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73화 (173/956)

Faith(5)

-------------- 173/952 --------------

6학년이 교실에 들어오니 동장군이 급습하기라도 한 것처럼 교실안의 온도가 내려갔다. 아이들은 옷깃을 여미는 대신 입을 다물었고, 동장군이 언제가나 두려운 눈치로 더벅머리를 바라보았다.

“겁대가리 없게 형들 쌩까고 가더니, 형이 부르는데 대답도 안하네?”

재림의 작은 입술이 달싹거리는 듯 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벅머리가 피식 웃으며 재림의 머리를 내려치자, 찰진 소리가 나면서 재림의 머리가 엉클어졌다.

“오늘 점심 때, 별관 뒤로 와라.”

더벅머리가 재림의 머리채를 쥐고 좌우로 흔들면서 겁을 준 뒤, 교실을 쭉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칠까 두려웠던 아이들이 서둘러 시선을 내리깔 때, 재림의 바로 옆 분단에 있던 단유는 더벅머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뭘 봐, 새끼야.”

단유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 보는데요.”

“뭐?”

단유의 말에 더벅머리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눈 뜬 심봉사마냥 놀랐던 것은 재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겁도 없이···.’

저 더벅머리로 말할 것 같으면, 인평초등학교에서 주먹질은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강했고, 성격도 더러워서 중학생 형들한테도 시비를 걸 정도라는 소문이 자자한 아이였다.

선생님도 포기했을 정도로 막나간다는 더벅머리에게 단유가 막말을 내뱉은 것은, 분명 단유가 뭘 몰라서 한 행동일 것이다.

“다시 말해봐라.”

으르렁거리는 더벅머리에게 단유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너 본다고요.”

“이 새끼가.”

터벅터벅 걸어간 더벅머리는 경고도 없이, 단유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앉아있던 단유가 그대로 주먹에 맞고 뻗을 것을 예상한 여자 아이들 몇몇이 빽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쉽게도(?) 더벅머리의 주먹은 단유가 잠깐 머리를 뒤로 피한 사이에 허공을 헛치며 지나갔다. 너무 힘을 줬던 걸까, 더벅머리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려는데, 단유가 친절하게 의자를 뒤로 밀어 넘어질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쿠다당.

넘어지지 않기 위해 손을 짚는다는 게 하필 책상 가장자리를 짚으면서, 책상과 함께 바닥으로 넘어진 더벅머리였다. 넘어지자마자 벌떡 일어난 더벅머리는 얼굴이 너무 새빨갛게 변해서 사람의 얼굴이 아닌 것 같이 보일 정도였다.

사실 얼굴만 그런 게 아니라, 머릿속도 이미 이성이란 게 사라진 상태였다.

“개새끼가!”

의자에 앉은 채로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단유를 향해, 앞발을 내지르는 더벅머리였다.

하지만 단유는 더 이상 이유 없는 폭력에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단유는 날아오는 발을 잡았다. 그리고 만세를 부르듯 위로 추켜올렸다. 날아오는 발의 힘을 맨 손으로 감당한 것은 그간 꾸준히 해왔던 맨손 운동의 효과였지만, 아이들은 알지 못했다. 아이들의 눈에는 전광석화처럼 빠른 발을 잡아챈 후, 들어 올리는 동작으로 인해 더벅머리가 제 때 발을 빼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는 모습뿐이었다.

그 동안 한 싸움 한다고 생각했던 재림만이 단유의 놀라운 기술을 알아보았다. 일단 날아오는 발을 두 손으로 잡는다는 발상 자체가 놀라웠다.

‘여태 얌전히 책만 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싸움의 고수?’

하지만 사실 방금 그 동작이 어젯밤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보여주었던 동작이란 사실을 알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다만 드라마에서 엑스트라가 이 반격으로 인해 바닥에 넘어지면서 일어서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현실에서 더벅머리는 넘어지지 마자 금방 몸을 굴려서 일어났다.

하지만 더벅머리는 쉽게 단유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지금까지 당한 것도 개망신인데, 다시 덤벼들었다가 또 당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고, 두 번째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선생님 때문이었다.

“야, 너 뭐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할 틈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도망가는 더벅머리였다.

“무슨 일이야?”

