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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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가만히 단유의 이야기를 듣던 수련이 입을 열었다.
“사람을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 좋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다른 법이야.”
“상황이요?”
수련은 팔짱을 꼈다. 앞을 바라보니 여전히 빨간 리어램프가 줄을 서서 있지만,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는 차들을 보니 제 시간에 도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서 처음 사고가 나서 차 세 대가 얽혀 있을 때,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너희 선생님이 차 밖으로 나갔다고 생각해봐. 그런데 그 때 또 차 한 대가 미끄러졌었지? 그럼 그 뒤에 어떤 결과가 그려지는지는 말 하지 않아도 알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래, 지금은 아니지. 하지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확률로 사고를 인지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야. 아까 사고 난 차들도 사고가 날 확률이 많다고 생각했을까? 희생이니 뭐니, 이런 걸 떠나서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어.”
“수련아.”
매니저가 서둘러 수련의 말을 막으려 했지만, 수련은 이제 막 입이 트였다.
“때로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앞 뒤 안 가리고 불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지.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뭐라고 부르는지 아니? 영웅이라고 그래.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불러. 그런 사람들은 그런 찬양을 들을 만 하지.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당장 너도 말만 그렇게 하지, 나가진 않았잖아? 왜 그랬어? 너희 선생님이 나가지 말라고 해서? 아니면 니가 너무 어려서? 똑같은 거야. 니가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가 있어. 괜히 나섰다가 일만 더 커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희 선생님도 의사나 소방관이나 뭐 그런 직업은 아니지?”
단유는 수련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련은 그 모습을 보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하은이 룸미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매니저 역시 어쩔 줄 몰라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뭐, 라는 입모양을 만들어 보인 수련은 고개를 돌려 반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 누나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은데, 사실 어려운 처지에 돕는 사람을 구하는 게 맞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 건, 부끄러운 행동이지. 그래서 우린 같이 일하는 동료를 남겨두고 온 거야. 그 사람들을 도우라고. 반대로 우린 일 때문이라는 핑계로 그 현장을 떠난 거고. 그러니까, 단유라고 했나? 사람을 구하는 게 맞는 거야. 앞으로 니가 살면서 얼마나 이런 일을 많이 겪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어려운 처지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우선 구하려고 하는 게 옳은 일인거야. 어떤 핑계를 대든지 말이야.”
매니저가 아이들의 동심과 도덕성을 조금이나마 지켜주려는 의도로 반론을 펼쳤다. 하지만 단유는 표정 없이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두 사람의 말이 모두 맞는 부분도 있고,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단유에게 가장 의미심장하게 들렸던 부분은 ‘니가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라는 부분이었다.
‘어려서’라는 말은 ‘힘이 없어서’라는 말로 들렸다. 바꿔 말하면 힘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이리라.
‘어떤 상황에서 능히 극복할 수 있는 힘.’
적어도 단유에게 그런 힘은 ‘마법’이었다. 비단 이런 상황뿐만 아니라, 살면서 겪을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지겹도록 겪었으니까.’
어른이 되더라도, 힘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마치 이 차에 탄 사람들처럼.
정체된 차량의 속도가 점점 붙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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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아뇨, 별 말씀을요. 저희야말로 연예인도 보고 좋았어요. 그치?”
“네! 좋았어요.”
명수가 해맑게 웃었다. 매니저의 시선이 단유에게로 옮겨가니, 단유는 가볍게 목례로 화답했다.
“조금 있다가, 저기서 공연할 텐데 보러 오실래요? 이렇게 차를 태워주신 것도 인연인데, 저희가 가까이서 보실 수 있게 이야기 해볼게요.”
하은이 답하기도 전에 명수가 두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불렀다. 하은이 고개를 절레 흔들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서둘러요.”
수련이 예의 그 시니컬한 목소리로 매니저를 재촉하자, 매니저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애들이라고 해도, 인터넷 정도는 할 나이의 아이들이었다. 행동 하나, 말 하나도 조심해야 할 판국에 이런 모습이라니.
“저희 먼저 갈 테니까, 따라오시고요. 스태프들한테 이야기 해둘게요.”
매니저는 수련의 팔을 이끌고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갈까?”
하은이 돌아보며 묻자, 명수는 히죽 웃으면서 단유의 팔을 잡았다.
“가자.”
“그래.”
세 사람은 천천히 공연장으로 다가갔다. 이미 공연이 시작된 그 곳에서는 현란한 조명과 노래소리, 그리고 팬들의 함성소리로 가득했다.
