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ris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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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일기예보 상 온도는 영하 4도라고 하지만,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정도라고 합니다. 때문에 다들 아침에 출근하시는 길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저도 방송국에 들어설 때, 갑자기 불어온 돌개바람에 새벽부터 준비했던 메이크업이 엉망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희 작가분이 절 보더니 주말에 마신 술이 덜 깼냐고 농담을 하더군요.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월요일, 게다가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으니 더더욱 출근을 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는 당신. 바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첫 곡은 만화영화 Snowman 중에서 Walking In The Air, 엘레인 페이지 입니다.”
라디오에서 청아한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작은 우울하게, 그러나 스트링 세션이 가미되면서 몽환적인 느낌과 판타스틱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음악으로 변하면서 가슴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만들었다.
“노래가 너무 음울한 거 아냐? 이런 음악 들으면서 출근하라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야?”
재훈이 투덜대며 말하자, 옆에서 태블릿을 보고 있던 주영이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취향 차이겠죠. 전 좋기만 하네요.”
“변태야? 아침부터 이런 음악 들으면 좋아?”
그 말에 주영의 시선이 재훈을 송곳 찌르듯 찔러댔다. 움찔한 재훈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자 주영은 다시 태블릿으로 눈을 돌렸다.
“도대체 내가 왜 널 따라 가는지 모르겠네. 난 학생이라고. 바쁘디 바쁜 본과 2학년이라고.”
“내일 개강 아닌가요?”
“야, 본과에 개강이 어디 있어? 일 년 내내 붙어 있어야 할 판국에···.”
재훈은 말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왜 이렇게 뾰족하실까? 오늘 혹시 그 날인가요?”
그 말에 재훈이 꼬리 잘린 개구리처럼 발끈하며 소리쳤다.
“야! 무슨 기집애가 할 말 못할 말 못 가리고 그래!”
“조용히 해요. 여기 선배만 있는 거 아니죠?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아요.”
주영의 사과에 운전을 하던 기사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니가 왜 사과를 해? 하려면 내가 해야지. 그리고 왜 말 돌려?”
“그만하세요. 계속 떽떽거리면 오늘 하루 꽤 피곤할 거예요.”
“그럼 데리고 가는 이유라도 알려줘야지, 말도 안하고 아침부터 끌고 다니는데 열이 안 받아?”
주영은 태블릿을 건네주었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의 재훈에게 주영이 알려주었다.
“애들 새 집이에요.”
“애들?”
“이것 봐. 이래놓고 무슨 후견인이야? 돈만 내면 다야? 그러면서 무슨 입양이야?”
그제야 재훈의 얼굴이 핼쑥해 보일 정도로 하얗게 변했다.
“아.”
“아, 는 무슨 아예요? 오늘부터 그 집에서 살게 될 거고, 학교는 일주일 뒤 월요일부터. 그 전에 가서 애들 얼굴보고 이야기는 해야 후견인 노릇 좀 한다는 소리 듣지. 솔직히 선배, 그 동안 학업 핑계로 너무 소홀했던 거 알아요?”
“니가 잘 챙겨줄 거란 걸 아니까 그랬지.”
“내가 후견인이야?”
“내가, 는 반말이고.”
“그럼 잘하시든가.”
재훈은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역시 지은 죄가 많다보니 주영에게 이기기가 힘들었다. 슬쩍 앞을 바라보니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는 개인기사 아저씨의 얼굴이 룸미러에 비쳐 보였다.
‘쪽팔리게.’
재훈은 헛기침을 한 후,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애들은 이사했고?”
“집은 일주일전에 준비가 끝났고, 애들은 그저께 와서 적응 중이라고 하네요.”
“역시 우리 주영이가 참 일처리가 빠르고 좋아. 그렇죠, 아저씨?”
“그럼요. 이 실장님이 일은 똑소리 나게 잘 하시는 분이시니까요.”
“두 분 다 아부는 그만 하시고요. 상황파악 되셨으면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뭘?”
주영은 재훈의 손에 들린 태블릿을 뺏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재훈을 똑바로 바로 보며 물었다.
“두 아이, 계속 이대로 챙기실 거죠?”
