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80화 (180/956)

전승(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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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단유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하은은 잠시 공부를 줄이더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단유를 붙들었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시작된 TV시청은 쭉 이어졌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명수는 호빵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호빵은 명수 품에서 얌전하게 눈을 감고 잠이 든 것처럼 누워있었다. 처음엔 계속 거실을 뛰어다니려고 몸부림을 쳤는데, 이제는 이것도 훈련이 되어서인지 드라마 시청 시간에는 명수 품에서 얌전하게 있을 줄 알게 된 호빵이었다.

그런데 이상함을 느낀 것은 드라마가 끝날 때쯤이었다.

“어, 선생님. 호빵이 이상해요.”

평소와 같이 눈을 감고 명수의 쓰다듬을 기분 좋게 즐기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눈을 못 뜰뿐만 아니라, 콧물도 흘리고 있는데 심상치가 않았다.

“어떡해요, 선생님?”

하은 역시 개를 키워 본 경험이 없어서, 이런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 했다. 단유는 호빵을 살피다가,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프면 병원을 가야지. 하은이 박수를 치며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다 같이 가까운 동물병원을 찾아 갔다.

단유는 차 안에서 낑낑거리는 호빵을 안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명수를 달래느라, 오히려 더 힘이 빠질 정도였다.

“괜찮을 거야.”

“죽으면 어떡해?”

단유는 호빵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래도 사람이 아닌지라 어떻게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잘 모르겠네.”

“죽는 거야?”

명수는 거의 죽는다고 생각했던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죽지 마, 호빵아. 죽지 마.”

단유는 호빵을 꼭 안고는 오열하는 명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그 사이, 하은은 동물병원을 찾았고, 간신히 명수에게서 호빵을 떼어낼 수 있었다.

“열이 심하네요.”

강아지의 체온은 보통 38도에서 39도 사이인데, 사람보다 조금 높은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40도를 조금 넘는 수준이라도 강아지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수의사의 말에 다시 한 번 울음을 터뜨리는 명수였다.

다행히, 호빵은 감기라서 향후 치료와 관리만 잘 해주면 나을 수 있다고 수의사가 말했고, 그제야 겨우 울음을 그치는 명수였다.

“그런데, 상태로 보면 갑자기 아픈 건 아닌 것 같고, 그 전부터 아팠던 것 같은데 전혀 짐작하지 못했나요?”

그 말에는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수의사의 말대로라면 식욕도 많이 떨어지고, 평소와 달리 기운도 없었을 텐데 몰랐냐는 이야기였다.

“저희가 강아지를 처음 키워봐서···.”

“반려견을 키우실 때는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애들은 아파도 아프다고 말을 할 줄 모르니까요. 그리고 개에 대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도 많고요. 공부를 하셔야 겠는데요?”

의사가 미소를 지으면서 약을 처방할 때, 명수는 연신 미안하다며 호빵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이 일은 단유에게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되었다. 강아지는 아파도 아프다고 말을 하지 못했다. 강아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전혀 눈치도 채지 못했다. 자칫 하다간 같이 사는 ‘사람’들에 의해 진짜로 죽어도 모를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단유는 결심했다. 강아지에 대해 공부해보기로. 수의사만큼 깊고 자세하게 공부를 할 자신은 없지만, 이왕 개를 키워보기로 한 이상 적어도 개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은 갖춰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단유는 기억 속에서 도서관에 있던 어떤 책을 떠올렸다. 애견 교육에 대한 책이었는데, 예전에는 관심이 없어서 펼치지도 않았던 기억이 난 것이다. 그리하여 단유는 수업이 끝난 뒤, 도서관을 찾게 되었고, 마침내 기억 속의 그 책을 찾아 낸 것이다.

“이거 빌려갈게요.”

예전에는 교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없었는데, 이제는 4일간 책을 빌릴 수 있게 정책이 변경되었다. 단유로서는 반길 일이었지만 그간 도서관을 찾을 일이 없어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서비스였다.

도서관을 나와 운동장으로 갔을 때, 명수는 땀범벅인 채로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골문 앞에서 현란한 개인기로 아이를 제쳐보지만 워낙 많은 아이들이 수비를 하고 있었기에 결국 공을 놓치고 말았다. 단유는 틈을 보다가 잠시 여유로워진 사이에 명수를 불렀다.

