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202화 (202/956)

Sunris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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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의 말에 단유는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잔뜩 이맛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저 진짜 생각 없다니까요.”

그러나 매니저는 능글대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와 단유 옆에 앉았다. 한쪽 팔을 들어 단유의 어깨에 걸치는데 희미하게 향수 냄새가 났다.

“그러지 마라. 너 정도면 대박난다니까? 이번에 찍은 뮤직비디오 못 봤지? 아주 끝내주더라.”

“나도 봤는데, 너 되게 잘 나왔어. 넌 실물보다 화면이 더 잘 나오는 거 같아.”

뭘 모르던 어렸을 때였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단유는 두 사람 사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어깨를 두른 매니저가 억지로 앉혀서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알았어, 알았어. 장난 그만할 테니까 진정해. 형이 널 위해서 선물도 가지고 왔는데 말이야.”

“뭔데요? 선물?”

‘선물’이란 말에 명수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니 것도 아닌데 웬 관심?”

수련이 핀잔을 던지자, 호빵을 안고 있던 명수가 실실 웃음을 지었다.

“얘께 내꺼고 내께 얘꺼고, 그런 셈이죠.”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책만 아니면요.”

매니저는 피식 웃으면서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끄집어 들었다. 얼핏 보니, 엄지손가락 크기의 USB였다. 매니저는 그 USB를 TV 옆에 붙은 단자에 꽂고 리모컨을 들었다.

단유는 어쩐지 저 선물이란 것이 어떤 것일지 예상이 되었다.

“하지 마세요.”

“왜? 아직 뭔지도 모르면서?”

“알 거 같아요.”

매니저가 빠진 틈에 수련이 팔을 걸치고 단유를 붙잡았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수련은 가까운 사람에게 장난스러운 모습도 종종 보이곤 했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니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일 수도 있잖아?”

그 동안 리모컨을 조작하던 매니저는 USB 안의 동영상을 실행시켰다. 명수도 호기심을 갖고 TV를 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TV화면에서 나온 것은 단유가 예상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10초가량 클래식 피아노 전주가 나오다가, EDM 풍의 전자드럼과 스트링이 가세하면서 미디엄템포의 R&B 댄스곡이 화려하게 꾸민 갤럭시즈와 함께 등장하였다. 뮤직비디오는 다른 것들과 비슷한 형식이었다. 군무 컷과 이미지 컷, 스토리 컷 등이 어우러진 뮤직비디오는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색감과 함께 연출되었다. 이 영상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역시 갤럭시즈 멤버들의 뛰어난 외모였다. 외모가 주목받는 대신 가창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라는 대중의 선입견을 깰 만큼 음악도 좋았다. 다만 너무 흔한 R&B 댄스곡인지라 유사장르의 곡들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있다고는 자신하기는 어려웠다.

또 하나, 이 뮤직비디오에서 주목할 점은,

“와, 석고다! 대박!”

단유가 출연한다는 점이었다. 단유는 검은 정장을 입은 미소년으로 등장하여 스토리 컷 중간마다 출연하였다. 가끔 클로즈 샷으로 단유를 비출 때마다 명수가 손가락질하며 감탄을 했고, 단유는 보는 내내 얼굴을 가려야 했다. 그러나 호기심이 아주 없지는 않은지라 실눈을 뜨고 영상을 훔쳐보았다.

****

단유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게 된 계기는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굳이 어느 한 쪽을 고르자면, 예고된 우연이랄까?

단유와 갤럭시즈가 인터넷 방송을 하던 당시, 해당 영상을 본 사람은 1천명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갤럭시즈는 인지도가 부족한 걸그룹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단유의 기행(?)은 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고, 이 때문에 조금씩 녹화 영상의 조회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팬카페에서는 2차 방송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그리고 수련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도 야매성형상담(?)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구체적인 언급까지 나오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소속사에서는 팬카페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확인했고, 향후 플랜을 세웠다.

“어떻게 할까?”

“나쁘지 않겠는데요?”

나쁘지 않다면야 뭐든 해야 할 신인 걸그룹. 약간의 시간을 투자해서 인지도와 유명세를 끌어올 수 있다면 해 볼만하다는 판단을 내린 기획사였다.

