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82화 (182/956)

전승(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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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조명들이 비쳐지는 무대 위, 무대 테두리로 화려한 LED 알전구가 빛을 내면서 화려함을 더하고 있었다. 그 무대 가운데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소녀와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성 아나운서가 웃으면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노래 정말 잘 부르시네요.”

“고맙습니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꼭 쥔 소녀가 꾸벅 인사를 했다.

“우리나라 걸그룹들이 사실 아이돌이란 편견 때문에 가창력에 늘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만, 수련씨처럼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서 여기 계신 방청객 분들은 물론이고, 많은 시청자분들도 즐거워하실 겁니다. 패널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쭤볼까요?”

무대 옆에 마련된 패널석에 앉아 있던 남녀 패널들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수련을 칭찬했다.

“목소리가 R&B에 특화된 목소리예요. 유니크하거든요? 들으면 들을수록 감성이 벅차오르는 느낌이 정말 매일 듣고 싶어지는 목소리입니다.”

“곡 중간의 간주부분에서 댄스를 하셨어요. 격렬한 댄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대 전체를 활용하는 댄스가 돋보였고요. 그 댄스 직후에 곧바로 이 곡의 하이라이트를 부르는데 음정이 나가질 않아요. 그건 수련씨가 평소에 얼마나 연습했는지를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작곡가 출신의 패널은 수련에게 전화를 거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꼭 한 번 같이 작업하고 싶어요. 나중에 녹화 끝나고 전화번호 꼭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수련이 꾸벅 인사할 때, 진행자가 끼어들었다.

“저기, 상현씨. 그런 개인적인 부탁은 녹화 끝나고 해 주시길 바랍니다.”

진행자의 능글맞은 대처에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넉넉한 웃음을 짓던 진행자가 마무리 멘트를 하며 정리를 시작했다.

“그만큼 수련씨의 노래가 뛰어나다는 반증이겠지요. 오늘 오신 방청객 분들께서도 아마 수련씨의 노래에 크게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에 수련씨에게 이렇게 많은 표를 던져주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수련은 무대 중앙에서 오른쪽 왼쪽 돌아가며 꾸벅꾸벅 인사했다.

“미래가 기대되는 걸그룹, 갤럭시즈의 수련씨였습니다.”

방청객과 패널들에게서 박수가 쏟아졌다. 무대 뒤로 떠날 때까지 수련의 인사는 멈추지 않았다.

****

“오늘 모니터 어땠어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치던 수련이 뒤에 선 매니저에게 물었다.

“괜찮게 나왔어. 넌 말만 많이 안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그것만 주의하면 돼.”

“아까 중간 댄스 때, 너무 무리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나오진 않았어요?”

“카메라가 잘 잡아줘서 예쁘게 나왔어. 넌 말만 많이 안하면 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매니저가 화장대 거울을 통해 수련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아니, 왜 맨날 말하지 말래? 요즘 예능에서는 말 많이 해야 한다고 다른 애들한테는 그렇게 교육시키면서, 왜 나는 안 돼요? 내 목소리가 나쁜 것도 아니고, 내가 비속어를 많이 쓰는 것도 아닌데, 왜 말을 하지 말래요? 만약 실수해도 편집하면 그만이지 뭘 걱정을 해요? 그리고 제가 바보도 아니고 이미지 무너질 이야기 하겠어요?사람 너무 의심하는 거 안 좋아요. 기분 나쁘고요.”

매니저는 푸근한 웃음을 지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말만 줄이면 돼. 넌 말 안할 때가 카메라에 예쁘게 나오니까 그래.”

올해 데뷔한 걸그룹 갤럭시즈의 인지도 상승을 위해 모든 멤버들이 다방면으로 활동하는 중이지만, 특히 수련은 메인보컬답게 음악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면서 갤럭시즈를 홍보하고 있었다. 멤버 전체가 여성적인 청순함과 아련한 감성을 강조하는 콘셉트인데, 그 중 수련은 그 외모가 눈부실 정도로 뛰어나, 팬들 사이에서도 특히 주목받는 멤버였다.

“수련아, 이거 걸치고 나가.”

스타일리스트가 붉은 색 두터운 숄더를 건네주자, 수련이 미간을 찌푸렸다.

“녹화 끝냈는데, 무슨. 그냥 저 패딩 줘요.”

수련이 가리킨 것은 새까만 롱 패딩이었다.

