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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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이 단유를 앉힌 후, 두 사람은 말없이 TV를 보기 시작했다. 7시 반이 되자 호빵과 놀던 명수도 소파로 달려와 단유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선생님, 5번이요. 5번!”
하은은 혀를 차며 리모컨을 명수에게 넘겼다. 명수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는 얼굴로 리모컨을 건네받은 뒤, 채널을 변경했다.
“선생님, 근데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단유가 넌지시 눈치를 보며 입을 열자, 하은은 하품을 하면서 소파 위로 드러누웠다.
“없는데?”
“그래요? ··· 그럼 전 방에 들어갈게요.”
“아냐, 할 말은 없지만 니가 할 일이 있어.”
“뭔데요?”
하은이 눈짓으로 TV를 가리키며 말했다.
“TV시청.”
마침 저녁식사 후 뒷정리를 마친 아주머니가 웃옷을 손에 들고는 소파 위 3남매(?)에게 인사를 했다.
“이만 갈게요.”
명수와 단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은도 자세를 바로 하고 아주머니에게 짧게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셋에게 마주 인사를 한 뒤, 집을 나섰다. 호빵이 그 뒤를 졸레졸레 쫓다가 아주머니가 나가자, 다시 거실로 귀환했다. 명수 발밑에 서더니 명수를 올려다보며 열심히 꼬리를 흔들었다.
“나중에 놀아줄게.”
명수는 호빵을 한 차례 쓰다듬고는 TV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단유가 눈치를 보다가 다시 하은에게 말했다.
“저기···.”
다시 소파에 드러누운 회색 트레이닝의 하은은 고개를 저으며 턱으로 TV를 가리켰다. 이럴 때 보면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어느 집 누구 삼촌 같은 모양새였다.
TV로 시선을 돌렸을 때, 화면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팔짱을 끼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 때, 하은이 무릎으로 단유를 툭툭 쳤다.
“저 사람들은 왜 저길 갔을까?”
단유는 하릴없이 소파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갑갑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넓지 않은 소파 위에서 하은과 명수가 단유를 사이에 두고 앉은 것도 한 몫을 했지만.
“쇼핑하러 갔겠죠.”
백화점에는 물건을 사러 간다. 그 정도는 기본 상식이다.
“왜 쇼핑하러 갔을까?”
하은이 계속 이상한 걸 물어봤다. 단유가 하은의 의도를 짐작하려 애쓰는 사이, 명수가 입을 열었다.
“남자친구가 직장에서 첫 월급을 탔어요. 그래서 그 동안 도와준 여자친구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선물을 사려고 하는 거예요. 원래는 몰래 사주려고 했는데, 여자친구가 비싼 거 사면 안 된다고 하면서 같이 온 거예요.”
명수가 자신 있게 소리쳤다. 눈가를 좁힌 하은이 검지를 들어 명수의 입을 가리켰다. 명수가 두 손으로 입을 막는 사이, 하은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왜 백화점으로 왔을까?”
“물건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비싸잖아? 백화점보다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도 있을 텐데, 굳이 여길 온 이유는 뭘까?”
“여자가 백화점 주인 딸이라서요. 그런데 남자는 그걸 몰라요. 그래서···.”
“먹보, 넌 조용히 해.”
명수가 입을 오므리면서 다시 드라마에 몰입할 때, 하은이 단유에게 말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해. 그런데 여자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 다만 남자가 모를 뿐이지. 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받는 것을 기꺼워하고 있어. 왜 그럴까?”
“남자를 좋아해서 그렇겠죠.”
“그래, 일단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인 건 맞아. 그런데,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방식이 네가 보기에 어때?”
단유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단 드라마를 처음부터 보지 않았던 상황인지라, 정확하게 선후관계를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 걸 물어보는 것 같지는 않으니, 일단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보자.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고, 그래서 선물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직장에 취직하기 전까지 여자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니, 물질적으로 받은 것만큼 돌려준다는 의미에서 비싼 것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거래는 1:1, 공정하고 공평하게 하는 것이 상리(常理)니까.
단유의 설명에 하은은 고개를 돌려버렸고, 명수가 혀를 차며 단유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친구야. 넌 세상을 좀 더 알아야겠어.”
“무슨 소리야?”
“아, 그래서 너한테 여자친구가 없는 거였어.”
