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86화 (186/956)

My Wa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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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고야, 나 배고파.”

그러고 보니 이 곳에 오자마자 눈에 젖은 몸을 씻느라 욕실로 바로 직행했었다. 그리고 지금 소파 위에서 반쯤 눈을 감고 눈꺼풀을 바르르 떨고 있는 선생님은 젖은 머리를 말리지도 않고,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선생님, 배 안고프세요?”

손에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들어 올리며 히죽 웃는 하은이었다.

“난 이거면 충분해.”

역시 위험한 상태인 것이다. 단유는 명수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눈짓을 한 후, 하은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저희끼리 밥 먹고 와도 돼요?”

“너희끼리? 안 돼, 위험해.”

“아까 올라올 때 보니까 여기 안에 식당 있던데요? 거기서 먹고 올게요.”

“오~ 역시!”

하은이 까닭 모를 감탄사를 내뱉으며 발그란 볼을 감쌌다. 단유가 하은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를 궁금해 할 때, 하은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금색 악어가죽 무늬의 케이스를 쓴 핸드폰의 안쪽에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자.”

단유는 아무 말 없이 카드를 집어 들었다.

“꼭 밥만 먹고 와야 돼. 나 빼고 놀면 안 돼. 알았지?”

“불, 꺼드릴까요?”

하은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여보이고는 명수와 방을 빠져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후.”

하은이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푹신한 쿠션이 머리를 기댄 채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 전체에 은은한 LED 조명 불빛이 내려와 하은을 감쌌다. 열기도 없는 빛이지만, 그래도 어둠보다는 낫다. 어두웠다면 지금의 우울함이 더욱 커졌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렵구나.”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은 하은은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맥주 캔마저 텅비어버리자, 공허함이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기분만은 아닐 것이다. 이 넓은 객실 안에 오로지 혼자니까.

****

“선생님은 밥 안 먹어도 되나?”

명수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단유가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대답을 했다.

“먹을 것 좀 싸 갈까?”

명수가 손뼉을 치며 그러자, 했다. 그리고는 신이 난 얼굴로 복도를 뛰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명수는 복도가 조용하다느니, 방이 좋다느니 하면서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단유는 적당히 장단을 맞추면서도 머릿속으로 조금 전의 대화를 복기했다.

가치관이 걸린 문제는 정답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관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많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 날이었다. 속으로 잊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식당이 어디야?”

“아까 올 때 보니까, 1층에 있다고 했어.”

“뭐 먹지? 여기는 비싼 데니까, 음식도 좋은 거 나오겠지?”

단유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급하게 나오느라 흐트러진 명수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얌전히 단유의 손길을 받으면서도 명수의 입은 쉬지 않고, 객실에서 느꼈던 감동들을 나열했다.

“아까 방에 들어가 봤어? 침대가 엄청 크고 푹신해! 이불도 완전 부드러워서 눕자마자 잠들 뻔 했어. 배가 고파서 억지로 일어났다니까. 그리고 거실에 TV도 우리 집 것보다 훨씬 크지? 나중에 밥 먹고 가서 봐야지. 그럼 영화 보는 기분일거야. 근데 우리 밥 먹고 밖에 나가서 못 놀아? 나가면 안 될까?”

그 때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알림 음을 울린 후, 문이 열렸다.

“일단 상황을 봐야겠지만, 우리끼리는 나가면 안 될 거야. 위험할 수 있으니까.”

“우리끼리 밥도 먹는데 안 될까?”

“식당은 건물 안에 있으니까 괜찮지만, 바깥에는 눈도 많이 와서 우리끼리 나가면 선생님이 걱정 많이 하실 거야.”

명수는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래. 선생님 걱정시키면 안 되지.”

로비 한 편으로 식당 입구가 보였다. 그리로 가는데, 로비에 사람이 가득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살펴보니―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난장판이나 다름없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돈 더 줄 테니까 방 좀 달라니까?”

“죄송합니다만, 지금 예약이 다 차서요.”