“야, 방송국 밖에도 기자랑 팬들이 대포들고 서 있는 거 몰라? 당분간은 신곡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의상에 신경 쓰라고 했어, 안했어? 저건 차에 가서 입어.”

매니저의 지적에 수련이 벌떡 일어나 패딩을 집어 들었다.

“밖의 온도가 지금 몇 도인지나 알고 그래요? 저런 거 입으면 저 목 상해요. 게다가 사진 좀 찍히면 어때요? 무대에서 잘 보여야 가수지. 그리고 다른 걸그룹 애들도 이런 거 잘만 입더만, 왜 우리만 그래요?”

다른 그룹 애들도 데뷔 초년도에는 그렇게 아무거나 입고 다니지 않는단다. 게다가 패딩을 입어도 꼭 저 같은 걸 입는다. 칙칙한 검은색으로. 매니저가 다시 지적하려는 사이 수련은 이미 패딩 속으로 팔을 집어넣고 있었다.

검은 패딩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 후, 매니저를 바라보며 수련이 입을 열었다.

“가요.”

그러고는 싱긋 웃는다. 그 얼굴에 매니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애들은 매니저한테 고분고분하기만 한데, 수련은 성격이 얼마나 대찬지, 첫날부터 떽떽거리더니 저렇게 고집부릴 때는 꺾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아주 말을 안 듣는 것도 아니고, 웬만하면 매니저의 지시에 따르는 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건 매니저의 입장에서 고맙기도 한 부분이었으니까.

“언니, 여기요!”

“수련아!”

“수련누나! 여기 봐줘요!”

소위 퇴근길이라고 녹화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팬들이 카메라와 핸드폰을 들이밀며 수련의 이름을 외쳤다. 아직 음악프로그램이나 스트리밍사이트의 차트에서 1위 한 번 해 본적 없는 걸그룹이지만, 조금씩 인지도를 쌓아가면서 이렇게 수련이나 갤럭시즈를 찾는 팬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고마워요, 어? 안녕? 어제도 봤었죠? 밥 먹었어요? 안녕? 옷 따뜻하게 입어요.”

수련은 나름 팬서비스라고 팬들에게 한 마디씩을 건네면서 이동했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걸그룹답게 오래 이야기할 수 없었다. 옆에 따라가던 매니저가 적당히 선을 그으면서 수련을 내몰았다. 곧 밴에 올라탄 수련은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다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창문을 닫고 몸을 좌석 깊숙이 묻었다.

운전대를 잡은 로드매니저 옆 조수석에 앉은 매니저가 슬쩍 고개를 돌려 물었다.

“너 혹시 상현 작곡가님이랑 연락처 교환했어?”

“아니요.”

시큰둥한 수련의 반응에 매니저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었나? 뭐, 그래도 그 유명한 작곡가한테 같이 작업하자는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오늘 꽤 성공한 셈이다.”

나름 오늘의 성공적인 녹화를 칭찬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매니저의 이야기에 수련이 피식 웃었다. 그 반응이 의아해서 매니저가 물었다.

“왜?”

“유명하긴 유명하죠, 그 분. 근데 같이 작업할 정도는 아니에요.”

“뭐?”

상현이라는 작곡가는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작곡가 중의 한 명이었다. 그가 초기에 작곡했던 노래들은 지금도 레전드라는 별칭 아래 간간이 TV에서 리메이크 되곤 했다.

“20년 전에나 유명했지, 지금 솔직히 제대로 작곡한 곡도 없잖아요? 요즘 트렌드를 못 따라잡는 작곡가의 곡에 노래 부르고 싶지는 않아요. 어쩌면 같이 작업을 하고 음원을 낸다고 해도 크게 화제는 안 될걸요? 반짝 떴다가 2시간도 안 돼서 차트 아웃 할 게 뻔해요.”

수련의 시니컬한 반응에 매니저가 힐끔 쳐다보았다.

“옛날에 내 놓은 곡들이 나쁘진 않아서 그 저작권으로 하루하루 먹고 사는 양반인데, 그것도 이제는 약빨 떨어질 때도 되지 않았어요? 아마 본인도 새 곡을 쓸 엄두도 못 내고 있을 걸요? 그러니까 저런 데서 패널이나 하고 있죠.”

매니저는 말없이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다음은 어디예요?”

