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ris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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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들어간 단유는 일단 입고 나갈 외투를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사실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정말 준비해야 할 것이라면 명수가 밥을 다 먹고 나오길 기다리는 게 준비일 것이다. 그 동안 잠시 지저분한 거실을 정리하는 것도 좋으리라.
단유가 거실로 나오자, 마침 식사를 마친 호빵이 헥헥거리며 달려들어서 단유의 청바지에 자신의 털을 잔뜩 묻히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포메라니안이라는 견종의 털은 굉장히 약하고 가벼워서 털갈이 시기에 꽤나 고생한다고 했었다. ‘고생’의 의미가 집안 대청소를 세 번을 하고도 두 번을 더한다는 의미의 고생이 아니라, 차라리 이사를 가고 싶어질 정도로 청소해야 한다는 의미의 고생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단유에겐 참으로 안타까운 점이었다.
봄이 다가오자 점점 빠지는 털이 많아지더니 이제는 하루에 몇 번씩 청소를 하는데도 성에 차지 않는 단유였다.
“선생님이 치울 테니까 단유 넌 방에 들어가서 공부해.”
라고 말씀해주시긴 해도, 간간이 물 마시러 나오다가 문 앞에 떨어진 털들을 보면 선생님이 제지를 하기 전에 청소기를 먼저 잡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작고 까만 눈동자가 반짝이며 자신을 올려다 볼 때면, 무장해제 되는 자신을 발견하는 단유였다. 이번에도 단유는 작은 혀로 헥헥거리면서 자신을 안아달라고 다리를 긁어대는 호빵을 안아들고 창가 쪽으로 갔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둔 갈색 빗을 들고 호빵의 털을 빗기 시작했다. 미리미리 털을 빗겨서 털을 빼주면 집안에 날릴 털을 줄여준다는 조언에 따른 행동이었다.
창가에 비추는 아침햇살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는 호빵과 그 호빵을 정성스레 쓰다듬는 단유를 보며 선생님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명수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다 먹었어요!”
선생님은 팔을 힘차게 뻗어 명수의 방을 가리켰다.
“준비해라!”
“옛썰!”
명수가 경례를 한 뒤,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처음에는 반쯤 장난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명수와 어울려주는 일이 즐거워지기 시작한 선생님이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어도, 환경이 바뀌어도 언제나 쾌활함을 잃지 않는 명수를 보며 그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선생님이었다.
“단유도 그만하고 나가자.”
“예.”
호빵을 바닥에 내려놓자, 주저앉은 자세로 뒷발을 들어 목 근처를 긁어댔다. 단유는 옷에 묻은 털을 찍찍이 테이프로 뜯어낸 뒤, 때맞춰 옷을 입고 나온 명수와 함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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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있을 때와 달리, 햇살이 하얀 구름 사이로 보일락 말락 하고 있었다. 오후에 눈이나 비가 내리지 않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기온이 낮아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어깨를 움츠린 사람들이 거리에 많았다.
“넌 언제 여기 와 봤니?”
선생님의 물음에 명수가 히죽 웃었다.
“그저께 오자마자요.”
“언제 나갔었어? 그 때 짐정리 하느라 바쁘지 않았었니?”
“짐 다 정리하고 나서요. 단유가 나가기에 그냥 따라 나왔다가 봤어요.”
선생님이 단유를 바라보자, 앞머리를 비틀어 길이를 가늠하고 있던 단유가 눈치를 채고 대답을 했다.
“주변에 운동할 만한 곳이 있나 살펴보려고 나왔어요. 그리고 꼭 그 이유는 아니더라도 처음 온 동네인데, 지리는 익혀놔야 길을 잃어버리지 않죠.”
다른 아이들 같으면 걱정스럽겠지만, 단유라면―지금까지 경험했던 아이들과 비교해서―여느 아이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똑똑한 아이인지라 믿을 수 있었다. 이왕 말문이 트인 김에 그간 바빠서 묻지 못했던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동안 다니던 동네에서 여기로 오면서 친구들과 헤어져야 했잖아? 힘들지 않았니?”
단유와 명수가 서로 쳐다보았다. 누가 먼저 이야기할까 눈으로 순서를 정하기라도 하는 걸까, 바라보고 있던 선생님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명수였다.
“전 애들한테 축하받았어요.”
“왜?”
“여기 학교에 축구부 있다면서요? 인평중학교에는 축구부가 없다던데요?”
말하자면 체육특기생 코스를 밟게 된 명수를 축하해주었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6년간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보기 힘든 거니까, 조금 슬프긴 했는데요. 그래도 참을 만 했어요. 단유가 있으니까.”