“명수야, 가자.”

“잠시만!”

명수는 기어코 한 골을 더 넣은 뒤, 인사를 하고 운동장을 떠났다.

****

책을 읽으면서 단유는 신비롭다는 감상을 받았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습성에 대해 신비롭기도 했지만, 인간도 아닌 것에 대해 이토록 자세하고 면밀하게 관찰하고 연구하여 이런 지식을 만들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개를 자주 씻겨야 한 대. 안 그럼 병이 생긴대.”

“그래? 호빵이는 언제 씻었지?”

단유의 기억에 이 집에 온 뒤에 씻겨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왜 욕실에 애견목욕용품이 있는지, 신기해서 물었다. 하은은 귀찮다는 눈치를 보이다가 대답해 주었다.

“주영이가 놓고 간 거야.”

말하자면, 호빵이 처음 이 집에 올 때 같이 놓고 갔던 거라는데, 왜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을까? 명수가 하은을 붙잡고 조르니, 별 수 없다는 얼굴로 느릿느릿 소파에서 일어난 하은이었다.

“귀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된대요.”

단유는 책을 들고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읊어대기 시작하자, 얌전히 듣던 하은이 불렀다.

“김단유.”

“네?”

“바꿔.”

단유와 명수가 욕실에서 호빵을 붙잡고 온수를 맞춰서 물을 받은 뒤,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씻기기 시작했다. 단유가 호빵을 지나치게 세게 누르는 바람에 호빵이 낑낑거리기도 했고, 거품이 잔뜩 묻은 호빵이 몸을 터는 바람에 옷이 엉망이 되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단유와 명수는 호빵의 첫 목욕을 무사히 완료했다.

명수가 하은이 가져다 준 드라이기로 호빵을 천천히―너무 뜨겁지 않게 조심해가며―말릴 무렵, 단유는 하은에게 물었다.

“개 말고도 다른 걸 키우는 사람들도 있나요?”

“그럼. 고양이도 있고, 햄스터도 있고, 뱀도 있고.”

명수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뱀도 키울 수 있어요?”

“못할 것도 없지. 외국에는 사자를 키우는 사람도 있다더라.”

“헐. 그러면 사자한테 물리면 어떡해요?”

“그럼 죽는 거지.”

“그런데도 키워요?”

“물론 사자가 함부로 물지 않도록 교육을 시키겠지. 조심도 하고 말이야.”

단유는 호빵을 바라보다가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드라이기로 말리던 중에 날린 털이 거실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어쩐지 코가 간지럽더라니.

“왜? 다른 것도 키우고 싶어?”

하은이 단유에게 묻자, 단유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요. 그냥 왜 개나 다른 동물을 키우는 걸까, 궁금해서요.”

“귀여우니까 키우지.”

명수가 대답했다. 그러나 단유는 괜히 심각한 얼굴로 명수의 말에 반박했다.

“당장 이 책을 봐도, 개를 키우기 위해서 조심해야 할 것도 많고, 지켜야 할 것도 많아. 또 지난번처럼 개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야 하고. 솔직히 너무 할 일이 많아. 굳이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동물을 데려다 키운다는 건 솔직히 무리인 것 같아.”

하은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단유의 이런 반응도 개를 키운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맞아. 개든 고양이든 반려동물을 키우는 데는 많은 수고와 책임이 뒤따르지. 그걸 감수하고 키우기 때문에 ‘반려’라고 지칭하는 거고. 특히 얘네들은 사람처럼 의사표현을 못하잖아? 언제 배가 고프고, 언제 졸린 지, 언제 심심하고 언제 아픈지를 말로 표현하지를 못해.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계속 신경을 써줘야 하지. 그리고 항상 평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그게 바로 책임이야. 명수, 너는 그런 책임감을 갖고 호빵을 길러야 하는 거야. 알겠니?”

“만약 그런 책임감이 없으면요?”

“그럼 개가 죽겠지?”

“저 책임감 있어요. 호빵이 잘 키울 수 있어요.”

호빵을 안아들고 소파 위로 올라온 명수였다. 단유는 두 사람과 동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하은에게 다시 질문했다.

