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81화 (181/956)

전승(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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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단유는 재훈을 만나러 갔었다. 오랜만에 만난 재훈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한 뒤였다. 그러나 복학과 사업 등의 문제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재훈은 단유와 오래 있지는 못했다. 그래도 건강한 모습으로 만난 두 사람은 그간의 소회를 풀었다. 또 그 자리에 명수도 함께 했었는데, 재훈은 명수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정말 잘 먹는구나?”

“잘 먹어야, 많이 큰다고 했어요.”

“커서 뭐가 하고 싶은데?”

“축구선수요.”

재훈은 소스 범벅이 된 명수의 입을 닦아 주며 열심히 지원해주겠노라 약속했다.

헤어지기 전, 재훈은 단유에게 한 가지 당부를 했다.

“하은이한테 부탁은 했지만, 너한테도 꼭 당부를 하고 싶어서.”

“뭔데요?”

단유의 의젓한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재훈이었다.

“고민이 있으면 꼭 하은이랑 상담을 하도록 해. 걔가 전문 상담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혼자 고민하지 마. 넌 혼자가 아니니까.”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었다. 최근 단유는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던 공부도 집중을 잘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모습을 종종 보여 왔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실 늘 마법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단유였다. 언젠가는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지난 시간이 벌써 2년여에 가까웠다. 그 시간동안 특별히 마법을 사용할 일이 없어서 필사적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저 세계로 넘어갔을 때 죽을 뻔 한 적도 있었고, 이 곳에서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유용하게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이 없진 않았다. 무엇보다 할 수 있었던 일을 할 수 없게 되니, 어쩐지 뺏긴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본격적으로 마법을 되찾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된 계기는 얼마 전 꾸었던 꿈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이미 그 전부터 막연히 잃어버린 힘을 되찾고 싶다는 열망은 가지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어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알겠어요.”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재훈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니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단유의 고민과 노력은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고, 그러나 아쉽게도 소득은 없었다. 다시 가을이 찾아오고 또 같은 생활이 반복되었지만 단유는 예전처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시험도 사라진 마당이니 선호 과목에 대한 공부를 잠시 소홀히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법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기로 했다.

****

“아직도 단유, 고민이 많은 것 같지?”

하은이 소파에 앉아서 단유가 들어가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호빵과 눈을 마주치며 재롱을 부리던(?) 명수가 지나가듯 말했다.

“괜찮아요.”

“뭐가?”

“단유요.”

“니가 어떻게 알아? 뭐 아는 거 있어?”

명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뇨, 저도 몰라요. 그런데 알아요. 단유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

그 점에 있어서는 동감하는 바다. 창밖을 보니, 구름이 잔뜩 낀 저녁하늘이 보였다.

“눈 오겠다.”

그 소리에 명수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 되는데.”

“왜?”

“내일 체육 수행평가 있어요.”

기말시험이 사라지고 수행평가가 들어왔는데, 하은이 보기에는 조금 어정쩡한 제도였다. 과목별 세부 평가 방법과 기준안이 있다고는 하지만, 단유나 명수가 들고 오는 과제들을 보면, 과연 저게 무슨 소용인가 싶은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테이블 위에 놓인 사회 수행평가 과제물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조선의 건국과정 이해하기가 무슨 말인지···.”

명수가 들고 온 문제 때문에 노트북으로 조선 건국에 대한 블로그를 찾아주었더니, 그걸 열심히 받아 적은 명수였다. 그리고는 호빵과 놀고 있다.

저걸 가지고 점수를 어떻게 매길지 의문이다.

****

단유는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천장을 향할 뿐, 정작 바라보는 것은 그 너머 어딘가 였지만.

“포르마, 샤락티라스, 아나그노리시, 챕터, 컨슈메···.”

단유는 입으로 마법 전개 과정을 되뇌어 보았다. 하나라도 잊은 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마법이 되지 않는 이유는 역시나 포르마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원형을 알 수 있을까?’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있는 것만큼 답답한 일은 없었다. 이전에는 세계가 다르다는 이유로 원형을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세계가 다르면 그 세계에 속한 원형도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어떤 깨달음을 통해서 포르마가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가 통찰력에 관한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이용해서 제윅의 마법을 막아내기도 했고.

그런데 얼마 전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과연 통찰력이 답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계기는 바로 호빵 때문에 찾게 된 애견교육에 관한 서적이었다.

이곳, 지구에 축적된 과학과 문명은 실로 놀라워서 어린 나이의 단유가 보기에도 언제 그 많은 지식들을 모두 습득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반대로 그 지식들을 모두 습득한다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한 분야의 지식만을 파고 들어서 해당분야의 깊은 통찰력을 얻는다 하더라도 과연 마법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자문하면 그렇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단유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 즉 공간에 대한 마법 때문이었다. 분명히 이 마법의 획득과 사용에 신의 도움이 있었다. 아니 진짜 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인외의 존재임은 분명했다. 아무튼 그 존재의 도움으로 단유가 얻은 공간에 대한 마법은 마법 그 자체에 대한 거대한 힌트였다.

왜냐하면, 공간 마법의 포르마는 다름 아닌 숫자였기 때문이다. 숫자의 원형은 숫자였다. 다만 숫자는 형이 없었다. 형(形)은 없지만 상(像)은 존재하는 기묘한 상태. 그려지는 이미지가 아니라 떠오르는 이미지. 그리고 여기서 시작된 숫자의 선은 단유의 위치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며 수많은 동심원과 수많은 기하적 선들을 그려낸다. 0에 0을 더해 0을 만드는 수식이 2차원을 떠나 3차원, 4차원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층을 더하니 공간이 만들어졌다.