어쩐지 이 타이밍에 웃음이나 울음 정도는 터져줘야 감정이 폭발할 것 같다는 우스운 생각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지만, 선생님은 표정을 관리했다. 뒤를 이어 단유가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죠. 사실 저는 명수보다는 친구가 많지 않았으니깐요. 명수는 5학년 때까지는 체육부장도 하면서 같이 축구하던 아이들이 많았거든요. 그 중에는 6학년 때까지 같은 반이었던 아이도 있었다고 했나?”
“응, 영주.”
“그래, 뭐. 그런 친구랑 헤어져야 했으니까 명수가 조금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는데요. 저는 그런 친구가 별로 없어서요.”
그 때 명수가 혀를 쭉 내밀고는 놀리는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이래요. 선생님, 단유 있잖아요? 여자친구가 엄청 많았어요!”
“야, 여자친구 아니라니까?”
“아니긴, 그 때 졸업식 때 너 붙잡고 못 만난다고 울던 애는 여자 아니고 남자였어?”
“혜린이는 너도 몇 번 봤잖아? 걔가 무슨 여자라고 그래?”
“그럼 교문에서 너한테 편지 주던 애는?”
“유림이? 걔는 3학년이랑 4학년 같은 반이어서 그런 거고.”
“너네 반에서 같이 사진찍자고 붙들고 안 놔주던 애도 내가 봤는데?”
“연정이는 6학년 때 짝이라서 그랬지.”
“빨간 목도리 했던 애가 연정이야?”
“아, 걔는 미진이.”
“그럼 나랑 같이 계단 내려갈 때, 너한테 책 선물하던 애는?”
“은하?”
“매점 옆에서 만난 애는?”
“이경이?”
명수가 선생님을 보며 어떠냐는 듯 시선을 던지자, 선생님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희 둘 다 참 재미있는 학교생활을 했구나.”
그 말에 단유와 명수는 서로 상대의 학교생활이 더 재미있었을 거라며 폭로 아닌 폭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명수가 참여하고 주도했던 그 많은 축구경기들과 남자 아이들과의 우정들을 단유가 폭로하면, 수많은 여자아이들과 얽혔던 단유의 학교생활을 명수가 폭로하는 식이었다.
곧 길가에 자리한 미용실 앞에 도착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쓰잘데기 없는 폭로전(?)은 끝이 났다. 선생님은 나중에라도 계속 듣고 싶다는 감상평을 남기고 두 사람을 가게로 밀어 넣었다.
****
“오오, 단유 머리 잘랐네? 명수 넌 몰라보겠다? 너 키 얼마야?”
“163㎝요.”
재훈이 박수를 치며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었다.
“너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거의 10㎝는 더 큰 것 같다?”
“그런가요?”
뒷머리를 긁으면서 우쭐해하는 명수였다. 사실 단유와 명수가 나란히 서면 대부분 단유의 키를 언급했다. 왜냐하면 단유는 벌써 키가 168㎝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꾸준히 운동을 해서 그런지 어깨도 초등학생답지 않게 넓어서 누가 보면 중학교 운동선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명수가 불만을 가진 점은, 그 정도 몸을 가지고도 과시하지 않으려 하는 단유의 소극성이었다. 만약 자기가 단유정도였다면, 운동장에서 날고뛰는 정도가 아니라 유소년 클럽에 지원을 했을 것이다.
“일단 먹을 것부터 고르자. 뭐 먹을래?”
재훈과 주영, 선생님과 단유, 명수는 고기 집을 찾아갔다.
“옛날에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부모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집을 데려갔었대.”
재훈이 자리에 비치된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주영이 슬쩍 눈치를 줬지만 재훈은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 마디마디를 꼼꼼히 닦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난 중국집을 안 갔어. 왜? 우리 집은 돈이 많았거든. 돈이 많은 집은 중국집을 안 가냐고? 갈 때도 있겠지. 하지만 축하를 하는 날에는 중국집 대신 레스토랑을 가지. 그 때 생애 처음으로 캐비아를 먹었지.”
“무슨 맛이었어요?”
주영과 선생님이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역시 명수에게 중요했던 것은 맛이었다.
“아무 맛도 기억이 안나. 그냥 먹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야. 사실은 그 때 난 다른 친구들이랑 다 함께 모여서 중국집 가고 싶었거든? 그런데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하셔서 결국 레스토랑에 끌려가 맛도 생각나지 않는 캐비아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슬픈 이야기야. 슬프지? 눈물 나게 불쌍하지?”
“네.”
진짜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고 바라보던 명수를 보며, 재훈은 미소로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런 슬픈 기억 말고, 행복한 기억을 가지길 바랄게. 너흰 형보다는 행복할 거야. 가장 친한 친구랑 함께 하니까. 그렇지?”