수련의 물음에 스케줄을 확인한 매니저가 입을 열었다.

“서라 리조트. 다른 애들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서라 리조트에서 음악방송 공개녹화가 있었다. 겨울철의 별미랄까,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 곳이고 게다가 주요 관객들이 1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주 타겟층이니 잘만 하면 또 인터넷에서 검색어 순위에 오를지도 몰랐다.

“잠시 눈 좀 붙일게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본다면, 절대 초년 데뷔한 걸그룹 멤버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3, 4년 지나면 얼마나 더 심해질까? 만약 차트 1등이라도 한다면?’

만약 1등을 하고 더욱 기고만장해진 수련의 모습을 잠시 상상하던 매니저는 고개를 저었다. 더욱 시니컬하게 변할지도 모를 수련의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1등 가수를 만들어낸 자신의 화창한 미래를 상상하는 게 더 생산적인 일이었다.

매니저는 수첩을 덮고, 창밖을 보았다. 하늘에 어둑한 구름이 끼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조만간 눈이라도 내릴 모양이리라.

“차에 체인 있어?”

“예, 준비해 놨습니다.”

로드매니저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

“석고야, 나 하나도 안 추워!”

달리는 차 안, 뒷좌석에 앉은 명수가 차창을 내리고 맞바람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명수야, 창 닫아. 다른 사람은 춥잖니?”

“하나도 안 추워요.”

명수가 춥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지금 명수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스키장을 가기로 결정한 후, 하은은 아이들을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스키장에서 입을 보드복을 사기 위해서였다.

단유와 명수가 하은과 같이 살게 된 뒤, 가장 먼저 했던 것도 바로 옷을 사는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형들이 물려준 옷들을 입다가 처음으로 자기에게 맞는 옷을 사 입는다는 경험을 한 단유와 명수가 무척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이미 그 당시에 입을 만한 옷들을 충분히 구비했었고, 그 이후에도 계절별로 필요한 옷들을 구입하곤 했다. 하지만 역시 첫 스키장 나들인데 제대로 된 옷을 입혀주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기에 하은은 기꺼이 자기 돈으로 선물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명수는 보자마자 눈에 꽂힌 흰색 밀리터리 무늬의 보드복을 입었는데, 생애 최초로 입은 고가의 보드복에 하루 종일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 날, 틈만 나면 하은 앞에서 애교를 부리던 명수 때문에 하은도 줄곧 미소를 지었었다.

스키장을 가는 날 아침부터 두툼한 보드복을 걸치고 돌아다니더니, 차에 타서는 얼굴을 세차게 할퀴는 겨울바람에도 춥지 않다고 허세를 떠는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명수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눈이 시리울 만큼 바람이 찬데, 춥지 않을 리가 없다. 두건을 쓰고 있다면 또 모를까. 단유가 명수를 말렸다.

“그러다 감기 걸리면 오늘 가서 못 놀 거야.”

못 놀면 큰일이지. 명수는 얼른 창을 올렸다. 바람이 멎자, 명수의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석고야, 가면 뭐하고 놀지?”

“우리 뭐해요?”

단유는 명수의 질문을 간단하게 넘겼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하은이 대답했다.

“너네하고 싶은 거 다 하면 되지. 어느 친절하고 돈 많으신 분이 고맙게도 리조트에 방까지 잡아주셔서 말이야. 2박3일로 놀 거니까, 하고 싶은 거 다해도 돼.”

“재훈 형도 오면 좋을 텐데.”

명수의 말에 하은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 재훈 오빠가 와서 니가 좋을 게 뭐가 있니?”

“진짜예요. 재훈 형 오면 좋죠.”

“뭐가 좋은데?”

“맛있는 거 많이 사주잖아요, 그 형은.”

“난 마치 너 굶겼던 것처럼 들린다?”

명수가 헤헤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하은은 화제를 돌려 물었다.

“보드도 배워볼래? 너희 나이 때도 보드 타는 애들 많던데.”

“저요, 저 배워볼래요.”

“단유는?”

창밖을 보던 단유가 하얀 웃음을 지어보이며 답했다.

“좋아요, 저도.”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배워놓으면 언젠가는 다 써먹지 않을까?

하은과 두 아이를 태운 자동차는 고속도로 위를 시원하게 달렸다. 그리고 어느새 하늘 위로 회색빛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보일 듯 말 듯 하얀 눈 조각들이 나풀대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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