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효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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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은 단유의 방에서 서성거리고 있다가, 단유가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 앉아. 편하게 있어도 돼.”
침대를 가리키던 단유는 책상에 앉아 앞에 놓여있던 책꽂이에서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편하게 있으라지만, 결코 편할 수 없는 처지의 재림은 침대 끄트머리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오늘도 9시까지 있다가 갈 거야?”
재림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재림이 느끼는 두려움을 100%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저토록 두려워하면서 계속 피하려 한다면 단유로서도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피하고 다닐 수 있을지 끝을 알 수 없는데다가, 그 동안에 단유가 뺐기는 개인적인 시간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유는 특단의 조치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지, 재림을 돕기 위해서라거나, 오지랖을 부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단유는 의자를 돌려 재림을 보았다.
“재림아.”
“응?”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거야?”
재림은 시무룩한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자신이 매일 이 집으로 도망치듯 오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라 생각했다. 사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두 사람인데, 재림이 단유에게 빌붙다시피 해서 오는 것이었으니까.
“차라리 이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어때?”
“응?”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재림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자, 단유가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어차피 거짓말이지만 여기서 공부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진짜로 공부를 해. 그게 지금 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5시부터 6시까지 선생님이랑 공부해야 하니까, 그 전까지는 니가 선생님한테 배워. 그 후에는 자습을 하든지 알아서 하고.”
“진짜··· 과외를 받으라고?”
“그래. 대신 거실에 나가서 해. 이 방은 내가 써야 하니까.”
단유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문제가 단유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재림 때문이었으니까. 재림이 이 집에 오는 것이야 굳이 말릴 이유도 없었고,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재림이 단유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충분히 신경 쓰이고 귀찮고 방해되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방에서 내보내면 된다.
선생님과 둘이서 거실에 있는 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단유의 방에서 멍이나 때리고 있던 재림이었으니, 차라리 거짓말로 시작한 거라도 진짜 과외를 받는다면 단유도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단, 이러한 해결책에 또 다른 문제가 있으니.
“내가? 왜?”
라고 묻는 하은이었다.
“선생님이시잖아요.”
단유의 말에 하은이 발끈했다.
“아니, 애초에 선생님이라고 불리긴 해도, 진짜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도 아니고. 고작 방학동안 니 과외나 해주던 건데 왜 갑자기 ‘선생님’이냐고?”
“명수도 가르쳐 주시잖아요?”
“명수는, 내가 이 집에서 보호자로 있으면서 겸사겸사 가르치는 거지, 제대로 과외를 맡은 건 아니잖아?”
단유가 재림을 가리켰다.
“얘도 겸사겸사 가르쳐 주시면 돼요.”
“그건 아니지!”
격앙된 하은을 바라보던 단유는 적당히 만족할 만한 회유책을 내놓았다.
“재림이도 오래 있을 건 아니니까요, 수사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만 가르쳐 주시면 돼요.”
“수사가 언제 끝나는데?”
“그건 모르죠.”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그 때까지 나도 원하지 않고, 얘도 원하지 않는 과외를 하라고? 내가 왜?”
“선생님이시니까요.”
하은이 가슴을 퍽퍽 두드리면서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
“평소에는 그리 영특한 놈이 왜 갑자기 멍청한 척을 하는거야? 니 속셈이 뭐야? 응?”
별로 속셈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 구석이 찔리는 느낌이 없지는 않았다. 단유는 포커페이스로 대답했다.
“재림이가 시간을 낭비하지 말았으면 해서요.”
재림이 낭비하는 시간과 자신이 방해받는 시간이 동일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이기적이라고 지적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왜 재림이가 원하지 않을 거라고 단정하세요? 재림아, 너 공부하고 싶지?”
재림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
하은이 벌떡 일어나 재림을 손가락질하면서 방방 뛰었다.
“이것 봐, 딱 걸렸어! 들었지? 얘가 방금 ‘하고 싶어’도 아니고 ‘할 게’ 라고 했지? 니들 아까 방에 있을 때 짰지? 짰어. 짠 거야, 분명히. 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그치? 김단유! 네 속셈이 뭐야?”
“그런 거 없어요. 짜지도 않았고요.”
실은 방에서 먼저 이야기했고, 재림의 승낙을 받았다.
“와, 얘네들 뻔히 다 보이는데도 우기는 것 좀 봐. 김단유, 너 선생님이 거실에서 좀 쉬는 게 그리 맘에 들지 않았어? 그래서 괴롭히고 싶어서 그래? 응?”
단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는 그냥 둘만 남겨두고 끝장을 보게 해야지, 자신이 곁에 있으면 흥분한 하은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계속 억지를 부리면서 수다를 떨 게 분명해 보였다. 대신 조언(?)을 한 마디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명수랑 같이 가르치면 될 거예요.”
하은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나 이후, 명수와 재림을 같이 가르쳐 본 결과, 단유가 남긴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도긴개긴이구나.”
난이도 조정을 할 것도 없고, 따로 문제집을 구할 필요도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명수의 과외 시간에 숟가락만 하나 더 얹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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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우리 아들이 무슨 폭력배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시네?”
마주앉은 경찰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마주 앉은 학부모를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우리 아들은 성격이 여려서 누구 때리고 그럴 애가 아니에요. 어디 이상한 애가 장난으로 신고했는지는 몰라도, 이건 거짓말이에요. 조작이라고요!”
아들을 변호하는 어머니의 모성애가 분노와 결합되니 조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우리 애는 거짓말도 못하고 얼마나 착실하게 학교생활 하는 애인지 몰라서 그래요? 담임선생님한테 물어봐요, 뭐라 하는지!”
대질심문을 요구하는 어머니도 계셨고.