“응?”
명수가 박수를 치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을 짓자, 하은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명수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 같은 이야기인가. 선생님과 친구, 두 사람은 논리적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두 사실 관계를 마치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엮어서 그것이 마치 진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단유야, 앞으로는 수학 공부 말고 인생 공부도 좀 하자.”
“네?”
“TV 속에 인생이 있다.”
하은의 말에 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했다. 단유가 난감하고 당황하고 답답해하는 와중에도 하은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댔고, 명수가 코치를 했다.
차라리 수학문제를 푸는 게 더 쉽고, 편하고, 효율적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명수는 이 복잡한 설정의 드라마를 어떻게 다 이해하고 볼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야?”
단유가 무심결에 질문을 하자, 명수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계순이가 인주 친군데, 인주가 결혼했다가 이혼했거든. 그런데 인주 남편이 계순이와 만나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인주는 계순이가 이혼하기 전부터 남편과 만났다고 오해를 했고, 계순이는 저 남자가 인주의 전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가 알게 되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거야. 그런데 계순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인주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어. 그래서 두 사람은 굉장히 친한 사이지. 그런데 전남편이 중간에 끼어드니까,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긴 거야. 계순이는 오해를 풀고 싶지만, 인주는 사실 임신을 한 상태로 이혼을 했어. 그래서 인주는 계순을 미워하는 거야.”
들어도 모르겠다. 단유가 하은을 바라보자, 하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단유는 다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일드라마는 1시간도 되지 않아서 끝이 났고, 마지막에 계순이가 인주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에서 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 왜! 꼭 저럴 때 드라마 끝나더라?”
명수가 신경질을 내며 리모컨을 들었다. 다시 채널이 변하고 또 다른 드라마가 시작하고 있었다. 대가족이 모여 사는 집에 둘째가 사고를 치고 들어오면서 가족 간에 다툼이 생기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명수가 마치 랩퍼에 빙의된 것처럼 이전 줄거리를 읊어대는데, 하은은 굳이 제지 하지 않았다.
단유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하지만 눈이 간다고 열심히 보는 것은 아니었으니, 머릿속에서는 이 시간에 왜 이걸 보고 있어야 하나, 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끼리 투닥거리는 이야기가 무슨 재미가 있다고.’
단유는 제발 빨리 드라마가 끝나길 빌었다. 그리고 빨리 수학책을 펼치고 아까 풀다 만 문제를 마저 풀고 싶었다.
드라마 시청 시간은 11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어느 때보다 피곤한 얼굴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단유를 보며, 하은은 뿌듯함과 미안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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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새끼!”
종혁이 발을 크게 휘두르려는 찰나.
“너희들 뭐하는 거야!”
뒤에서 어떤 아주머니의 호통소리가 들렸고, 종혁은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떤 놈이 시끄럽게 떠드나 했더니, 어떻게 애를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리고 있어? 너 누구니? 너 나와 봐, 얼른!”
바닥에 엎드려 웅크린 자세를 취하고 있던 재림이 밖을 보니, 옆집 아주머니였다. 평소에도 옆집 시끄러운 걸 참지 못해서, 잔소리가 심하던 분이었다. 종혁이 알루미늄 재질의 문을 그렇게 열심히 두드려 댔으니, 화가 날 만도 했을 터.
반면 어두운 거실에서 주춤대던 종혁은 뻣뻣한 얼굴을 하고는 아주머니에게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얘가···먼저 했는데요.”
“아줌마가 다 봤는데, 어디서 거짓말이야! 니가 아까 문 두들겼지? 그치?”
종혁은 쭈뼛대면서도 문을 막고 있는 아줌마 때문에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얼른 안 나와! 너 어디 사는 누구야? 학교 어디야? 얘랑 같은 학교야?”
종혁은 큰일 났다 싶은 마음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아줌마 옆으로 빨리 빠져나갈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러다 잡히면 더 큰일이다 싶어, 쉽게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주머니가 눈을 부라리며 집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종혁은 굳게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여태 PC방 알바, 슈퍼 아주머니, 문구점 아저씨로부터 도망쳐 온 경험을 살려 도주를 결심한 종혁이 아주머니의 왼쪽 옆구리를 향해 어깨를 밀어 넣었다.
“어이쿠!”
