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rise(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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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지태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칠판을 깨끗이 지우는 와중에 지태의 물음에 답했다.
“안 할 거야.”
“왜?”
“한 번 해 봤거든.”
지태는 단유의 대답을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한 번 해봐서 그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한 번 경험해본 거라서 두 번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인지.
“넌 반장 잘 할 거 같은데? 한 번 해보지 그래?”
칠판지우개까지 한 편에 가지런히 정리를 끝낸 단유가 뒤로 돌았다. 여전히 단유를 보며 싱글벙글 미소를 짓는 지태였다. 왜 자신에게 관심을 쏟는 걸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 또래에서 논어를 읽는 애가 평범하지 않다는 정도는 알거든.”
머리를 긁적이던 단유는 곧 교탁 위를 걸레로 닦은 뒤, 청소를 마무리했다. 더 이상의 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보이는 단유임에도 지태는 끝까지 단유를 응시했다. 단유가 걸레를 접어 청소도구함에 집어넣고 나올 때까지도 그 시선은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다른 청소당번이 빗자루를 집어넣고 청소를 마무리하자, 단유는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집어 들었다.
“보통 이렇게 사람을 쳐다보면 의식을 하지 않나?”
지태가 능글맞은 웃음을 머금고 입을 떼자,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함께 청소를 하던 소년을 바라보았다.
“쟤 원래 저런 성격이야?”
원래 저렇게 집요한 녀석이냐는 물음이 담긴 질문에 소년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응. 초등학교 때부터 밝은 아이였어. 그래서 좋아하는 여자아이들도 많았어.”
단유는 눈썹 끝을 슬슬 긁다가 가방을 둘러매고 교실을 나가려했다.
“야! 나도 기다려 줬는데 좀 기다려주지?”
“뭘?”
“선생님한테 이야기하고 와야 되니까, 그 때까지 기다려줘라.”
어차피 청소검사가 불량하다는 말을 들으면, 다시 해야 할 일이었다. 단유는 대답대신 주변 책상 위에 걸터앉아서 지태를 향해 턱짓을 했다.
“갔다올게.”
지태가 교실을 빠져나간 틈에 같이 있던 소년이 말을 붙였다.
“내 이름 알지?”
“김채윤.”
“여자 이름 같지?”
이름만 여자 같은 게 아니라 생긴 것도 곱상하게 생겼다. 키는 여느 아이 정도여서 자리 배치 할 때, 중간 자리에 앉았던 아이였다. 유독 콧대가 높고, 눈매가 선하다는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아이였는데, 원래 그런 입매를 가진 것 같았다. 물론―이유는 모르겠지만―계속 웃고 있는 모습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았을 지도 모르겠다.
단유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시간은 벌써 1시가 넘었다. 그런데 아무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명수가 자기보다 더 늦는 모양이었다.
“너 무슨 게임해?”
채윤은 단유가 핸드폰을 꺼내는 모습에 게임을 하려는 것이라 어림짐작을 했다. 단유는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자신은 게임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난 게임 많이 하는데. 요즘 잘나가는 ‘디저트사가’라는 게임 몰라? 나 그 게임 하느라고 새벽 3시까지 안자고 할 때도 있었어. 방학이라서 그렇게 했지만, 이제는 줄여야 겠지? 방학 때는 용돈 받아서 현질해서 다이아 사가지고 장비도 맞췄거든? 그래서 사실 내가 레벨이 좀 높아. 만약에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내가 도와줄 거니까. 대신에 친구 추천할 때 내 아이디 좀 추천해줘. 추천만 해도 너한테 다이아 10개가 무료로 지급되니까. 다이야 10개가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초반에는 도움이 많이 돼.”
채윤은 쉬지 않고 알아듣지 못할 용어들을 섞어가며 재잘거렸다. 단유는 별다른 리액션 없이 채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말하는 중간에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리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이렇게 듣고 있자니, 어쩐지 말 많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기분도 들었다. 전화나 해 볼까?
그 때 지태가 나타나서 두 사람에게 하교 허락이 떨어졌음을 알렸다.
“집 어느 쪽이야?”
단유는 쇼핑몰 있는 쪽 사거리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랑 같은 방향이네. 같이 가자. 우린 사거리 가기 전에 있는 목성아파트에 살거든.”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인데 같은 아파트라서 더 친해졌다는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갈 친구가 있는데, 연락이 없어서 데리러 가봐야 돼.”