함박눈은 아니지만 그래도 천천히 내리는 눈이 적지 않았는데, 피디는 그림이 좋다는 이유로 쇼를 강행하고 있었다.
“다음은 누구야?”
“인페르노 두 곡 부르고, 그 다음은 갤럭시즈입니다.”
조연출의 알림에 피디가 눈살을 찌푸렸다. 갤럭시즈는 멤버 한 명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며 순서를 뒤로 미룬 그룹이었다.
“그 멤버는 왔대?”
“지금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더 이상은 못 미룬다고 이야기해.”
비니를 눌러쓴 조연출이 황급히 큐시트를 오른손에 쥔 채로 뒤돌아 달렸다. 무대 뒤, 출연자 대기석을 겸비한 천막으로 달려간 조연출이 전기난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은 여자 그룹을 찾았다.
“다 오셨어요?”
“도착했대요.”
동행했던 매니저 한 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천막을 젖히고 나타난 수련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갤럭시즈 멤버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더니 수련에게 달려갔다.
“언니, 괜찮아요?”
“수련아, 다친 데 없어?”
수련은 싱긋 웃으면서 멤버들의 엉덩이를 두들겨 주었다.
“그렇게들 걱정이 되셨어요?”
수련의 장난에 멤버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수련을 안아주었다. 조연출은 무전기로 상황을 알린 뒤, 다가가 말했다.
“인페르노 다음이니까 준비하세요.”
“네!”
매니저가 뒤따라 들어와 조연출에게 죄송하다고 인사를 했다. 조연출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짧게 혀를 찬 뒤 몸을 돌렸다. 사고를 당했다는데 뭐라고 말하겠는가. 덕분에 30분 동안 선배에게 잔소리를 들었지만, 그걸 사고당한 사람에게 풀기도 뭣해서 그냥 등을 돌려 대기 중인 인페르노에게 다가갔다.
“진짜 안 다쳤어?”
“응. 허리가 조금 쑤시는 느낌인데, 크게 다치진 않았어.”
“너 그거 지금은 모르는 거야. 나중에 더 심해질 수도 있어.”
가장 맏인 멤버가 수련을 걱정하며 말하자, 매니저가 그렇지 않아도 공연 끝나고 병원에 데려갈 참이라고 이야기했다.
“오빠, 아까 애들 건 이야기했어요?”
아까는 그렇게 심통 맞게 대하더니, 또 저리 챙기는 모습이라니. 매니저는 챙겼노라 대답하고는 미리 와 있던 후배 매니저를 만나 스케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슨 애들?”
수련은 오면서 만나 하은과 단유네에 대해 짧게 소개했다.
“12살인데 완전 애어른 같더라니까.”
그 때, 갤럭시즈를 부르는 조연출이었다. 갤럭시즈는 힘차게 대답을 하고 무대에 오를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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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지금까지 갤럭시즈였습니다.”
5명의 멤버들은 하나의 동작처럼 꾸벅 허리를 숙여 팬들에게 인사한 후, 함성소리를 들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수고했다. 얼른 들어가서 몸 좀 녹이고, 옷 갈아입어.”
그 사이에 거세진 눈발 때문에 머리와 옷이 엉망이었다.
“이거 카메라에 영 이상하게 나오는 거 아니에요?”
“잠깐 모니터 했는데, 비 맞는 것보다는 낫더라.”
매니저의 위로 아닌 위로에 멤버들은 시무룩한 얼굴로 무대 뒤 천막을 향했다.
“어, 명수야.”
수련이 무대 옆에 선 명수를 발견하고는 다가갔다.
“누나! 되게 멋있었어요. 누나 완전 연예인 같아요.”
같은 게 아니라, 연예인이지만 수련은 싱긋 웃으면서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옆에 선 단유를 바라보고 물었다.
“넌 어땠어?”
“···나쁘진 않았어요.”
수련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은이 얼른 단유의 어깨를 짚으며 변명을 했다.
“얘가 원래 공부만 해서 노래나 이런 걸 잘 몰라요.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공부 잘 할 거 같이 보이긴 하네요.”
“수련아!”
마침 지나가다 하은을 보고 인사하러 오던 중, 수련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얼른 뛰어왔다.
“너 좀! 말 좀! 응? 제발?”
낮은 목소리로 수련을 다그쳐보지만, 수련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너 아무래도 나랑 이야기 좀 해야겠다. 내가 웬만하면 어린 애라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무슨 소릴 하려고?”
매니저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수련을 말리려는데, 수련은 단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나 싫어하지?”
매니저가 수련을 붙잡고 천막으로 끌고 갔다.
“너 나 따라와!”