“나, 참. 기가 막혀서.”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죽어라 노려보는 핏발 선 눈길에 고개를 들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이보세요, 말이라고 아무 말이나 막 하면 되는 줄 알아요! 우리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예상했던 대로 가해자로 지정된 아이들의 학부모들은 펄쩍 뛰면서 경찰과 상담사를 향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해외 유명 메이커의 옷으로 치장하고 나타난 지욱의 어머니를 필두로 해서 여러 어머니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재림을 성토했다.
“그 아이를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들어보니까, 애가 공부도 못하고 학교생활에 적응도 못했다고 하던데?”
“걔네 엄마는 무슨 식당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빠도 일용직 비슷한 것 같고. 집안의 부모들이 애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애가 삐뚤어지다 못해 모함까지 하고 나선 거 아니냐고요?”
“제가 듣기로는 길에서 담배도 피고 다닌다고 하던데, 그런 애들 무리에 우리 애가 낄 리가 없다고요.”
“우리 애도요. 진짜 요즘 초등학생들 무섭다는 이야기만 전해듣다가 직접 당하니까 어이가 없네요.”
경찰은 어머니들을 진정시키면서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항변해보지만, 성난 어머니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경찰서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무리를 지어 나타난 가해자 부모들은 도대체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켜주진 못할망정, 아이들이 모함에 당하도록 내버려두었냐는 항의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일단 진정들 하시고, 수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시면 안될까요? 수사가 끝나면 모든 게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것이고, 억울한 아이들의 누명도 자연히 벗겨질 테니까···.”
“아니, 그럼 그게 끝날 때까지 우리 아이가 억울하게 손가락질 받는 건 어떻게 보상받으라는 이야기죠? 우리 아이가 지금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요!”
“무고죄로 고소할거예요!”
선생님들은 진땀을 흘리면서 학부모들의 분노를 받아주었다. 부디 이 사건이 빨리 종결되어서 어느 쪽으로든 답이 나오길 속으로 기도하며.
그런데 어떤 범죄든 범인들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고 했던가? 아이들의 아지트로 지목된 놀이터 인근의 아파트에서 목격자가 나왔다.
“맨날 아이들이 와서 담배를 피워대는데, 몇 번 경고를 해도 들은 척 만 척이더라고요. 아, 예. 이 얼굴 맞아요. 한 번은 이 녀석이 저한테 모래를 집어던지고 도망간 적이 있어서 기억을 해요.”
지목된 아이는 바로 병석이었다. 병석이는 5학년 1반에서 저지른 행동도 있고, 그 행동을 목격한 많은 아이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주범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이터 인근에서 흡연과 폭력을 행사했다는 주변 거주자들의 목격증언까지 확보된 상황이 된 것이었다. 경찰은 병석을 추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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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소년의 진술에 따라 아드님의 행적을 조사한 결과, 일치하는 면도 있고 또 본인의 일부 자술도 있었습니다.”
다만 문제는 아이들이 피해자를 때렸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아이들은 모두 놀이터에서 모인 것은 인정했으나, 때리지는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병석이만 주먹을 썼다는 것이다.
가해자 학부모들은 태도를 분명히 했다.
“이번 사태의 주범은 김병석이라는 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와 우리 아이들이 어울려 놀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결코 주먹을 쓰거나 해코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폭력 사건에 있어서 우리 아이들은 죄가 없습니다.”
말인즉슨 병석이라는 아이가 워낙 싸움을 잘하는 아이여서 마음 약한 아이들이 어울려 주었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 아이도 피해자입니다, 라는 것으로 변호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욱 어머니는 과감하게 변호사를 고용하고 민사재판에 돌입했다. 재림에게 무고죄를 묻기로 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죠?”
재림의 어머니가 선생님을 찾아왔다. 미간을 찌푸린 선생님도 딱히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변호사도 아니어서 법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교사라는 포지션에서 어머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다.
“그냥 상식적인 수준에서 말씀드리자면, 아마도 재림이가 유죄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재판이 끝나지도 않을 것 같고요. 아마, 어쩌면 꽤 오래 싸울 수도 있어요.”
이미 상대 쪽 아이들은 모두 입을 맞춘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짐작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확실한 증거나 신빙성 높은 증인이 나온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재림의 어머니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젯밤에도 아버지는 소주 한 병을 마시면서 재림을 노려보았고, 그런 긴장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한 편으로는 피해자였다는 재림이 불쌍하고, 또 한 편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학교생활을 했기에 이런 문제를 만들어내는지 속상하기도 했다.
게다가 오늘도 재림의 문제로 학교에 오는 바람에 식당주인에게 얼마나 많은 눈치를 받아야만 했던가. 그런 와중에 집에서는 큰 애한테 지장이 갈까봐 큰 소리도 못 내고 쉬쉬했다. 하지만 소주 나발을 부는 아버지 때문에라도 눈치를 챘을 것만 같았다.
평화로운 집 안에 위기를 자초한 아들이 밉고 불쌍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어머니.”
“네.”
“혹시 원하신다면 상대측과 원만한 합의를 보는 방법도 고려해보시라고요.”
“합의요?”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할 경우, 민사소송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재림이 피고소인 측이 되어서 방어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맞고소를 하거나 병석이란 아이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방법도 있습니다, 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일단, 법률 자문을 구하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제 입장 상 어머니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드리기가 어려워서요.”
끝내 입을 달싹이다가 닫기로 결심한 선생님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조언을 했다. 원래 오늘 상담은 재림이 ‘전학’을 원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이야기할 참이었는데, 다른 어머니들에 비해 유난히 깊은 주름을 가진 재림 어머니의 얼굴을 보다보니 엉뚱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어머니를 배웅한 선생님은 책상에 앉아서 교실을 보았다. 5시가 넘어가는 이 시간, 텅 빈 교실에 온기가 줄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