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83화 (183/956)

전승(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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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나와 리조트로 가기 위한 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차가 조금씩 막히기 시작했다. 리조트로 향한 도로 위에 새빨간 불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리는데 길이라도 넓히든가. 이게 뭐야.”

하은의 투덜거림에도 명수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한참 전에 잠이 든 명수였다. 오는 내내 그렇게 들떠서 에너지를 마구 발산하더니, 결국 방전이 되었는지 모로 엎어져 있었다. 단유는 명수가 불편하지 않게 머리 아래 쿠션을 받쳐주었다.

“너도 피곤하면 자. 이럴 때라도 푹 쉬어둬야 나중에 신나게 놀지.”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만약 나중에 니가 일찍 지쳐버리면, 명수는 누가 어울려준다니? 난 힘없다.”

단유는 싱긋 웃으면서 하은의 걱정을 이해해 주었다.

“걱정마세요. 제가 이래봬도 체력이 좋잖아요?”

‘이래봬도’란 말이 어울릴 단유는 아니지만, 확실히 단유가 체력이 좋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아침마다 운동을 나가는 단유를 보면, 마치 운동선수를 꿈꾸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

잠시 차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몇 시간 전부터 어둑해진 하늘 덕분에 해가 질 시간도 아니건만, 거의 대부분 차들이 라이트를 켰다. 리조트를 향한 차선은 막혔지만, 리조트에서 나오는 차선은 휑하니 뚫려 있어서 가끔 라이트를 밝히고 달려오는 차량의 불빛에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오니까 좋지?”

“저보다는 선생님이 더 오랜만에 나오시는 거 아닌가요?”

하긴, 오랜만에 나오는 건 단유가 아니라 하은이었다.

“그래도 난 예전에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지겨워서 그런 거야. 다 가봤으니까. 넌 처음이잖아? 남들은 이곳저곳 다 가보고 싶어 하는데, 넌 그렇지 않았어?”

“별로요.”

굳이 말하자면, 단유가 이 곳에서 많이 돌아다니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 이유를 따지자면 하은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밥도 물도 없이 몇날 며칠을 걸어 산 속을 헤맨 적도 있었고, 끝이 안 보이는 평야와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늪 사이로 만들어진 나뭇길 위를 뛰어다닌 적도 있었다.

시쳇말로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했던가? 단유에겐 그 말이 진실이었다. 그냥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진짜 목숨이 왔다 갔다 했었으니까.

“가끔씩은 이렇게 나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내가 너무 선생님이란 이름에 매여서 너희들을 공부시켜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거든? 그래도 나름 위탁을 맡은 보호자인데, 이것저것 구경도 시켜주고 그랬어야 했나봐.”

감상으로 시작해서 반성으로 끝나는 하은의 말에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선생님 덕분에 저희가 편하게 생활하고 있는 걸요?”

“···하여튼 넌 너무 어린애 같지가 않아. 그리고 내가 뭘 했다고 편하니? 너희가 편한 건, 집안 일 봐주시는 이모님 때문이지.”

청소, 빨래, 식사를 모조리 책임 져 주시는 이모님 아니었으면, 하은도 버티지 못했으리라.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이모님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어쩌겠니? 오랜만에 휴가라고 집에서 쉬는 게 더 좋다고 하시니.”

그리고 이모님은 가정이 있으신 분이었다. 본인의 자녀분들도 챙기셔야 하기에, 휴가 겸 해서 집에서 쉬시겠다고 하시니 굳이 졸라서 함께 하자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저 차는 되게 크네요.”

단유가 뒤를 보며 말하자,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밴이라는 건데, 보통 연예인들이 타고 다닌다고 하지. 아닐 수도 있지만.”

“편한가요?”

“그렇지 않을까? 비싼 찬데.”

그리고 비싼 차에 탄 수련은 하은의 말대로 편하게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다만 이 비싼 차에서 편한 사람은 오직 수련뿐이라는 것.

매니저는 연신 시계를 보며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너무 막히는 거 아냐?”

로드매니저도 운전대를 꽉 쥐고 있긴 하지만, 당장 쓸 일이 없는 운전대였다. 오른발로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지만 100M도 쉽게 나아가질 못하는 차였다.

“그래도 아직 시간 여유는 있지 않습니까?”

입술을 핥으며 초조한 심정을 드러낸 매니저가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어, 나야. 다른 애들 도착했어? 뭐? 거기도 도착 못했어? 왜? 아이 씨. 그럼 언제 도착할 거 같은데? ···그래? 거기가 먼저 도착하겠네. 우린 좀 걸릴 것 같아. 우리 얼마나 걸리겠냐?”

로드매니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을 피했다가 사나운 눈초리에 찔끔하며 대답했다.

