아냐? 낮은 데였으면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도 될 텐데.”

단유는 잠시 비상구 계단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저었다. 15층에서 1층까지 뛰어 내려갈 시간에 차라리 얌전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물론, 단유 혼자라면 다르겠지만.

이윽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두 사람은 학교까지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우리 자전거 있으면 좋겠다, 그치?”

단유는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생각하면서 동시에,

‘점점 많은 것들이 필요해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 해도 점점 더 많은 책이 읽고 싶고, 도서관에 늘 필요한 책들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갖고 싶은 책, 소장하고 싶은 책들이 눈에 들어오던 무렵이었다. 하물며, 축구부에 들어간―클럽은 들어가지 않았다―명수는 오죽하겠는가. 다른 아이들은 축구화도 두 켤레 내지 세 켤레 씩 가지고 있고, 일반 운동화와 체육복, 유니폼, 양말 등을 세트로 들고 다니는 판국이었다.

6학년 때부터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현실에 부딪치자 단유는 훨씬 더 곤란한 문제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재훈의 말대로 지원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고맙게 쓰면 될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유혹과 반대로 ‘홀로서기’를 꿈꾸는 단유와 명수는 쉽게 손을 내밀기가 어려웠다.

1학년 7반 교실은 동쪽 끝, 3반은 서쪽 건물 중앙부에 위치해 있었다.

“나중에 보자.”

명수가 손을 흔들며, 복도를 가로질러갔다. 단유도 교실을 찾아 들어갔다. 교실 문을 열자, 일찍 등교했던 몇몇 아이들의 시선이 날아왔지만 곧 흥미를 잃고 본래 하던 일로 돌아갔다.

입학식으로부터 3주 정도가 흘렀지만, 단유는 반에서 별로 친한 사람이 없···.

“김단유! 굿모닝!”

“어, 그래.”

···아주 없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해서 친하다기 보다는 친해지고 싶어서 엉겨 붙는 아이가 있었다. 아니, 친해지고 싶은 건지 그 의도조차 정확히 파악이 되지 않는 아이, 지태였다.

“반장! 왜 이렇게 늦어?”

단유의 뒤를 따라 등교한 지태가 모습을 드러내자, 몇몇 아이들이 반장을 반겼다. 단유가 지태의 인사를 적당히 받아넘기고 자리로 돌아갈 때, 지태는 예의 맑은 웃음을 지으며 다른 아이들에게 인사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 돼서.”

우습지도 않은데 지태는 자기가 한 말이 무척 재밌는 농담이라도 된 것처럼 킥킥거렸다.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우면 저런 부작용이 있는 걸까?

단유의 자리는 창가 옆 분단의 제일 뒷자리였다. 반에서 제일 키가 큰 애는 병수라는 아이였는데 그 다음으로 큰 사람이 단유여서 두 사람은 짝이 되었다.

“굿모닝.”

“응. 안녕.”

병수는 멀대 같이 키만 크다, 고 묘사하기에 적당한 친구였다. 얼굴이 무척 동안이라 얼굴만 보면 초등학생이라 생각이 들 정도로 순진무구하게 생겼다. 젖살이 덜 빠진 동그란 얼굴에 눈썹과 입꼬리가 모두 살짝 내려가 우울한 인상이었다. 큰 키에 비해 몸은 대체로 말라서 허약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인상과 달리 성격은 꽤나 밝은 편이었다. 단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정도의 밝음, 이랄까?

“이거 봤어? 빌려줄까?”

단유의 기준에서 병수는 꽤나 밝은 소년이었다. 이제 막 등교한 짝에게 보던 만화책을 권할 정도로.

“아니, 괜찮아.”

그런 친구에 비하면 자신은 얼마나 어두운 성격인가. 짝의 제안을 무 자르듯 싹뚝 잘라먹는 모습이라니.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요즘 40여명의 낯선 남자들 틈에 있으려니 자신이 저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질까,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어쩌면 단유가 주변 아이들의 얼굴과 성격을 남몰래 평가하듯, 다른 사람들도 단유를 평가할 것이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자신을 평가할까?

그 때 교실 뒷문이 열리고 한 아이가 묵직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입학식 첫날 사고를 일으켰던 장본인이자, 그 이후 좀처럼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점점 어둠 속에 파묻혀 가는 광종이었다.

“······.”

과묵한 아이는 아니었던 같은데, 점점 과묵함이 그의 지방질만큼이나 깊어지고 있었다. 더불어 그들의 패거리도 함께. 아직까지는 첫날부터 함께 했던, 초등학교 동창 출신의 패거리―그래봐야 이제 3명 정도만 남았다―가 있었다. 그러나 첫 날 우르르 몰려들던 다른 초등학교 출신 아이들은 광종을 못 본척했다. 대신 그들은 또 다른 무리를 지어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새로운 세력의 중심에는, 아직까진 단유가 말 한 번 붙여본 적이 없던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 소년이 교실 앞문을 열고 손을 번쩍 들며 활기찬 모습으로 등장했다.

“씨발, 굿모닝이다!”

욕인지 인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소리를 지르며 등장한 이는 ‘백철규’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었다.

“뭐, 좋은 일 있냐? 월요일 아침부터 기분 좋아 보인다?”

첫날의 소란에도 경거망동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던 소년 ‘철규’가 반에서 새로운 세력을 일으키고 그 중심이 된 것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사연이랄까, 사건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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