매니저가 수련의 입을 막고, 황급히 동행한 후배에게 부탁을 했다.
“쟤들 데리고 천막 안으로 데리고 와.”
“···외부인 출입금진데.”
“너라도 좀! 그냥 내 말 좀 들으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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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단유와 명수는 천막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다른 진행 스태프들이 이유 없이 외부인을 들이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천막은 갤럭시즈만 쓰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가수들도 쓰고 있는데 아무나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은은 내심 잘 됐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두 아이를 데리고 리조트로 향했다.
“단유야, 너 오늘 좀 달라 보인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하은이 단유를 보며 말했다. 막 머리를 감고 나온 단유가 촉촉해진 머릿결을 툭툭 털어대다가 하은을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그냥 평소보다 더···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서.”
본인을 앞에 두고 ‘시니컬’하다든지 ‘흑화’했다든지 하는 표현을 쓰기는 무리가 있어 급히 말을 바꿨다. 12살짜리 아이한테 쓸 말도 아니고.
단유는 대답대신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주스를 손에 들고 소파에 앉았다. 마셔도 되죠, 라는 물음에 하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 모금 입에 넣고 맛을 음미하는 단유였다.
“계속 그 일이 신경 쓰여서 그래?”
“···아니요. 그건 이해를 했어요.”
“그래?”
단유는 잠시 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많이 거세지고 있었다. 마치 작년의 그 날처럼.
“아까 그 누나 이야기도 맞는 이야기잖아요. 만약 선생님이 그 사람들을 구한다고 나가셨다가 사고가 난다면, 정말 슬펐을 거예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똑같겠죠.”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빠, 가족, 친구. 결국 이런 인간관계를 걸치고 있는 이상 사람은 결코 혼자일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쉽게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단유는 그렇게 이해를 했다. 다만 이해할 뿐이었다.
“저는 그래도 그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다만 힘이 부족해서, 용기가 부족해서, 라고 생각해요.”
하은이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 캔을 땄다. 딸깍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마시기도 전부터 청량한 맥주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전 누구를 비난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제 자신이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했잖아요. 아까 그 누나의 말대로. 제가 나가지 못한 것도 아마 같은 이유였을 거예요.”
“만약에, 니가 나가겠다고 했다면, 난 정말 화를 냈을 거야.”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하은이 단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유가 가만히 하은을 응시하자, 하은은 소파에 등을 기댄 자세로 말을 이었다.
“사람을 구해야 한다. 맞아, 우린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행동하라고 가르치지. 그러나 실제로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 아까처럼 자기 목숨이 위험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건 아까 수련이라는 연예인 이야기처럼 방법이나 힘이 필요해.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그저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뛰어들었다간 같이 죽을 테니까. 하지만 길가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는 건 문제가 있지. 그 때는 그 사람을 데리고 병원에 갈 수도 있고, 다른 응급조치를 취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지. 약속시간에 늦어서, 혹은 방법을 몰라서, 혹은 복잡한 일에 얽히기 싫어서.”
하은은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짧게 숨을 내셨다. 겨우 두 모금인데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오는 길에 생각을 해봤어. 어릴 때는 너처럼 생각을 했던 거 같아.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그런데 요즘은 말이야. 만약 그런 사고가 있더라도 끼어들지 않게 되는 것 같아. 옆집에서 비명이 들려도, 집 안에 가만히 있게 되지.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하는 걸 본다면, 그 때도 달려들어서 구해낼 수 있을까?”
하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안주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됐어. 휴. 니 말대로야. 그냥 다 핑계고 그냥··· 무서운 거야. 위험한 일은 피하고 싶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사는 사회가 그래. 그냥 다 무서워. 어지간하면 다 피하고 싶고, 가장 좋은 건 아예 그런 일을 맞닥뜨리지 않는 거지. 그래서 집 안에 경보기도 잔뜩 달아두고 있는 거고.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으려 하는 거고.”
하은은 흐릿한 시선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내가 선생님인데, 내가 니 선생님인데, 난 너한테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뭘 가르쳐 줘야 할까? 그냥 수학, 과학 이런 거나 가르치면서 살아야 하나?”
단유는 하은이 술이 취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들어가 쉬세요.”
“됐어. 난 안 구해도 돼. 난 안 위험해.”
그 때, 명수가 거실로 나왔다.
“어? 선생님 왜 그래?”
“어이! 먹보! 어디 갔었어? 일루와. 같이 먹자.”
캔을 머리 위로 치켜 드는 하은을 바라보며 단유가 말했다.
“오지 마. 위험해.”
명수가 멀찍이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