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ris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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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단유와 명수가 재훈의 질문에 그렇게 응대한 것이 엉겁결에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6학년 때부터 단유와 명수는 자신들이 받는 혜택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왔었다.
당시 명수네 반의 친구가 유소년 클럽을 가입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명수에게도 클럽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었다. 이에 명수가 단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두 사람은 선생님과 함께 컴퓨터 등을 이용해 유소년 클럽에 들어가는 방법 등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때, 두 소년은 거의 처음으로 현실의 벽을 느꼈다.
“가입비가 20만원? 월회비도 있고?”
“신발도 10만원인데?”
그 전까지 재훈의 후원 덕분에 돈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기도 했고, 두 사람의 성향 상 특별히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진 않았다. 명수가 여태 필요해서 사달라고 한 것도 5학년 초에 축구공을 사달라고 했던 것이 다였다. 그 외에 옷이나 신발 같은 것은 요구하기 전에 시기 때마다 알아서 사다주니, 두 소년은 별로 의식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유소년 클럽 가입을 염두에 두고 알아보다보니 돈이 많이 드는 것이었다. 한 달 용돈을 받아도 군것질 하나 제대로 사먹어 본 적이 없던 두 소년에게 제대로 충격이 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후원을 받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되도록 손을 벌리지 말자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가 거지는 아니잖아?”
“없어도 잘 살았잖아?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지.”
두 사람은 자신들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나중에 내가 돈 벌어서 니 신발 사줄게.”
“나도 나중에 축구로 돈 벌면, 너 읽고 싶은 책 다 사줄게.”
두 소년의 결심은 지난 1년간 굳게 다져졌고, 그리하여 재훈의 후원에 대해 두 소년은 자신들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히게 된 것이었다.
“이제 저희도 되도록 형한테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요.”
“이렇게 집이랑 옷이랑 도와주시는 것만도 되게 고마워요. 그런데 계속 형한테 기대게 되면 안 좋을 것 같아요.”
어떻게 안 좋은데, 라고 묻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건 그저 심술일 뿐이니까. 다만 재훈은 두 소년이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음에 안타까울 뿐이었다. 자신의 후원에 부담을 느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알았다. 어떤 뜻인지. 명수는 작년부터 유소년 클럽에 관심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박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어서 물어봤던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그리고 당연히 실력이 안 된다면 들어갈 수 없겠지. 하지만 만약 클럽 감독이 명수 너의 실력을 보고 꼭 데리고 오고 싶다고 하면 갈 거지? 그 때는 내가 도와줄게. 그 정도는 나한테 아무런 부담이 없으니까, 너도 너무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재훈은 허리를 펴고 몸을 세웠다.
“단유 너는 좀 더 생각해봐라. 너도 부담스럽다는 이유라면, 그래 이해는 하지만, 영재 학교에 들어가는 일은 단순히 더 많이, 자세하게 배운다는 것과는 의미가 달라. 지금은 괜찮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수준에 맞지 않는 학과 수업을 억지로 듣는 일은 너한테 고문보다 더한 스트레스를 줄 거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3년을 보내는 건 힘들지 않겠니?”
단유 역시 자세를 꼿꼿이 하고 대답을 했다.
“저도 알아보긴 했어요. 담임선생님한테도 물어봤었고요. 그런데 당장 들어가지 않아도, 그러니까 2학년 때부터 들어가는 친구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결정하는 시간에 쫓기고 싶진 않아요. 사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좋을지 저로서는 아직 결정할 수 없기도 하고요. 일단 중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생각을 해 보고 싶어요. 2학기 전까지는 결정할게요.”
재훈이 주영과 눈을 마주쳤다. 넌 어때, 라는 물음이 담긴 눈빛에 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단유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은 어른들만의 판단으로 가장 좋은 길을 제시한다고 하지만, 결국 아이의 인생이다. 아이의 인생을 그저 먼저 걸어봤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제단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 주영은 최대한 단유의 의견을 지지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재훈은 주영 역시 단유의 의견에 동의했음을 읽은 뒤 답을 내렸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절대 나에게 후원을 받는 일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 사실 여기 주영이가 반대만 하지 않았다면, 난 너희들을 입양했을 거야. 말인즉슨 내가 너희들 양아버지가 될 뻔 했다는 이야기지. 부모가 자식들에게 베푸는 걸 부담스러워 하면 안 되지 않겠어? 비록 ‘후견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긴 해도, 난 니들이 날 아버지처럼 여겨줬으면 좋겠어.”
재훈이 훈훈한 미소를 띠며 말하자, 명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그건 아니죠. 형은 형이지, 무슨 아버지야.”
명수의 직설에 재훈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긍정의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왜?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이상해?”
“당연히 이상하죠. 형은 그냥 형이에요.”
재훈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실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이야기를 끝으로 재훈과 주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을 나서기 전, 창가 쪽으로 간 재훈은 밖을 바라보며 한 마디를 남겼다.
“뷰가 좋네. 주영이 집은 잘 골랐어.”
재훈은 곁에 선 명수와 단유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잘 봐. 저 넓은 도시를. 저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이 여기서는 잘 보이지? 세상을 넓게 보란 말은 다른 의미로 높이 올라가란 뜻이라고 생각해. 낮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자세히 바라다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넓게 보긴 힘들어. 그러니 높게 올라갈 수 있게 노력해라.”
“높게 올라가면 자세히 보기는 힘들어지는 거 아닌가요?”
재훈은 동그란 눈을 하고 바라보는 단유의 머리를 엉클어뜨렸다.
“10층에 사는 사람은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갈 수 있지만, 1층에 사는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도 10층에 올라오지 못해.”