순진한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서로의 목격담을 선생님께 알려 순식간에 교실은 경매장처럼 변해버렸다. 중매인이 된 선생님이 아이들 하나하나를 진정시켜 가면서 상황을 파악하더니 이내 경매가 종료되었고, 매물 중 하나였던 재림은 다시 선생님께 불려갔다.

“김단유, 너도 나와.”

두 사람은 나란히 선생님 앞에 섰다.

“김단유, 선생님이 교실에서 폭력을 쓰면 된다고 했어, 안했어?”

“안된다고 하셨어요.”

“아는 애가 싸움을 해?”

“전 안 싸웠는데요.”

“뭐? 그럼 다른 애들이 전부 거짓말을 한 거야?”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저도 싸우진 않았어요.”

“그럼 뭘 한 건데?”

“정당방위요.”

선생님은 잠시 말문이 막혀 채근할 생각도 못했다. 과연 ‘소문의 단유’는 이렇구나, 라는 걸 새삼 느끼면서 선생님은 다시 추궁했다.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는 것도 니 생각일 뿐이잖아? 다른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게다가 선생님이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폭력을 반대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너처럼 이런 이유, 저런 이유 갖다 대면서 주먹질을 하다보면 결국 어떤 폭력은 미화될 수밖에 없고, 힘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도 용인될 수 있기 때문이란 걸 몰라?”

단유는 침착하게 반박했다.

“선생님의 말씀은 이해하지만, 너무 논리적 비약이 심하신 것 같네요.”

“뭐?”

“우선 첫 번째로 폭력을 미화하는 게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라는 논리는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용인되지 않는다면, 폭력이 없어지나요? 아니면 폭력이 미화되지 않나요? 폭력이 미화되거나 말거나 싸움은 언제나 벌어질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요? 왜냐하면 싸움이나 폭력의 발생의 원인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만은 아니니까요. 때로는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에게 싸움을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싸움은 힘의 강약에서 오는 게 아니라,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선생님은 해를 바라보는 드라큘라의 모습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별다른 감정 기복 없이, 마치 뉴스 속 앵커처럼 선생님의 시선과 마주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또, 실제 폭력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선생님의 폭력 미화론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폭력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순간에는 폭력이 죄가 되든 미화가 되든 당사자들에게는 단순한 폭력이거든요. 여기서 당사자는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과 폭력에 당하는 사람이고요. 주먹질 하는 사람 앞에서 폭력은 미화될 수 없다고 항변해봐야, 의미가 없잖아요. 결국 맞을 뿐이죠. 또 폭력을 쓰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폭력은 미화되어선 안 된다고 스스로 설득할 리도 없고요. 결국 폭력이 휘둘러지는 상황에서 피해자는 타인이 도와주지 않는 이상, 자력구제를 해야만 되죠. 그런데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반 친구가 다른 사람에게 맞더라도 절대 개입하지 말라는 거잖아요. 설령 다른 어른의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그 시간동안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에게는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실 건가요?”

숱하게 들어왔지만, ‘소문의 단유’는 역시나였다. 선생님을 비롯해서 아이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지만, 이런 상황이 꽤나 익숙(?)했던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맺었다.

“게다가 제가 싸우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는, 전 주먹을 쓰진 않았거든요. 그냥 막거나 피했을 뿐이죠.”

깔끔한 마무리. 어지간하면 선생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고 한 번 호통이라도 쳐보겠지만, 선생님은 마치 거품이 되기 전의 인어공주처럼 말문이 막혀 단유를 다그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오직 재림만이 화끈거리는 기운을 느끼면서 진땀을 흘릴 뿐이었다.

단유가 덤덤히 바라보다가 재림을 흘깃 쳐다보았다. 이마에 굵은 땀이 흐르는 것을 본 단유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참, 아까 그 형이 재림이한테 점심시간에 별관 뒤로 나오라고 했어요.”

“뭐, 그게 정말이니?”

재림은 뭐라고 말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이 사실이 선생님 귀에 들어갔으니, 이후 편치 않은 학교생활이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 형들은 선생님 눈치 때문에 다른 이들을 괴롭히지 않을 사람들은 아니었으니까.

“그건··· 선생님이 알아서 할 테니까, 일단 알겠어. 둘 다 들어가. 그리고 단유.”