의사를 타진하고자 단유에게 연락을 취한 것은 매니저였다. 리조트에서 헤어지기 전, 하은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던 매니저는 하은을 통해 단유의 연락처를 받았고, 단유와 연락을 한 뒤 인평시까지 한달음에 내려온 매니저였다.

단유는 매니저의 제안에 단호하게 답변했다.

“싫은데요.”

매니저는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방송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아느냐, 흔치 않은 기회다, 혹시라도 댓글에 좋지 않은 내용이 올라올 경우에는 법적인 조치도 취해줄 수 있으니 걱정 말라, 출연료는 충분히 지급하겠다는 둥 온갖 제안과 약속과 선물을 제시했으나 단유는 단호히 거절했다.

“왜 그렇게 싫어하는데? 혹시 지난 방송 때문에 그래?”

매니저의 기억에 지난 방송에서 단유가 실수를 하거나 혹은 그 때문에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어서 싫어요.”

하루를 빠지든, 혹은 반나절을 빠지든 어느 정도 시간 희생을 감수해야 할 작업인데, 단유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방송일을 할 생각도 아니었고, 댓글 따위를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었고, 돈은 있으면 좋겠지만 딱히 절실한 정도도 아니었기에 매니저의 제안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1차 접촉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매니저는 이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직감에 2차 방송이 만들어진다면 분명 갤럭시즈의 인지도 상승에 큰 기여를 할 콘텐츠가 만들어질 거라고 확신했다.

2차는 매니저와 갤럭시즈 멤버들이 함께 했다. 난데없는 걸그룹의 습격(?)에 갓 취업한 박 선생님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고, 명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으며, 단유는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아저씨, 진짜 저 하기 싫어요.”

매니저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저씨 아니다. 결혼도 안했고, 너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

호칭을 ‘형’으로 바꾸는 것 정도는 양보할 수 있었지만, 방송 출연은 정말 싫었다.

“넌 얼굴도 좋고, 말도 잘해서 사람들이 다들 널 좋아할 거야.”

수영의 말에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 속의 사람들이 저를 좋아해주는 건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아요. 물론 누나들의 연예인으로서의 활동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전 연예인도 아니고 연예인이 될 생각도 없으니까요.”

수련이 다음 타자가 되어 단유를 설득했다.

“지난번에 니가 도와준 덕분에 방송이 잘 된 건 알지? 너 덕분에 우리 팬카페에 난리가 났어. 그리고 그 분들이 니가 한 번 더 출연하길 원해서 이렇게 온 거라는 건 알지? 그럼 지난번처럼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연예인으로서 방송을 하는 게 아니라, 선의의 차원에서 말이야.”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선의의 도움은 지난번에 한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 되는데요? 그리고 그 때도 말씀드렸지만, 저 많이 후회했어요.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늘어놓아서 마치 말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는 사기꾼이 된 기분이었거든요.”

명수의 손을 잡고 집안을 구경하다 마침 거실로 나온 예영이 단유의 이야기를 듣고는 꾀를 냈다.

“그럼 말 안하고 있는 건 괜찮아?”

“말을 안 하면 방송을 하는 의미가 없지, 바보야.”

지수의 타박에 예영이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우리도 모니터했지만, 단유 외모가 꽤 되는 편이잖아요? 명수 너도 잘생기긴 했어, 오해하지 마. 아무튼, 예전에 단유가 모델을 한 적도 있다고 하더니 카메라 시선 처리도 그렇게 어색하진 않았어요. 그쵸?”

매니저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니터 화면에서 단유 얼굴 보니까 꽤 비주얼이 좋단 말이죠? 만약 자막을 넣는다면 김단유, 12세, 초절정미소년 이렇게 넣어도 좋을 것 같단 말이죠.”

“본론이 뭐니?”

수영이 참지 못하고 예영의 말을 잘랐다. 예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단유, 우리 뮤직비디오에 출연시켜보죠?”