“선생님도 그런 책임감 때문에 저희랑 함께 있는 건가요?”

하은은 얼굴을 붉히다 단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직구다, 너. 그리고 너흰 이 개랑 다르지. 말도 할 줄 알고, 스스로 청소도 할 줄 알잖아?”

“하지만 저희는 아직 어리잖아요.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어요.”

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서 너희들에게 보호자가 필요한 거지. 물론 내가 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유는 하은과 명수를 바라보며 책임감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렇게 생각하다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나는 책임감이 있을까?’

아직 무언가를 책임져 본적이 없던 단유였다. 작년에 반장을 할 때도 ‘책임감’이라는 말을 별로 사용해 본 적도 없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다’ 혹은 ‘말에 책임을 지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실제로 단유가 책임을 졌던 일은 별로 없었다.

“책임은 의무인가요?”

단유가 물음을 던지니, 하은이 턱을 괴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쎄, 잘 모르겠네?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단유와 명수를 돌봄에 있어, 책임감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게 의무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의무라면 법적 보호자인 재훈에게 의무가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단유 넌, 꼭 이런 철학적인 문제를 던져놓더라? 사람 난감하게.”

하은이 투덜거리자, 단유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

그날 밤, 단유는 꿈속에서 위대한 마법사가 된 자신을 보았다. 현란한 마법을 부리면서 하늘을 날아다니고, 땅을 헤집었다. 달려오는 스크로파를 회오리로 날려버리고, 자신을 고문하려고 달려오는 범죄자들 앞에 불기둥을 세워서 접근을 막아버렸다. 녹스 성의 사람들이 모두 성벽에 올라서서 하늘을 나는 단유를 바라보았고, 단유는 그들을 위해 불꽃놀이를 선보였다.

그 때, 아래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바라보니 핀체노였다.

“핀체노! 오랜만이네요?”

핀체노가 말했다.

“왜 거기서 마법을 쓰는 거야?”

단유가 대답했다.

“왜요? 쓰면 안 되나요?”

“안 돼.”

“왜요?”

“안 돼. 마법은 함부로 쓰면 안 돼.”

“왜요?”

핀체노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서쪽 산으로 걸어갔다.

“핀체노! 가지 마세요. 마법 안 쓸게요.”

핀체노는 느리게 걷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새 벌판 끝에 다다랐다. 단유는 핀체노 앞으로 이동했다. 두 팔을 벌려 막자 핀체노가 한숨을 쉬었다.

“마법을 함부로 쓰면 안 돼.”

“괜찮아요. 어차피 전 마법을 쓰지 못해요.”

“마법을 쓸 때는 책임을 져야 돼.”

“책임이요?”

“그래, 마법을 쓸 때는 책임을 질 각오로 써야 돼. 그런데 봐라. 저 사람들이 전부 니가 마법을 쓴 걸 봤어. 이제 어떻게 책임질래?”

“제가 뭘 책임져야 하죠?”

핀체노가 단유를 피해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단유가 다시 핀체노 앞으로 이동하려는데, 마법이 사용되지 않았다.

“어?”

단유의 눈앞에 보이는 장소로는 얼마든지 몸을 전이(轉移)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되지 않았다.

“핀체노! 마법이 안 돼요.”

“니가 책임을 지지 않아서 그래.”

단유가 비명을 지르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 책임질 일은 하지 않았어요.”

“책임을 져. 그렇지 않으면 아예 마법을 쓰지 마.”

“안 돼요! 전 마법사가 돼야 해요. 강해져야 돼요.”

“그럼 책임을 져.”

핀체노가 고개를 돌려 단유를 바라보았다. 핀체노의 슬픈 눈빛이 보였다. 언젠가 한 번 보았던 눈빛이었다.

“책임을 질 수 없다면, 나처럼 될 거야.”

단유가 목이 찢어져라 핀체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핀체노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숲 속에 어둠이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단유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창밖으로 푸르스름함 하늘이 보였다. 해가 뜨지 않은 하늘에 붓을 흘려 그린 듯한 구름이 보였다. 그 사이로 점점이 박혀 빛나는 새벽별빛이 단유의 눈 속에 박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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