“네.”

“이번에는···상대가 6학년이었으니까 봐주는 거지만, 그래도 절대 교실에서는 폭력은 안 돼. 그건 이 교실의 법이야.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건, 동의하지?”

“네. 알겠습니다.”

단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박수라도 치려다가 선생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여, 괜히 숙연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여러분들도 잘 들어요. 단유가 한 말이 옳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만약 교실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그건 말려야 할 일이지 같이 끼어 들어서 주먹질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만약 결국 또 다른 폭력을 낳는 일이예요. 다른 사람을 때려서도 안 되지만, 맞는 걸 지켜보는 것도 나쁜 일이에요. 그리고 만약 말릴 수 없는 싸움이 난다면, 그 때는 빨리 선생님을 불러야 해요. 그것 때문에 선생님이 계속 교실에 있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네.”

짧은 소란이 끝났다. 하지만 선생님은 어쩐지 속이 뒤숭숭하여 찝찝했다. 하지만 이유는 알지 못했다.

‘눈빛 때문이었을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겠지만, 선생님은 보았다. 아니 본 것 같았다. 단유의 덤덤한 표정과 달리 그 아이의 눈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던 기운을. 마치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차가운 칼날 같던 눈빛을.

그러나 그 눈빛이 12살 아이에게서 볼 법한 것은 아닌지라, 그저 착각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여튼 신기한 아이야.’

말빨에 휘둘려서 얼이 잠시 빠졌던 모양이라, 생각하면서 선생님은 수업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 사태로 인해 움직임이 제약된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종혁이었다. 종혁은 사나운 눈으로 재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단유 저 새끼 욕하더니, 결국 지가 먼저 기어들어가네. 찌질한 새끼.’

하지만 하루 종일 경계의 눈빛을 잃지 않는 선생님 덕분에 종혁은 경거망동하지 않았고, 교실은 오전에 액땜한 덕분으로 별 일 없이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

“고맙다. 도와줘서.”

재림이 집에 가려던 단유를 붙잡고 이야기했다.

“별로 도와준 건 없어.”

말 그대로 단유는 재림을 도울 생각은 없었다. 단지 더벅머리와 눈이 마주쳐서 시비가 붙었고, 약간(?)은 단유가 도발한 면도 있지만, 어쨌든 재림과는 관계없이 싸움이 벌어졌을 뿐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크게 당하지 않았잖아. 점심시간에도 그렇고.”

5학년 주임이었던 담임선생님은 곧장 6학년 주임에게 알렸고, 6학년 주임선생님은 체육선생님과 함께, 별관 뒤에 대기하던 아이들을 붙잡았다. 몇몇은 놓쳤지만, 그래도 호되게 혼난 탓에 감히 학교에서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됐다.

“선생님들이 한 거지, 내가 한 게 아냐.”

재림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면서 다시 감사를 표하려는 차에, 단유가 말을 잘랐다.

“그리고 이런 거 하지 마. 너랑 안 어울려.”

불과 어제까지,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강렬한 이미지를 보였던 재림이―비록 남들이 모르는 일주일의 수련(?)이 있었지만―하루아침에 성격을 바꾸고 다가오니, 어쩐지 등 뒤가 가려운 느낌이었다.

냉정하게 돌아서는 단유는, 그러나 다시 팔을 붙잡는 재림의 손길에 걸음을 떼지 못하고 돌아보아야 했다.

“왜?”

재림이 뺨이 붉어지는 줄도 모르고 말을 꺼냈다.

“도와줘.”

“응?”

“나, 어쩌면 집에 못 갈지도 몰라.”

“왜?”

“6학년 형들이 집 앞에서 지키고 있을지도 몰라.”

“부모님은?”

“일하러 나가셔서 지금 집에 안 계셔. 그래서 저녁까지 나 혼자 있어야 한단 말이야.

단유는 캐릭터가 변한 재림을 보며 한숨을 내셨다. 책임을 지라고 했지, 책임을 지겠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럼 경찰서 가.”

“경찰서?”

“청소년 폭력 범죄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보호가 필요하다고 신고해.”

재림은 멍한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석고야, 가자!”

교실 뒷문에서 환하게 웃는 명수가 단유를 불렀다. 단유는 책가방을 둘러매고 교실을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