“한, 한 시간이면 도착하지 않을까요?”

“우리 한 시간 걸린단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거 같으니까, 도착하면 먼저 준비 끝내고 기다리고 있어. 뭐? 공연 적에 뭘 먹는다고 그래? ···알았어, 그럼 김밥 반줄씩만 먹어 둬. 아니다. 두 개만 먹으라고 그래. ···그래.”

매니저는 전화를 끊었다. 로드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쪽으로 질러가볼까요?”

매니저가 로드매니저의 뒤통수를 때리는 폼을 취했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로드매니저를 쏘아보았다.

“내가 그 짓하다가 죽은 놈들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거든? 미친 짓 하려면 혼자 해, 알았어?”

로드매니저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딴에는 시간을 맞춰볼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역시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이라는 건 예전에나 가능할 일이었다. 요즘은 차라리 펑크를 내면 내지, 무리하게 달려서 사고를 재촉하지는 말자는 분위기였다.

“애들 도착 안했대요?”

뒤에서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어? 아직 멀었으니까 더 자.”

“허리 아파서 더는 못 자겠어요. 이러다 나중에 무대 위에서 허리 삐긋할 거 같아.”

억지로 기지개를 펴며 눈을 뜬 수련이 검게 선팅된 창을 통해 밖을 보았다. 빨간 리어램프가 붉은 눈을 치켜 뜬 사람처럼 보였다.

“먹을 거 없어요?”

이쪽도 사실 녹화가 길어져서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공개녹화가 코앞인데, 막 먹을 수는 없었다.

“막 먹긴 뭘 먹어요? 내가 언제 식탐 부린 적 있다고 그래요? 적당히 배만 좀 채울게요. 그리고 너무 배고프면 힘없어서 노래가 더 힘들다고요.”

“미래야? 거기 뭐 있니?”

스타일리스트가 쀼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없는데요.”

평소에는 군것질거리도 잘 들고 다니던 애가 못 먹어서 그런가 반응이 영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도 나도 힘든 시간. 이럴 때 매니저가 잘 조율해야지, 안 그러면 험악한 분위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티를 안내려고 해도 나기 마련이어서 목전에 둔 공연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련아, 조금만 참자. 거기 물이라도 마시던가.”

“뭐, 맨날 물배만 채우래?”

“물도 너무 많이 마시진 말고. 니 말대로 배 나올지 모른다.”

수련은 쳇 혀를 차며 입을 적실 정도로만 한 모금을 들이켜 입 안에 물고 있다가 조금씩 목 뒤로 넘겼다.

“어, 눈 오네요?”

눈이 올 듯 말 듯 하다가도 오지 않기에, 안 내리나 했는데 결국 함박눈이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와아, 예쁘다.”

수련이 속없이 감탄할 때, 매니저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군대에 있을 때부터 눈을 싫어하기 시작한 매니저였다. 특히 이 쪽 업계에서 일한 뒤부터 눈을 생선 눈깔보다 더 싫어하기 시작했다.

“쓰레기네.”

“쓰레기네요.”

매니저와 로드매니저가 동시에 말했다.

“체인은?”

“뒤에 있어요.”

아까도 물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리조트 가자마자 체인부터 꺼내서 달도록 해.”

마침 앞 유리창에 내린 눈이 스르르 미끄러지며, 와이퍼 위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같은 시간, 단유도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을 보고 있었다. 명수를 깨울까 생각했지만, 차라리 나중을 위해서 깨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운전 중인 하은을 위해서라도.

하은도 어느 운전자들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보닛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왜 하필 눈이래? 어제 일기 예보에서는 눈 내린다는 이야기가 없었는데.”

하은이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아서 단유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하은이 룸미러로 뒤를 보며 말했다.

“체인을 안 챙겼거든.”

하은의 말의 요지는 차가 눈길에서는 미끄러질 위험이 커서 체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타이어와 눈 사이의 마찰력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데, 단유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마찰력에 대해서만큼은 하은 못지않게, 어쩌면 하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이럴 때도 선생님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는 하은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직 도착하려면 많이 멀었나요?”

하은이 내비게이션을 보며 답했다.

“내비 상으로는 30분 정도 남은 것으로 나오는데, 그것도 빨리 달릴 때 이야기지, 지금 같아서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

그 때, 건너편 차선에서 1톤 트럭 한 대가 신나게 속도를 내며 지나갔다. 트럭이 지나갈 때, 후류(後流) 때문에 하은의 차가 살짝 휘청거렸다.

“아니, 눈도 오는데 누가 저렇게 무식하게 속도를 내면서 달려?”

신경질적인 반응을 냈다가 문득 단유가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 얼른 입을 다무는 하은이었다.