숫자는 무한대였고, 단유가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확장될 수도 있었다. 아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유의 수학적 지식의 한계인지, 아니면 애초에 신의 도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인지 아직은 마음대로 무한대로 공간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마법이 또 고민이 되는 것은 바로 공간 너머 공간, 즉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것이 가장 큰 미스터리인데, 단유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고자 할 때 단유가 알지 못하는 챕터(추가된 특정 성질)가 머릿속에 구현된 피구라에 붙었다. 자동차 엔진에 전혀 알지 못하는 기능의 기계가 붙는 것처럼. 그리고 그 기계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자동차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물론 그 영화 속의 박사님은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 기능을 알겠지만, 주인공은 그 기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르면서 사용할 수 있었다. 단유가 바로 그 주인공처럼 어떤 성질인지도 모르는 챕터를 이용해 세계 전이(轉移)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 챕터에 사용된 수식은 단유의 지식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통찰력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숫자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했으니까. 또 공간 마법이 온전히 숫자 그 자체로만 포르마가 만들어진다고 보기도 어려웠으니까.

‘익숙하게 느껴지는 무엇인가도 있고.’

때문에 단유가 고민하는 점은 되돌아 처음의 질문. 과연 마법의 사용은 통찰력 때문인가? 일단 단유는 아니라는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어 한 가지 더. 불의 마법과 마찰에 관한 마법의 경험으로 볼 때, 단유는 숫자라는 포르마를 이용해 다른 마법의 구현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다만 그게 어떤 마법으로 구현될지는 모른다. 이것을 찾는 것이 단유가 찾아야 할 숙제일 것이고.

“석고야, 밥 먹어.”

오늘도 이렇게 고민과 고민 속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하루를 보내게 될 것 같았다. 만족감도 허무감도 없었다. 조급함도 느긋함도 없었다. 오로지 마법에만 집중하는 단유였다.

다만, 단유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감정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위기감일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느끼지 못하지만 소년이 숱하게 겪으며 몸으로 체득한 위기감이 소년을 독촉하고 있었다. 빨리 힘을 찾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위험할 것이라고.

****

“안녕, 오랜만이네?”

방학식 날, 단유는 교실로 가던 길에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어, 안녕.”

혜린이 활짝 웃으면서 다가왔다. 혜린은 5학년 7반이었다. 교실로만 따지면 거의 끝과 끝이었다.

“내년에는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다.”

혜린이 속내를 드러내자 단유는 머쓱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예전에는 혜린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이것도 TV시청각 교육의 효과라면 효과일 것이다.

때문에 예전처럼 무감정한 미소로 대하기 어려워진 곤란함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단유는 혜린에게 손을 흔들었고, 혜린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러고 보면 그간 몇 번 복도나 운동장에서 마주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전의 혜린과 달리 다소 서먹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고, 때로는 아는 척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명수의 도움이 컸다.

“부끄러워서 그렇겠지.”

명수는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정답지를 들고 있는 편이었다. 드라마 마니아답게 혜린을 마치 어느 드라마 여주인공 보듯이 평가하는 것이었다.

“니가 보고 싶어도, 다른 아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혜린이를 놀릴 거 아냐. 혜린이는 그게 부담스러운 거야. 그래서 혜린이는 몰래 미래를 다짐하는 거야. 다음에 만나자. 그리고 결혼하자.”

명수는 좋은 시청자는 될지 몰라도, 좋은 작가는 되지 못할 것이다.

방학식을 마치고, 단유와 명수는 오랜만에 하은과 함께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방학식에 레스토랑을 찾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는데, 어쩐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명수가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누나!”

주방에 있던 윤정이 명수와 단유를 반겼다. 아직은 허드렛일만 하는 윤정이었지만, 내년부터는 보조로 활동할 지도 모른다며 그 때 되면 직접 만든 요리도 선보이겠노라 약속했다.

“누나가 만든 음식, 빨리 먹고 싶어요.”

명수의 립서비스에 감동을 받은 윤정이 명수를 꼭 안아주고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스테이크 정식이지?”

명수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은이 주문하는 틈에 명수가 단유에게 물었다.

“너 이번 방학 때 뭐 할 거야?”

“나? 특별히 할 건 없지. 그냥 공부?”

명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점점 명수의 표현력이 확장되는 것을 보며 단유는 어쩐지 뿌듯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누나, 우리 이번 방학 때 특별 활동 같은 거 안해요?”

“응? 무슨 특별 활동?”

뜬금없는 명수의 제안에 하은이 돌아보자, 명수가 씩 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 재훈이 형 만났을 때, 재훈이 형이 저한테 그랬어요.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지 말하라고. 뭐든 도와주겠다고. 그래서 생각을 해봤죠.”

재훈을 만난 건 지난 여름 방학 때의 일인데, 그 때부터 생각을 했다고? 명수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할 타입은 아니라 생각하면서 되물었다.

“그래서 뭘 하려고?”

“여행이요!”

“여행?”

겨울이니까 어디 오키나와나 동남아 쪽 여행을 말하는 걸까?

“강원도요.”

“거긴 왜?”

명수가 히죽 웃었다.

“썰매 타러요.”

여태 썰매 한 번 타본 적 없던 명수였다. 겨울이면 늘 반에서 썰매나 보드 타러 간다고 자랑하던 아이들이 부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마음대로 다닐 수 없던 형편이라 속으로 삭힐 뿐이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욕심을 부려보는 명수였다.

단유는 명수를 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다. 단유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명수가 저렇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엄청나게 두근대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에 두근거림보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에 두근거림 일거라고 단유는 생각했다.

그 두려움을 감추려고 더욱 열심히 웃는 명수였다.

“그래, 가자.”

하은이 밝게 웃으면서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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