작은 몸집의 아이라도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순발력이 따르지 못했던 아주머니는 헛손질을 하며 종혁을 놓쳤다. 종혁도 정확히 노렸던 곳으로 가지 못해, 결국 아주머니를 몸으로 떠미는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넘어졌고, 바닥을 구른 종혁은 그 틈에 잽싸게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저 놈의 새끼, 너 어디가! 거기 안 서!”
종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지욱의 무리였다.
“저 새끼 졸라 빨리 뛰네.”
키득거리면서도 아이들은 처음의 목표였던 재림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재림의 집 앞에 나동그라진 채 사람 죽네를 연발하는 아주머니 때문이었다.
“오늘은 글렀네. 내일 학교에서 손 좀 봐야겠네.”
“일단 우리끼리 놀지 뭐. 어떡할래? 민주한테 갈까?”
지욱이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몸을 돌렸다.
“일단 가보자. 민주 있으면 같이 놀고, 없으면 우리끼리 놀지 뭐.”
아이들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함께 있는 이상 그들이 무서워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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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림. 이리 와.”
아버지가 방에서 식사를 마친 후, 재림을 불렀다. 한쪽 뺨이 부은 재림이 눈을 아래로 깔고 아버지 앞에 무릎 꿇었다.
“아빠가 뭐랬어? 사고 치지 말랬지? 근데 오늘 뭐야? 왜 사고쳤어?”
엄밀히 말하면, 재림이 아니라 종혁이 사고를 친 거였지만 그 사실이 중요하진 않았던 아버지다.
“아빠가 말하면 대답을 해! 아빠가 그렇게 가르쳤어? 응?”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옆집 아주머니도 다쳤다며?”
불이 붙은 담배를 입에 물 틈도 없이 재림을 몰아붙이는 아버지였다.
“학교 때려치울 거야? 응? 소년원 갈래? 거기 가서 니 멋대로 살아볼래? 엄마 아빠도 없이 살아보고 싶어? 응?”
재림은 억울했다. 모처럼 일찍 집에 들어와서, 담배도 안 피고 얌전하게 집에 있었을 뿐인데, 세상의 온갖 사고를 다 친 사람이 된 것처럼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재림은 항변하지 않았다. 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재림의 침묵 속에서 아버지의 폭언은 20분을 더 이어졌고, 재림의 정신이 너덜너덜해질 쯤 아버지는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내일부터 아버지가 매일 지켜본다. 만약 한 번이라도 더 사고 치면 그 때는 아빠가 꼭 너 보육원에 넣어주마. 가족한테 피해만 끼치는 놈은 이 집안에 필요가 없다.”
그날 재림은 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을 참아야했다. 그러나 바로 옆에 붙은 책상에서 공부하던 형은 재림을 위로하지 않았다. 헤드폰을 쓰고 탁상램프 아래서 문제를 풀고 있던 형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대신 한 마디를 해주었다.
“시끄럽게 하지 마라.”
떠들지 말란 말 같기도 하고, 얌전하게 행동하란 말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재림은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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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학교를 가기 싫었다. 악다구니를 쓰면서 자기를 두들겨 패던 종혁이를 보고 싶지도 않았고, 어제 모임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벼르고 있을 6학년 형들도 무서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족들의 차가운 시선이 무서워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오늘 학교에 가지 않았다가는 정말로 보육원에 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에 들어서니, 언제나와 같은 정경의 교실이 재림을 맞이했다. 그 누구도 따스한 시선이나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교실. 그들만의 세상에서 재림은 혼자였다. 어제까지는 종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녀석도 적이 되었다. 아마도 오전 중에 한 판 붙을지도.
“들어가지 않고 왜 여기 서 있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표정 없는, 아니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단유가 서 있었다.
“안 들어가?”
단유가 재차 묻자, 재림도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겨 자리로 갔다. 옆을 보니 언제나 그렇듯이, 책상을 정리하고 책을 펴서 시선을 두는 단유였다. 이제까지라면 별 볼일 없는 녀석, 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어쩌면 진짜 꿈일지도 모르지만.’
꿈이었다고 해도, 초능력자 같은 신비로운 능력을 보여주던 단유였기에 뭔가 달라보였다.
“야, 성재림.”
어제의 지옥은 역시 끝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교실 뒷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이는 6학년 형들 중의 한 명인 더벅머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