“석고야!”
···정말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난 명수가 헤벌쭉 웃으며 등장했다.
“미안, 애들이랑 좀 뛰다가 오느라고.”
어느 반에서는 싸움이 벌어져서 냉랭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는데, 어느 반에서는 축구로 똘똘 뭉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나 보다. 낯선 아이들끼리 모였음에도 축구로 하나 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스포츠란게 대단하다는 생각을 잠시 한 단유는 뒤에 선 지태 등을 보며 말했다.
“내 친구야, 같이 갈. 우리 먼저 갈게.”
“야, 석고가 얘 별명이야?”
채윤이 명수에게 묻자, 가쁜 숨을 몰아쉬던 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신나게 설명을 했다.
“어쩐지. 처음에 교탁 앞에 섰을 때부터 좀 잘생겼다고 생각은 했는데, 어릴 때부터 그랬구나. 너 여자애들한테 인기 좀 많았겠다?”
채윤의 말에 명수가 입을 떼려는 것을 단유가 재빨리 말렸다.
“그만하고 가자.”
그러자 지태가 끼어 들어서 명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랑 같이 가. 너희 사거리 쪽이라며? 우리도 그 쪽이니까 같이 가자.”
금테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며 웃음을 짓는 지태를 보던 명수가 또 바보같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단유는 에라 모르겠다, 는 심정으로 돌아보았다. 두 사람이 단유를 향해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이밀고 있었다.
****
채윤은 생각 외로 밝았고, 지태는 생각한 만큼 넉살이 좋았다.
“할아버지한테 서예를 배울 때, 처음엔 천자문을 썼는데, 지금은 논어를 쓰거든? 할아버지가 맨날 그래. 글자만 쓰려 하지 말고 뜻을 헤아려 쓰거라.”
할아버지 성대모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변성기가 오지 않은 지태가 애써 굵은 목소리를 흉내 내자, 그게 또 재밌다고 채윤과 명수가 배를 잡고 웃었다.
“얘네 엄마가 만들어 준 떡볶이가 너무 맛있어서, 얘네 집에 일주일 내내 가서 놀았던 적도 있거든? 근데 그 때, 할아버지가 나도 지태 옆에 앉아서 해 보라는 거야. 근데 난 배운 적이 없잖아? 그래서 먹물이 막 튀고 그래서 엉망이 되니까, 할아버지가 가서 떡볶이나 먹고 가거라 그랬어.”
웃음 포인트가 어딘지 모르겠는데, 명수는 재밌다며 단유의 등을 소리 나게 두드렸다.
“언제 한 번 놀러와. 우리 엄마는 친구들 놀러오는 거 좋아하셔서 너희들 오면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줄 거야. 우리 엄마 요리 솜씨가 되게 좋거든.”
명수는 당장이라도 가고 싶다는 듯 단유의 팔을 붙잡고 흔들었지만, 단유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안 돼. 오늘은.”
“왜? 아!”
“거기까지.”
단유의 말에 명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에 젖은 강아지 얼굴을 하고 지태를 바라보며 다음을 기약했다. 채윤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을 때, 명수가 단유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단유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오늘 우리 집에 손님이 오기로 해서 안 돼.”
“친척들이야? 우리 집도 친척들 온다고 하면 일찍 집에 들어가서 기다렸다가 어른들한테 인사하고 그랬어.”
“우리 집도! 근데 우리는 그렇게 막 시간 지키고 그렇지는 않았는데.”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새는 분위기지만, 말리지 않았다. 명수도 이 때만큼은 별 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굳이 불필요한 신상명세를 이야기할 것 까지는 없다고 생각한 두 사람이었다.
“내일 보자!”
“그래. 명수 너도 자주 보자!”
“안녕!”
두 사람과 헤어진 뒤, 명수와 단유는 둘만의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집으로 향했다.
“너네 반에 싸움 났다며?”
“어떻게 알았어?”
“아까 어떤 애가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더라. 3반에 싸움 났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늦게 왔어?”
“네가 싸울 애는 아니잖아? 그리고 싸운다고 해도 맞을 애도 아니고. 게다가 그 때 꽤 중요한 순간이었거든.”
“뭐가?”