한 아주머니가 데스크를 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예약한 사람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온다고 그래요?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예약한 사람도 못 온다니깐?”

“그래도 손님. 원칙대로 처리해야 하는 저희 입장도 이해해···.”

데스크 안쪽에서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양해를 부탁하는 직원을 상대로 여러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아니,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그럼 지금 여기 이 사람들이 눈 바닥에서 얼어 죽으란 말이야? 어차피 빈방으로 남을 건데, 그거 좀 이쪽으로 돌리라는 게 뭐 그리 문제라고 그래요?”

“이봐요. 지금 밖을 봐봐요. 저기 눈 내리는 거 보여요? 저거 때문에 우리도 지금 발이 묶인 거잖아? 예약한 사람들도 못 온다니까?”

“그래도 원칙인지라. 대신 지금 예약 취소가 되는 방도 있으니까요, 방이 나오는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말이 안 통하는 직원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가슴을 퉁퉁 치는 아저씨도 있었다.

“나 참, 그게 언제 나올 줄 알고 여기서 덜덜 떨고 있으란 말이야!”

데스크 앞에만 그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로비 전체에 화려한 패딩과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서 작금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숙고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다.

명수가 단유에게 몸을 기울이고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지 않아도 워낙 로비가 시끄러워서 그냥 말해도 될 것 같은데.

“저 사람들 화 많이 난 거 같다, 그치?”

“응.”

단유는 명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커다란 창으로 둘러싸여 바깥이 훤히 보이는 구조였는데, 창마다 하얀 커튼이 달려 고급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만약 날씨가 좋았다면 정말 분위기가 좋았을지도 모를, 그런 곳이었다. 다만 오늘은 날이 아니었는지 로비처럼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엄마 찾으러 왔어?”

식당 입구에 서 있던 직원 한 명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아니요, 밥 먹으러 왔어요.”

명수가 야무지게 대답하자,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아이들끼리 객실에서 내려와 밥을 챙겨먹는 경우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식당에 사람이 많아서 밥 먹을 데가 없을 것 같은데. 나중에 올래?”

사실 나중에 와도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 애들 둘만 저 시장통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은 말리고 싶었던 직원이었다.

“혹시 포장되나요?”

직원이 씩 웃으면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포장 대신 룸서비스라는 게 있어. 메뉴만 고르면 방으로 가져다 줄 테니까 그렇게 할래?”

단유는 잘 됐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메뉴판을 받아 음식을 시켰다. 명수가 고르는데 고민을 했지만, 간단하게 돈가스로 메뉴를 통일했다. 객실 호수를 불러주고 두 사람은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두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어이, 얘들아?”

명수가 뒤돌아보고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단유도 뒤따라 돌아보니 아까 그 매니저였다.

“안녕하세요.”

“거참, 여기서도 너희를 보니까 우리가 인연이 있나보다. 그치?”

매니저의 넉살에 명수가 헤벌쭉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으러 왔어요?”

“그래. 밥 먹고 가려고 했는데···. 너희들도 밥 먹으러 왔어?”

명수가 ‘저희는 룸서비스요’라고 자랑하듯이 외치자, 매니저가 눈이 동그래졌다.

“여기서 묵는 거구나?”

“네.”

매니저는 단유의 대답에 머리를 굴렸다. 사실 갤럭시즈도 행사가 끝난 후 바로 이동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폭설에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뉴스에 따르면 현재 이 지역에 대략 10㎝정도의 적설량이 예상된다고 하는데, 그것도 내일 아침까지 계속 될 거라고 하니 당장 소속 가수들이 쉴 장소를 구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 눈을 맞으면서 공연을 치러야 했던 아이들이다.

“저기, 아까 함께 계시던 선생님은?”

“방에서 주무세요.”

아무래도 긴 시간을 운전하고 오느라 피곤했을 것이다. 남자라도 정체된 구간을 운전하다보면 피로가 쌓이니까. 그래도 매니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아저씨가 선생님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같이 만날 수 있을까?”