“위험해보여서 그랬던 거야. 신경 쓰지 마.”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옆에 누워있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눈이 내리든, 과속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쿨쿨 자는 명수를 보니 어쩐지 다른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명수가 개운하게 잠에서 깨어나, 즐거운 마음으로 썰매를 타기 위해 눈밭을 달려 나갈 수 있기를 바랐다.

“어?”

하은이 의문의 감탄사를 뱉어냈다. 그리고 곧장 거친 소리가 창을 뚫고 들려왔다.

―끼이익

단유가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서 눈이 부시게 환한 불빛이 비쳐 들어왔다. 단유는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

분명히 아침까지도 일기예보에서는 눈이 내릴 거라는 예보를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점심때는 지역에 따라 눈이 내리는 지역이 있을 거라고 했고, 적설량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많이 내리는 지역은 1~2㎝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조트나 그 주변에서 나오는 차들이 이 일기예보를 제대로 듣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누구도 체인을 준비할 생각을 못했고, 준비했더라도 당장 눈이 내리지 않는 바에야 누가 체인을 채우겠는가. 게다가 애초에 눈이 많이 내릴 줄 알지 못했다.

드문드문 내리던 눈은 마치 지방(紙榜)을 태운 뒤 날리는 조각처럼 하늘하늘 거리며 떨어졌기에 크게 경각심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순식간에 내리기 시작한 눈은 양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도로를 충분히 얼어붙게 만들 정도는 되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렸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조심했을까? 눈이 더 많이 내리기 전에 빨리 가자는 생각을 가졌던 것일까? ‘급커브 조심’이라는 표지판이 없었기 때문일까?

차 한 대가 뻥 뚫린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조심은 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도로가 젖어들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차선을 따라 운전하다 살짝 왼쪽으로 운전대를 돌려 굽잇길을 도는데 돌다보니 타이어가 제동이 되지 않았다. 당황한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연신 밟았다. 꾹꾹 밟는데도 타이어는 계속 미끄러졌다. 이마에 땀이 송글 솟아나고 심장이 툭하고 떨어질 무렵, 갑자기 타이어 제동이 이루어졌다. 길이 살짝 얼어붙었던 지역을 벗어난 차는 간신히 제동을 되찾았고, 운전대를 열심히 움직여 도로 옆 수풀로 튕겨나가기 전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운전자는 짧게 한 숨을 쉬고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채 진정시키기도 전에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아니 밟으려 했다.

―끼이익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룸미러로 확인하기도 전에 충격이 먼저 왔다.

“아이고, 머리야.”

운전자가 목 뒤를 붙잡았다. 크게 부딪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충격 당시 헤드레스트에 심하게 부딪혔던 것 같았다. 절로 신음이 나오는데, 운전자는 일단 차에서 내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운전석 쪽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커다란 굉음과 함께 몸이 앞으로 툭 튀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께를 망치로 두드리는 충격이 느껴졌고, 턱이 깨지는 아픔도 있었는데 그 순간 운전자는 정신을 잃었다.

“어? 어?”

로드매니저는 왼쪽 앞에서 벌어지는 사고를 처음부터 목격했다. 처음의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하다가 비틀대더니 무사히 차를 바로 세웠다. 그리고 그 뒤를 다른 차가 와서 차의 후미를 박았다. 앞차는 살짝 앞으로 튕기듯 밀려났지만 큰 충격은 없었을 것이다. 후미램프와 트렁크, 리어범퍼만 갈면 되겠네, 라는 게 로드 매니저의 감상이었다.

“사고야?”

“네.”

매니저가 몸을 기울여 관심을 보일 때, 로드 매니저는 흰색 승합차 한 대가 위험한 속도로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어?”

그리고 그 차는 마치 멈출 줄 모르는 버펄로처럼 앞 서 있던 두 차를 맹렬히 처박았다. 굉음과 함께 앞 차들이 몇 미터씩 밀려나갔고, 승합차는 보닛이 망가진 상태로 미끄러지다 밴을 향해 다가왔다.

“피해!”

하지만 그냥 거북이 걸음 하듯 움직이던 차가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그래도 피해보자고 운전대를 오른쪽으로 꺾으려 하는 찰라, 승합차가 비스듬하게 미끄러지더니 밴을 긁으면서 뒤로 지나갔고, 그대로 밴의 뒤에서 따라오던 차와 충돌했다.

“야, 뭐야? 뭐야?”

수련이 운전석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매니저가 얼른 수련을 말렸다.

“야, 위험해, 앉아 있어.”

“오빠, 저기!”

수련의 동공이 커지는 것을 본 매니저가 급히 고개를 돌렸고, 그 때 매니저 눈을 가리는 환한 빛이 있었다.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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