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효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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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후, 재림은 전학을 갔다. 가기 전 단유를 찾아와 말했다.
“고마워. 앞으로는 너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어.”
단유는 재림을 빤히 바라보다가 악수를 청했다.
“너처럼 극적으로 변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 것 같다.”
3월 초, 이유 없이 시비 걸던 재림이 한 달 사이에 명수처럼 변해버렸다. 명수처럼 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명수처럼 머릿속을 비워버렸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비운 만큼 채우면 되겠지.”
“응?”
단유가 고개를 절레 젓고는 당부 한마디를 남겼다.
“그리고 담배 끊어.”
“···그래.”
단유는 재림의 손을 위아래로 한 번 흔들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중에 보자.”
“···그래.”
재림은 그렇게 학교를 떠났다.
재림만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지욱을 비롯해 다른 아이들도 전학이 결정되었다. 학폭위의 결정은 아니었지만, 교내에 퍼진 소문이 파다했던 탓에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선생님이 쉬쉬했던 사건이지만, 재림이 마지막 조사에서 자신이 기억하는 바를 모두 이야기하면서 전말이 드러났고, 게다가 단유도 재림을 도우면서 일이 커졌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전 별로 없고요, 대신 명수가 먹고 싶은 게 많을 테니까 명수 먹고 싶은 걸로 먹을게요.”
“넌 뭐 먹고 싶은데?”
뒷좌석에 앉아 있던 명수가 외쳤다.
“스네이크요!”
“스테이크.”
단유가 바르게 정정해주자, 운전 중이던 선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가자. 나도 시말서 쓰고 기분 좀 꿀꿀했는데, 고기 좀 썰어 볼까?”
재림이 ‘진실’을 고백할 때, 단유는 재림의 진실이 진짜 진실이 되도록 도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자신이 재림에게 저질렀던(?) 일도 있으니, 이번 일로 되갚는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단유는 인평일보의 사회부기자인 선혜에게 연락을 했다.
교내에서 벌어지던 일이어서 조용히 묻힐 뻔 했던 이 사건은 선혜가 「공교육의 현실―인평초등학교 ‘일진회’ 폭력사건 발생」 이란 자극적인 타이틀로 기사를 내면서 지역사회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애초에 ‘일진회’라는 이름의 조직이 아니었던 바, 해당 학생들의 학부모들과 학교로부터 항의를 받았지만, 그 외에 내용에서 크게 왜곡하거나 과장되게 보도한 면은 없었기에 시말서를 쓰는 정도로 해서 마무리되었다.
대신 학교폭력에 대한 심도 깊은 기획기사로 이어나가면서 선혜는 또 한 번 공을 세울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보답하는 의미로 단유와 명수를 데리고 외식에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과외선생님이란 분은 같이 안 가도 되려나?”
“괜찮아요. 우리 선생님이 요즘 다이어트 한다고 했어요. 집에서 빈둥빈둥 노니까 살찐다고 그랬어요. 어제부터.”
“다이어트?”
“네. 그래서 우리 선생님이요, 아침에도 밥을 반만 먹고요···.”
명수가 해맑게 웃으면서 하은의 다이어트 전략을 상세하게 밝히기 시작했고, 단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대화에는 끼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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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변호사는 헛기침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설명을 했다.
“더 이상은 민사를 이어나가봐야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성재림이란 학생도 전학을 가버렸고, 여론도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드님의 죄를 증언할 증인들이 추가된 상황입니다.”
언론사 제보 및 검찰 제보로 형사사건이 진행 중이기에 민사는 의미가 없었다.
“그럼 억울하게 당한 우리 아들은 어쩌라고요?”
지욱의 어머니가 변호사 멱살을 잡을 기세로 으르렁거렸지만, 변호사에게는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억울’이라니.
“재림이 쪽도 손해배상소송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니, 더 이상 민사를 이어나갈 필요는 없다고 보입니다. 현 상황에서는 승소가 어려우니 까요.”
변호사라는 사람이 저런 식으로 이야기해도 되는 거야? 지욱 어머니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지만 변호사는 태연한 표정으로 사건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게 조언을 해 주었다.