“해트트릭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순간. 첫 날 해트트릭을 딱 터뜨려줘야 애들이 인정해 줄 거 아냐.”
“그랬구나.”
지나가던 두 소년은 문득 한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정확히는 명수가 멈춰서고, 뒤따라 단유가 걸음을 멈추고 명수를 돌아보았다.
“왜?”
명수가 손가락으로 가게 안을 가리켰다. 향초를 파는 가게 안에 다양한 모양과 색을 가진 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중에 몇몇 개는 불이 붙어서 고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소원 빌자.”
“무슨 소원?”
“그냥··· 자기가 바라는 거.”
단유는 그냥 가자고 말하려다, 생각을 바꿔서 명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3월 2일,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거의 대부분 학교가 개학하는 이 날, 두 소년은 새로운 시작을 함께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부디 아무 일 없는 평안한 학교생활을 하게 해 주세요.’
‘부디 학교 최강 스트라이커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
집에 돌아온 두 사람은 어느 때와 같이, 호빵과 어울려주거나, 거실을 청소하거나 했다. 마침 선생님은 장을 보러 나가는 아주머니―인평시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집안 청소와 식사를 도맡아 해주는 아주머니를 새로 구했다―와 함께 외출을 나가셨고, 그 틈에 단유는 거실과 방 청소를 했다.
“나도 청소할까?”
“니 방 청소나 해 둬.”
“내 방 그렇게 안 더럽거든?”
사실 명수의 방은 깨끗한 편이었다. 집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파에서 지내는 명수였기에 책상 위는 매우 깔끔한 편이었고, 몇 안 되는 책들도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져 있어서 깨끗했다.
“그래, 그럼 그냥 호빵이 안고 있어.”
“응.”
TV를 보면서 호빵을 쓰다듬고 있는 명수를 뒤로 하고 단유는 청소기로 방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점점 청소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청소를 끝내고 깨끗한 방에서 책을 읽는 게 기분이 좋았기에 멈출 수가 없었던 단유였다.
그 때, 벨이 울렸다. 거실에 있던 호빵이 킁킁대며 낮은 소리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갈게.”
명수가 거실을 가로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단유는 청소를 마무리했다. 청소기를 들고 방을 나오는데, 현관에서 하이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네? 오랜만이다, 명수야.”
“안녕하세요.”
고개를 돌려 현관을 봤을 때, 눈이 마주쳤다.
“김단유! 오랜만이야?”
청소기를 끌어안고 있던 단유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이를 드러낸 미인형 얼굴의 손님은 바로 수련이었다. 무릎까지 오는 롱부츠를 벗고 현관을 빠져나온 수련은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명수에게 건넨 뒤 거실을 둘러봤다.
“우와, 너네 집 좋다. 거실도 넓고. 명수는 여기서 축구해도 되겠다?”
명수의 시선은 이미 비닐봉지 속 과자에 꽂혀 있어서 수련의 물음에 건성으로 예 예, 대답할 뿐이었다.
“선생님은?”
“이모랑 장 보러 가셨어요.”
“그래? 누나 온다고 맛있는 거 해주려고 그러나?”
“설마요.”
단유는 청소기를 제자리에 두고, 수련과 함께 소파로 갔다.
“잘 지냈어?”
“뭐, 저야 그냥 그렇죠.”
“그렇겠지. 김단유의 일상이 참 그렇게 단조롭기 그지없어요.”
놀리는 듯한 말투에도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이제 컴백한다면서요? 바쁠 때 아니에요?”
“아무리 바빠도 니들 보러 오는 시간 정도는 되지?”
“오버하지 마세요.”
수련이 입꼬리를 늘리며 단유의 머리를 양손으로 헝클어뜨렸다.
“어이구, 이 귀염성이라곤 일도 없는 녀석아.”
단유는 고개를 흔들어 두 손을 피하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이미 머리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단유는 한숨을 푹 쉰 뒤, 옅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정리했다.
“형은요?”
그 때, 다시 현관의 벨이 울렸다.
“왔나보다.”
수련의 말처럼 이번에는 매니저가 현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는 근처에 주차할 만한 곳이 없더라? 불편하게시리···.”
매니저가 옷을 탈탈 털며 거실로 들어왔다. 명수와 단유가 일어서서 인사하자, 매니저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어이, 반가워. 국가대표 유망주. 그리고···.”
단유를 향한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우리 회사의 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