“그럼. 그러려고 후원하는 거 아냐?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주영은 머리도 정리되지 않은 재훈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억지로 끌고 나오긴 했지만, 셔츠에 묻은 치킨소스 자국과 맥주인지 뭐인지 모를 액체에 젖은 소매를 보면 누구도 재벌 3세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할 모습이었다. 굳이 드라마 속의 재벌 이미지를 따라할 필요는 없다 해도, 사람이 좀 점잖게 생활하면 안 될까,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상대는 재훈이니까.
“왜?”
“한심해서.”
“야!”
주영이 고개를 털고, 본론을 이야기했다.
“한심한 후견인이라도 후견인이니까, 아이들의 자립을 도울 방법을 생각해야 할 때 아닌가요? 그런 점에서 아이들과 한 번쯤은 면담을 하고 그 아이들이 어떤 방향으로 자라길 바라는지 알아야 제대로 후원을 할 수 있는 거죠. 지금까지야 초등학생이니까, 라는 이유로 그냥 두고 봤다지만, 이제는 다르지 않겠어요? 특히 명수 같은 경우는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경우는 없잖아요.”
“왜 없어? 같이 만나서 밥 먹고 이야기 할 거 다했는데.”
“그런 거 말고 진지하게요.”
“걔 보니까, 딱 내 과던데? 진지한 거 안 좋아할걸?”
주영이 다시 도끼눈을 치켜뜨고 날카롭게 벼려진 도끼날을 재훈의 목 밑에 들이밀었다.
“지금은 좀 진지해져 보는 게 어때요? 본과 2학년이 초등학교 2학년이란 소리는 아니잖아요?”
재훈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영이 날을 거두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특히 지금껏 아이들이 살아오던 환경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데, 이 때 제대로 잡아주지 않으면 오래 방황할 수 있다고요. 이럴 때 부모의 역할이라는 게 중요해요. 그런데 그 아이들한테 부모라면 결국 선배잖아요? 비록 입양은 안했어도, 그 역할을 충실히 해주셔야 앞으로도 그 아이들이 선배를 후견인으로서 존경하고 따르지 않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재훈은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굳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그 아이들은 상담 같은 거 없이도 잘 자랄 아이들이라는 생각이었다.
“자기결정권을 가진 아이들이라는 전제하에 그들의 의견을 소중히 생각하고 존중해줄 준비가 된 후견인으로서 한 마디 하자면, 후견인이 너무 참견하는 것도 심리적 거리감을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고 그들의 결정권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요건들은 배제시키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봐.”
재훈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야기에 주영이 피식 웃었다.
“왜 웃어?”
“후견인이 너무 참견한다면 문제겠지만, 일단 그 후견인이란 사람이 별 핑계를 다 대가면서 참견을 한 적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 아이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왜 자기결정권이란 걸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지 이유를 몰라서 웃은 게 두 번째 이유예요. 마지막으로 이런 소리 할 시간에 진지하게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게 더 효율적일 텐데도 헛소리나 하고 있는 모습이 웃겨서 웃었어요.”
말이나 못하면. 재훈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주영도 더 이상 재훈을 자극할 생각은 하지 않고, 대신 다른 서류를 꺼내서 검토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멈추자 잠시 줄였던 라디오의 볼륨이 커지며 라디오DJ의 멘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다음은 길을 잃은 두 사람이 함께 음악을 만들면서 조화로움을 발견하고 삶의 길을 찾는 모습을 그린 영화 <비긴 어게인>의 OST 중 하나입니다. 애덤 리바인이 부르는 Lost Stars. 들어보실까요?”
어쿠스틱 기타와 가수의 허밍 음이 나오면서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겨울의 끝 무렵, 여전히 바람은 차갑고 마른 가지에는 싹이 틔기 전이지만 곧 깨어날 봄의 제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바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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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야! 밥 먹어야지!”
검은색 니트 위에 만화캐릭터가 그려진 앞치마를 걸친 푸근한 인상의 중년여성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검은 그늘을 눈 밑에 드리운 명수가 발을 질질 끌며 주방에 나타났다.
“너 어제 밤 샜니?”
“···네.”
“한 번쯤은 거짓말이라도 해 보는 게 어떠니? 그럼 내가 한 번 속아 넘어가줄게.”
“속지도 않으시잖아요.”
명수가 졸음을 미처 쫓아내지 못한 눈을 억지로 뜨고 자리를 찾아갔다.