“네!”
명수가 잇몸을 드러낼 정도로 크게 웃었다. 단유도 다르지 않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려보였다.
“아 혹시 중국집으로 갈걸 그랬나?”
“아니요, 괜찮아요. 저희 그저께 자장면 먹었어요.”
이삿날은 자장면이라며 노래를 부르던 명수 덕이었다.
이내 푸짐한 고기로 배를 채운 이들은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떠먹은 뒤, 아이들이 머물 집으로 이동했다.
“이야, 집 좋네?”
재훈이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주영이 재훈의 등을 세게 내리쳤지만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윽고 거실에 둘러앉은 뒤 주영이 본론을 꺼냈다.
“사실 오늘은 중요한 이야기도 하고, 너희들 의견도 들을 겸 해서 온 거야.”
단유와 명수가 주영을 빤히 바라보자, 재훈이 키득대며 손을 내저었다.
“너무 그렇게 분위기 잡지 마라. 애들 긴장하잖아.”
주영은 샐쭉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너희도 중학생이 되었잖아. 그럼 슬슬 너희의 장래와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너희들이 원하는 진로에 맞춰 이 분이 후원을 결정하실 거야. 예를 들어서, 명수가 만약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면···.”
“예, 축구선수가 될 거에요.”
주영의 말을 자르고 명수가 흥분한 얼굴을 하고 소리쳤다. 단유가 진정하라며 명수의 어깨를 토닥이자, 주영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면 이 분이 최대한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후원해주실 거란 거지. 어쩌면 유명한 유소년 클럽 쪽에서 활동할 수 있게 봐주실 지도 모르고.”
아무리 명수라도 이 제안이 엄청난 특혜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간 TV에도 빠져보고, 핸드폰 게임에도 빠져보았지만 역시 자신의 길은 축구 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명수였다. 때문에 그 쪽과 관련된 길을 줄곧 고민해왔다. 단유나 선생님의 도움으로 향후 진로를 알아보기도 했었기에 6학년 때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클럽에 들어가려면 테스트 봐야 하죠?”
“그럴걸?”
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일단 테스트는 받아보고 싶어요. 그런데 테스트 떨어지면 안 갈 거예요.”
“왜?”
“제 실력이 안 되는데 억지로 들어가게 되면, 불공평하잖아요.”
재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때, 주영은 속으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사실 주영은 명수가 저렇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동안 워낙 명수가 어리광을 피우거나 단순해 보이는 언행을 자주 보였기에 꼭 가고 싶다고 이야기 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명수가 꼭 가고 싶다고 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클럽에서 뛸 수 있게 해 줄 능력이 되는 재훈이다 보니, 주영은 몰래 적당한 유소년 클럽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그러나 재훈은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명수네. 난 그럴 줄 알았어.”
재훈의 칭찬에 명수가 히죽 웃었다. 단유 역시 연한 미소로 친구의 결심을 응원했다. 지금까지 명수가 축구 경기를 하면서 숱하게 승부욕과 골 욕심을 내보였지만, 단 한 번도 명수는 부정한 방법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반칙을 해도 자신이 먼저 손을 들어 반칙했음을 알릴 정도로 뻔뻔한(?) 친구였으니까.
“단유 넌?”
단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에 형이 그랬잖아요? 중학교 가면 영재학교로 가서 공부하자고요.”
“그래.”
“저도 작년에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어요.”
“왜? 솔직히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이나 과학은 니 수준에 안 맞잖아? 더 많이 배우고 싶지 않아?”
“더 배우고 싶은 건 맞아요.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실험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그런데 지금은 굳이 한쪽으로만 집중하고 싶지 않아요.”
재훈은 단유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혹시 요즘 다른 거 공부하는 거 있니?”
“없지는 않죠. 저야 여러 가지에 대해 호기심을 많이 느끼니까요.”
“어떤 거?”
“지금은, 동양 철학이 재밌더라고요.”
주영이 쿨럭, 하더니 사래가 걸린 듯 헛기침을 했다. 재훈이 슬쩍 시선을 주었다가 단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히 영재학교에 가게 된다면, 특정 과목에 대한 집중도 때문에 다른 관심분야에 시간 분배를 못하게 될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가 지금까지 보여 왔던 재능을 고려한다면, 영재학교에 가서 시간을 투자하는 게 너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도 없진 않죠. 저 역시도 더 배우고 싶긴 하니까요.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재훈은 턱을 괴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문득 어렸을 적의 단유와 지금의 단유는 단순히 키만 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야 후견인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구만.’
재훈은 턱을 괴던 손으로 귀밑을 긁었다. 깊은 고민에 빠질 때 나오는 재훈의 습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