단유는 재훈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빌딩과 아파트, 그 사이로 빌라와 단독주택, 거리를 질주하는 승용차와 버스들, 마른 가지의 가로수와 목도리를 한 사람들이 보였다. 그 경치를 바라보던 단유는 피식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해야겠지만, 자신은 마음만 먹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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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훈과 주영이 돌아가고, 명수가 호빵을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사이 단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자, 조금 전까지 거실에 남아있던 감정의 여운이 꼬리 잘리듯 잘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분위기에 취해 잠시 들떴던 마음도 차분해지면서, 단유는 비로소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상 앞에 앉아 오전까지 보고 있던 책을 펼쳐 들었다. 하은이 주고 간 「고전 강의 : 논어」라는 책이었다. 처음 이 책을 펼쳐 들었을 때는 형이상학적 서술과 뜻 모를 단어의 나열에 혼란스럽기만 했었다. 하지만 끝까지 읽어보자는 남모를 승부욕에 불타 읽기 시작해, 결국 작년 한 해 동안, 수번을 완독한 책이었다. 처음에는 승부욕이었지만 지금은 재미와 추억 때문에 읽게 되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근심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재미라면, 이런 것이었다. 방금 재훈의 모습은 바로 이 구절을 떠올리게 했다. 재훈은 명수가 축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명수를 도우려고 했다. 명수가 유소년 클럽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명수에게 먼저 의견을 물어 그 뜻을 따르고자 했다. 단유의 시선에서 재훈은 정말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근심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아이라 무시하지 않고, 직접 묻고, 깊이 생각하고, 작은 의견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추억이라면, 이 책 속에서 공자와 제자들이 나누는 문답이 마치 에르케넨의 지톤들을 떠올리게 했다는 점이었다. 디아트리, 안트, 신테 세 사람과 보냈던 5년의 시간이 당시에는 지루하고 이해하기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 당시 나누었던 대화들이나 가르침들이 이 책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내용이 똑같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뜬금없는 질문과 형이상학적 사유로 그려내는 이야기들이 유사했다. 때문에 읽다보면 문득 그 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도 세 사람이 가르쳐 주었던 내용들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 책은 그나마 이해하기 쉽도록 풀이라도 해놓았지, 그들과의 대화는 정말 날 것 그대로의 것들인지라 단유에게는 여전히 수수께기같은 가르침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어렴풋이 이해가 갈 듯 말 듯한 것들도 있었다. 그 때문에 더더욱 이 책을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안낙처(孔顔樂處)···.”
단유는 한 단어를 입으로 되뇌었다.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공자와 안회가 추구하는 즐거움, 인생의 의미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공자는 가난해도 그 속에 즐거움이 있다고 했으며, 정의롭지 못한 부귀를 경계했다.
“재훈 형은 즐거울까?”
재훈이 가기 전 남긴 한 마디, 높은 곳에 오르라는 그 말이 어쩐지 계속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
용모단정하게 꾸민 두 사람은 선생님과 함께 새로 진학할 중학교로 향했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학년에 접어드는 그 날을 기념해 학교에서는 입학식이라는 거창한 예식을 진행한다. 때로는 번거롭고, 학생들에게는 별다른 유흥도 되지 않는 예식이었지만, 전통적으로 이 예식은 학생들을 위한다기 보다는 학생들의 뒤에 자리한 부모님들을 위한 예식이었다.
박헌영 선생님은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억지로 참으며 앞에 도열한 학생들을 슬쩍 훑어보았다. 미리 전달한 안내문에 따라 두발을 정리하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면, 풋풋함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풋풋함이 1달을 채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오랜 교직생활을 통해 경험한 선생님은 슬쩍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겨우 10분이 지났다.
“에, 오늘 이렇게 장계중학교의 학생으로서 새 출발을 하시게 된 것에 대해 대단히 환영하는 바입니다.”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였다. 작년에 썼던 인사말을 다시 쓰는 선생님은 없겠지만, 그 형식은 늘 비슷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공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할 일도 없고, 깊이 고민할 문제도 없어―물론 학기 초에 서둘러 작성해야 할 서류들과 학생기록부 등을 생각하면 끝도 없이 나올 문제들이지만 굳이 아침부터 눈살을 찌푸리고 할 고민 정도는 아니었다―멀뚱히 서서 강당 위를 바라보는 학생들을 구경했다. 어떤 놈들이 자기 반이 될지, 어떤 놈이 문제를 일으킬 지를 추측해보는 것은 오랜 시간 학생들을 관찰하며 지낸 교사로서의 직감을 테스트해 볼 좋은 기회였으니까.
‘어이구, 저 놈은 눈에 살(煞)이 꼈네. 대충 한 달 안에 사고 칠 놈인가? 저 놈은 먹지를 못한 거야, 왜 저렇게 키가 작아? 요즘 애들은 키가 크다더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네. 저 놈은 얼굴이 너무 노란데? 속이 안 좋나?’
그러다가 한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사실 입학식이 진행될 때, 교장선생님의 말을 경청해서 듣는 모범생 중의 모범생이란 전체 학생들 중에서도 한두 명 있을까 말까였다. 대부분은 지루함을 못 견디고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기 마련이었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하지만 그런 와중에 선생님들과 눈을 마주치는 학생들이 있기 마련이고, 또 그런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먼저 시선을 돌리거나 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지금 눈이 마주친 저 학생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보통은 선생님과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요 놈 봐라?’
꽤나 당돌한 놈이라 생각하며 눈에 힘을 주었다. 이제 갓 중학교에 입학한 주제에, 초등학교 티를 채 벗지도 못한 주제에 감히 선생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녀석이라? ‘싹수 노란 놈’이란 딱지를 그 아이의 이마에 붙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