단유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답을 했다.

“저희가 먼저 여쭤보고 이야기 드릴게요. 아무래도 선생님께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야무지고 딱 부러지는 성격, 이라고 매니저가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방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같이 올라가자.”

적어도 정체(?)는 확실한 사람이니까 별 문제 없겠지, 라는 판단을 내리며 단유는 명수와 매니저와 함께 객실로 돌아왔다.

****

“좁아서 불편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하은이 붉어진 볼을 가리며 얌전을 떨었다.

“아뇨, 이 정도면··· 괜찮죠. 네.”

‘자금성’이라는 드립을 치려다가 초면에 너무 과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말을 줄인 매니저가 헛기침을 하면서 거실을 둘러보았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 리조트에서 가장 넓은 객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었다. 넓은 거실을 보고, 아이들을 잠시 맡겨둬도 부담은 덜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잠시 들 정도였다.

“너희도 괜찮지?”

“저희야 뭐 가릴 처진가요? 이렇게 함께 있게 해 주신건만 해도 감사한데요.”

갤럭시즈의 리더이자 맏인 수영이 맑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금발의 수영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아니지만, 눈웃음이 매력적인 멤버였다.

“저희가 계속 방을 구하고 있으니까, 그 때까지만 애들이 쉴 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세요. 어차피 넓은 거실이고 애들도 심하게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니니까 부담 안가지셔도 돼요.”

“그래도 미안하니깐요. 오늘 하루 종일 부탁만 드리는 것 같아서 말이죠. 나중에 어떻게든 보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답’이란 말에 하은이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두 사람이 서로 미안하네, 괜찮네 하며 예의를 갖추는 동안 멤버들은 객실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야, 일단 너희들 우선 씻어. 옷은 저기 뒀으니까 저걸로 갈아입고.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에게 실례하지 않도록 조심해. 알았지?”

마지막 당부는 차치하고, 아직까지 행사복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있었던 멤버들은 반색을 하며 욕실을 쓸 순서를 정하기 시작했다. 멤버들이 벗은 패딩들을 한데 모아 차곡이 정리한 매니저는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객실을 떠났다.

“선생님, 저희 밖에 놀다 오면 안 돼요?”

“명수야, 저길 봐. 저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어떻게 놀겠니? 오늘은 참고, 내일 날씨가 좋으면 그 때 나가서 놀자. 그 때까지는 TV나 봐. 너 TV보고 싶어 했잖아?”

“······.”

명수의 입술이 삐죽 나오는 걸 보며 하은이 피식 웃었다.

“오늘은 늦게까지 TV봐도 안 말릴 테니까 실컷 봐.”

“네.”

단유는 걸치고 있던 웃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을 때, 수련이 단유에게 다가왔다.

“어이, 너.”

단 한 번도 ‘어이’라고 불린 적이 없었던 단유는 그 참신함에 놀라면서 고개를 돌렸다. 수련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이야기 할 거 좀 있지 않았니?”

“무슨 이야기요?”

“아까 하던 이야기마저 해야 하지 않겠니?”

목소리 톤이 낮아지니까 괜히 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수련아, 너 왜 그래?”

평소에도 수련은 종종 폭주할 때가 있었다. 회사 식구들에게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친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는 수련 때문에 멤버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살짝 눈초리에 힘이 실린 수련을 경계하던 멤버 한 명이 수련의 팔을 붙잡았다.

“별 거 아냐. 아까 이 아이랑 하던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무슨 이야기?”

꼬마 애랑 무슨 할 이야기가 있길래, 바깥 날씨보다 더한 싸늘함을 혀에 두르고 있다는 건가? 그러나 수련의 시선은 단유를 떠나지 않았다. 단유도 수련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해요, 이야기.”

수련이 한 걸음 다가서며 입을 열려는 데, 단유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요.”

단유가 수련의 위아래를 훑다가 한 마디 했다.

“먼저 씻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한 발 물러섰다. 단유를 바라보던 수련의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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