“그래도 뭐, 죄질이 무겁지는 않으니까 아마도 가정법원 보호처분 정도로 마무리될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이야기가 커지지 않게 이쯤에서 마무리하시는 것이 그 쪽 아드님에게 좋을 것 같네요.”
말하는 모양새가 뻔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 돈 몇 푼 쥐어주면 아들의 무죄는 물론이고, 무고죄를 통한 민사도 이길 수 있게 되면 줬던 돈도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쪽 집이 법이나 이런 데 무지한 면이 많아 보여서 쉽게 생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제 불찰이지요. 하지만 그보다 아드님과 아드님 친구 분들이 이곳저곳에 흔적을 너무 많이 남겨두었어요. 이런 상황이니 저로서도 역부족이지요.”
똥개가 돌아다니면서 오줌을 갈기는 꼴, 이라고 비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변호사는 최대한 예의를 지켰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변호사가 옷을 한 번 정리한 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부들부들 떠는 지욱 어머니를 남겨두고 변호사는 등을 돌려, 카페 문을 열고 나섰다. 오늘따라 유난히 화창한 햇살에 변호사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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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이 가까워질 무렵이 되니 학기 초의 소란은 거의 잦아 들어서, 아이들은 거의 잊었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피해를 당했던 아이들도 이제는 기억 속에 깊숙이 묻은 채로 떠올리지 않아도 될 만큼, 흔적은 사라졌고 언제나와 같이 평온한 학교생활이 이어졌다.
학교폭력신고센터는 또 하나의 성과를 기록하면서 학교폭력을 해결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고, 센터장은 초동수사부터 사건해결에 이르기까지의 깔끔한 내용정리에 상부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인평초등학교에는 학교폭력전담교사가 ‘예산 부족’으로 인해 배치되지 못했고, 그러나 학교장이나 여타 선생님들은 그 사실에 대해 크게 불편함을 인지하지 못했다. 학부모들 역시 관계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그 사실을 일부러 지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런 사고가 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었기 때문이었다.
“학원가기 바쁜 아이들이 그런 사고를 저지를 틈이 어디 있어요?”
“우리 아이는 착해서 그런 일에 말려들 일이 없어요.”
“오히려 시간이 한가하니까 더 유혹에 빠지기 쉬운 거죠.”
마지막 학부모의 발언은 학부모회에서 많은 공감을 얻었고, 방과후 수업을 강화하는 방안을 학교에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대신, 자율성도 보장해줘야 돼요. 우리 아이는 학원 시간이 애매해서 수업 끝나자마자 가야 되거든요.”
“저희 아이들도요.”
학원에 다닐 여력이 되는 아이들은 빠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반 강제로라도 방과 후 수업에 참여토록 하자는 것.
“예산이···.”
학교의 응석은 학부모회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방과후학교가 뭐예요? 사교육비 경감과 교육격차 해소, 돌봄 기능 확대 등의 목적으로 학교 본연의 기능을 보완하고 확대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제도 아닌가요? 그렇다면 학교가 좀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못할망정, 예산 핑계를 대다니요! 교육청 지원센터에 저희가 대신 문의라도 해드려야 하나요?”
교감은 양해를 부탁하며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했다. 어떤 학교는 학교시설이용료 조로 수용비라는 걸 받는다고 했다. 방과후 교사들은 학교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세후 월급액의 10% 이내에서 거둔다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예산 절감책이 될 수도 있겠다.
‘위탁업체랑 적당히 합의 보는 것도 방법일 테고.’
사실 방법이야 찾으면 나온다. 원래 그런 법이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찾으라고 시킬 사람도 많이 있다. 교사들이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관리직을 꿈꾸는 교사들이라면 이런 일 저런 일 해봐야 하는 법이다.
‘3학년 주임 선생님이 이런 걸 잘하던가?’
머릿속으로는 적당한 사람을 물색하면서, 겉으로는 학부모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표정으로 간간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식으로 학교는 조금씩 변해갔다. 어느 쪽으로 나아가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학교는 학생들 위주로 변해갔다. 당장 올해만 해도 아이들은 더 이상 기말시험을 보지 않게 되었다. 지난 해 말의 일―상훈이 시험 스트레스로 쓰러진 일―이 학부모회에서 크게 거론되면서, 올해부터 전 학년 기말시험이 사라진 것이었다.