“그걸 아는 애가 밤을 새서 게임을 하니? 선생님이 몇 번을 말해? 내가 그랬지? 또 밤새면 압수라고.”
“네.”
명수는 선생님이 뭐라고 말하는지 내용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듯 순순히 대답을 했다. 선생님이 손을 척 내밀었다.
“내놔.”
“예?”
“핸드폰 압수야.”
“어? 안 되는데?”
“내놔.”
명수는 울상이 되어 선생님을 바라보다가 앙 다문 선생님의 입술에서 의지를 읽어내곤, 뒷주머니에 꽂아두었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일주일간 압수야.”
명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인지 눈을 번쩍 뜨더니 맞은편에 앉은 단유를 바라보았다.
“그만.”
줄곧 명수를 지켜보고 있었음인지, 명수가 입을 떼기도 전에 선생님이 명수를 제지했다.
“단유 꺼 뺏어서 쓰는 게 들키면, 그 땐 단유 것도 압수야.”
명수가 고개를 푹 숙이고 시금치나물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인생의 쓴맛을 알게 해주는데 좋은 나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페이스대로 식사를 하던 단유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얼굴을 하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오늘 재훈이 형 온다고 안했나요?”
“응. 아마 점심 전에 올 걸?”
명수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단유가 명수를 힐끔 보더니 입 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럼 오늘 점심은 밖에서 먹겠네요?”
“아마도? 참고로 선생님도 따라 갈 거야. 그러니까 괜히 엉뚱한 소리로 재훈이 당황시키지 말고, 버릇없이 구는 모습 보면 바로 혼낼 거야.”
정확히 명수를 바라보며 경고를 하는 선생님의 서슬에 명수는 더욱 어깨를 움츠리고 시금치나물을 입에 집어넣었다. 곱씹으면 고소한 맛도 나는 반찬이었다.
“단유야, 이제 여기 주변 지리는 대충 익혔지?”
“네.”
매일 새벽마다 운동을 하는 습관은 여기로 이사 오고서도 변하지 않았다.
“혹시 주변에 미용실 같은 곳 있니?”
“아, 저기 길가 쪽에 있는 거 봤어요.”
명수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선생님이 의심스럽다는 눈치로 단유에게 확인을 구하자, 단유도 그렇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명수가 ‘불신지옥’을 중얼거렸지만 선생님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너희들 머리부터 좀 정리해야겠다. 이제 중학생도 되었으니 머리 깎아야지. 그래도 너희들은 좋을 때야. 예전에는 중학생들은 대부분 까까머리였거든.”
“까까머리요?”
명수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익살맞은 표정을 짓던 선생님이 대답을 해주었다.
“머리를 빡빡 깎았다는 이야기야. 왜? 관심 있어? 그렇게 자를래?”
“네! 나 그렇게 자를래요.”
의외의 반응에 선생님이 당황하며 물었다.
“어떤 머린지 알고 그러니?”
“차두리요.”
단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명수의 축구 스타일이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차고 달리는 스타일이라고 하던가?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왜요?”
명수의 칭얼거림에 선생님은 거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서류 하나를 들고 왔다.
“보자··· 앞머리는 눈썹을 넘기지 않도록 하고, 구레나룻은 귀 중간부분까지, 옆머리는 귀를 덮지 않도록 하고··· 아, 두발형태는 학생답게 단정하게 하여야 한다. 이거네.”
“머리 빡빡 깎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는 없잖아요?”
“학생답게 단정하라는 말은 빡빡 깎지 말라는 말이야.”
“왜요?”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명수 니가 머리를 빡빡 깎으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무서울 거야. 그럼 단정한 것과 거리가 멀잖아?”
“에이, 그게 뭐예요?”
선생님은 웃음을 터뜨리며, 펼쳤던 종이를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아무튼 나중에 미용실가서 머리 좀 깎자. 너희도 재훈이 오랜만에 보는 거라며? 이왕이면 단정한 모습으로 보여야 기분 좋지 않겠니?”
단유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먼저 준비하고 있을게요.”
“그래.”
단유는 명수의 어깨를 톡톡 두들겨 주었다. 명수가 뭔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단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긴 머리가 어울려.”
명수가 히죽 웃었다. 입술에 붙은 밥풀이 떨어질 듯 말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