뮤직비디오, 라는 이야기에 다들 얼이 빠진 얼굴로 예영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단유가 2차방송하기 싫다는데 억지로 앉혀서 이야기해봐야 기분도 좋지 않을 거고요. 저 개인적으로도 별로 강요하고 싶진 않아요. 게다가 같은 걸 반복하는 셈인데, 이게 재미있을까 생각하면 별로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오는 동안 생각을 해봤죠. 인터넷 방송 말고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고, 단유도 부담이 덜 되고, 우리도 충분히 선전효과를 누릴 만한 게 뭐가 있을까 하고. 그런데 문득 우리가 지금 준비하는 싱글 앨범 타이틀이 생각나더란 말이죠.”

“‘미챠(meet yah)’?”

“그거요! 지워지지 않는 추억 속, 첫 사랑에 대한 고백. 그런 컨셉이잖아요. 거기에 단유가 들어간다면? 꽤 괜찮은 그림 나올 거 같지 않아요? 오히려 성인 연기자보다 좋은 그림에 컨셉이 될 지도 몰라요. 팬들도 아마 좋아할 거구요.”

매니저는 모처럼 예영이 좋은 아이디어를 줬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궁리를 하던 매니저는 통화를 위해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 수영과 지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매니저가 빠진 자리를 채우고 앉았다.

“단유야, 어때? 뮤직비디오라면 덜 부담이 가지 않을까?”

단유는 볼 끝을 물들이며―열이 오른 건지, 화장을 해서 그런 건지는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더 부담되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4분짜리 뮤직비디오라도 편집 분량 등을 고려하면 하루 종일 찍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 저도 알거든요?”

과거 도서관 홍보용 포스터 2종류를 제작하기 위해, 반나절 이상을 카메라 앞에 섰던 경험이 있던 단유였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운 설득 작전에 돌입했다.

“명수야, 너도 단유가 TV나오는 거 싫어?”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

“그치? 나오면 좋잖아?”

명수를 포섭함과 동시에 단유에게 구애를 펼쳤다. 다섯 사람이 돌아가며 펼치는 구애작전에는 천하의 단유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마침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매니저가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받았다며 윗선까지 보고됐다는 말에 단유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

“야, 저 때깔 봐라! 명수야, 니 친구 멋지게 나왔지?”

“진짜 멋있어요!”

명수는 2번째로 감상 중이었다. 어째 단유보다 더 좋아하는 명수였다. 매니저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단유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우리 회사 사람들도 이거 보고 감탄을 했다. 사장님이 직접 이야기하셨어. 너 정도면 충분히 아역 모델이나, 배우도 가능할 거라고. 진짜 연예계 쪽 생각은 없니? 사실 알고 보면 니 나이 때 활동 시작한 아이들 많아. 게다가 우리 회사가 비록 영세하긴 해도, 너 정도라면 얼마든지 전폭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우리 사장님 분위기로 봐선 얘네들보다 널 띄우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보는 것 같거든?”

매니저가 슬쩍 눈짓으로 수련을 가리키자, TV를 보던 수련이 어찌 알았는지 인상을 확 쓰면서 매니저를 째려봤다. 두 사람이 아웅다웅 하는 모습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닌지라, 단유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전 생각 없어요. 지금은 오로지 공부만 하고 싶어요. 이게 제일 재밌기도 하고요.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겠어요.”

“나 참, 누가 들으면 세상사 다 겪은 아저씬 줄 알겠네.”

매니저의 툴툴거림을 들으며 단유는 물었다.

“진짜 이거 주시려고 오신 거예요?”

“이것도 이거지만, 니가 이쪽으로 이사를 온 다니까 수련이 쟤가 꼭 가야겠다는 거야. 집들이해야 한다고.”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련을 바라봤다.

“집주인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무슨 집들이를 해요?”

“어머? 얘 좀 봐. 우리 사이에 꼭 불러야 오니? 누나가 동생들 보고 싶어서 올 수도 있는 거지. 그치? 명수야?”

명수는 또 그게 좋다고 속도 없이 헤실헤실 웃음을 지었다. 수련이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는 모습을 보며 단유는 혀를 찼다.

‘여우네, 여우.’

어쩐지 수련이 자주 여기로 찾아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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