아이들은 여름방학이 다가오는 이 시간을 온전히 즐겼고, 부모님들은 더더욱 아이들을 학원에 열심히 보냈다. 학교에서 성적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학원에서라도 평가를 받아서 아이들이 잘 성장(?)하게끔 지도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흐름과 전혀 관계없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대체로 소외계층의 아이들이었고, 또 단유와 명수가 그랬다.
“석고야, 오랜만에 같이 한 게임 콜?”
단유는 부드러운 어조로 명수의 제안을 사양했다.
“너 아침마다 운동하잖아? 그거 어디 써먹으려고 그래? 이럴 때 공 한 번 빡! 차고, 빡! 한 번 골 넣고, 빡! 패스 해주고, 응?”
손날로 공중을 휙휙 휘젓는 명수를 보며 다시 한 번 부드러운 어조로 사양했다. 명수는 단유를 흘겨보다 제 풀에 지쳐 고개를 돌렸다.
“그럼 갈 때 불러. 그 때까지 놀고 있을게.”
그리고 명수는 운동장으로 뛰어갔다. 운동장에서는 이미 40명가량의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있었다. 굳이 단유가 끼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아이들로 붐비는 운동장이었다.
“어머, 오랜만이네?”
사서 선생님이 단유를 보며 인사했다. 확실히 5학년 들어서면서부터는 도서관에 오는 일이 줄어들었다. 집에도 읽을 책이 많이 구비된 데다가, 학교도서관에서 단유가 읽을 만한 수준의 책은 찾기 힘들어진 탓이었다.
“안녕하세요.”
단유는 꾸벅 인사를 한 뒤, 책장이 즐비하게 늘어선 틈으로 얼른 들어갔다. 사서 선생님도 하은 만큼이나 말이 많아서, 한 번 붙들리면 쉽게 몸을 빼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하은과 달리, 사서 선생님은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듯해서 듣고 있기가 불편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은 미처 몸을 감추기도 전에 단유를 불렀다.
“요즘 시험이 없어져서 많이 아쉽지 않니? 그래도 지금까지 니가 계속 1등을 했었잖아? 내가 여기 있어도 니 소문을 워낙 많이 들어서 말이야. 그 정도는 잘 알거든? 그런데 올해부터 시험이 없어져서 어떡하니? 솔직히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야 시험이 없어져서 좋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너처럼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시험을 통해서 자신의 실력을 평가받고 점검할 수 있는 거잖니? 너같이 공부 잘하는 애들이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리도 없고 말이야. 사실 너한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참 안타까운 현실이야. 아이들이 좀 더 학교 교육을 믿고 따를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학생들한테 끌려 다니다 보니까 너 같은 아이들이 괜히 피해를 보잖아? 안 그러니?”
“아닌데요.”
“응?”
단유의 재빠른 대답에 선생님은 이어가려던 말을 하지 못하고 단유를 쳐다보았다.
“시험이 없어졌다고 해서 제가 피해를 보는 건 아니라고요. 그리고 시험제도가 학생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지만, 그게 항상 옳은 건 아니고요, 오히려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학습하고 생각할 수 있는 틀을 제한한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나쁘다고 생각하거든요. 차라리 지금처럼 수행평가나 논술평가가 학업수준을 평가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어쩜, 역시 똑똑한 아이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논술도 점수 잘 받겠어.”
사서선생님이 어정쩡한 태도로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단유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제가 똑똑한 게 아니고요, 알림장에 나온 내용이에요. 교육청에서 이런 취지로 일제평가를 없애겠다고 알려준 걸 읊은 건데요. 다만 제가 그 취지에 동감한다는 이야기를 드리려고 했던 거고요. 선생님도 공문 받아보시지 않으셨어요?”
선생님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지켜보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단유는 그제야 책장으로 향했다. 선생님은 데스크 위에 놓인 한지 접부채를 집어 들었다.
“여름이라 그런가, 덥네.”
사서선생님이 괜히 땀을 식히려고 부채질하는 동안, 단유는 제일 윗 칸부터 차근차근 제목을 확인하며 책을 찾기 시작했다.
“아, 여기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