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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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혁이 울부짖자, 다가가던 지욱은 걸음을 멈췄다. 그 틈에 종혁은 얼른 미안하다, 살려 달라, 며 애걸복걸했다.
“누가 죽인대?”
지욱은 뒤에 선 친구를 불렀다. 그리고 칼을 건넨 뒤, 입고 있던 흰색 점퍼를 벗어 건넸다.
“피 튀면 안 되잖아.”
다시 나이프를 건네받은 뒤, 모래 위에 납작 엎드려 있는 종혁에게 다가갔다. 결국 종혁은 눈물을 터뜨리면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조용히 안하면, 입부터 찢는다.”
지욱은 과장된 웃음을 지으면서, 아미 나이프에서 뽑아 든 칼날로 종혁의 볼을 가볍게 쿡쿡 찔렀다. 12살 어린 소년의 탱탱하고 탄력 있는 볼살이 밀려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 이 형이 우스워? 우습냐?”
종혁은 눈물을 흘리면서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말 잘 들을 게요. 진짜로요. 잘 들을 게요.”
“성재림이는 어떻게 할 거야?”
“데리고 올게요. 꼭 데리고 올게요.”
“안 데리고 오면, 그 때는 진짜 피 본다. 알았어?”
“네, 네.”
지욱이 일어서면서 모래를 걷어찼다. 튀어 오른 모래들이 종혁의 얼굴위로 뿌려졌다.
“그런 새끼를 친구라고 둔 니가 불쌍해서 한 번 봐준다. 그 새끼가 니 친구냐? 친구면 같이 왔어야지. 너 혼자 뒤집어쓰라고 하고는 도망친 거 아냐? 새끼, 그런 건 친구가 아니고 배신자야.”
뒤에서 웃던 아이들이 그 말에 동조해서 ‘배신자 새끼’라는 말을 거들었다.
“일단 너 가져온 거 다 내놓고, 빨리 데리고 와.”
종혁은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집어서 가지고 온 돈을 지욱에게 건넸다.
“한 시간 줄 테니까, 빨리 갔다 와라.”
“네, 형님.”
종혁은 더러워진 옷과 얼굴을 정리할 새도 없이 놀이터를 빠져나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종혁을 배웅했다.
****
재림은 잠깐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뒤집어 쓴 이불의 안락함과 일주일을 괴롭히던 야생동물의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의 포근함에 절로 눈이 감겼다. 몸과 마음의 피로가 잠이 듦과 동시에 초콜릿 녹듯 스르르 풀렸다. 초콜릿보다 달콤한 잠이었다.
꿈속에서 재림은 학교 옥상의 난간 위를 걷고 있었다. 옆에서 아이들이 사나운 눈길로 바라보는데, 그들은 눈길과 다르게 박수를 쳤다. 무엇을 위한 박수인지 모르겠으나, 박수가 끝나기 전까지는 난간에서 내려오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난간의 끝에 선생님이 서 계셨다.
“내려가.”
재림은 걸음을 멈췄다. 그랬더니 이번엔 아이들이 소리를 치면서 박수를 쳤다. 환호가 아닌 비명이었고, 탄식이었다. 박수는 끝없이 앞으로 걸어가라는 신호였다. 이대로 앞으로 가다가는 난간 끝을 가로막는 선생님과 만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 때, 누군가 재림의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단유가 서 있었다.
“신경 쓰지 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단유는 예의 덤덤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입가는 연신 씰룩이는 모습이 마치 껌 같은 것을 씹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신 전부 네 책임이야. 그러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재림은 그 말이, 일주일을 산에서 보낸 후 갑자기 나타난 단유가 해줬던 말임을 떠올렸다. 그런데 또 여기에서 마음대로 하라고? 다 내 책임이라고?
재림은 ‘책임’이라는 말의 의미를 숙제를 하지 않으면 선생님한테 꾸중을 듣는다는 정도의 각오로 이해했었다. 아침에 차려준 밥상에서 밥그릇을 깨끗이 비워야 하는 정도의 일로 이해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걸음 하나에 난간 밖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난간 끝에 선 선생님을 밀어뜨릴 수도 있었다.
“무서워.”
재림이 울먹거렸다. 그러자 단유가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뭔가 말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았다. 대신 더 커져버린 박수소리가 귓가를 웅웅거리게 만들 정도로 커졌다.
“성재림! 성재림!”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전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아이들의 눈빛이 여간 겁나는 것이 아니었다. 박수소리는 쇠를 긁는 소리처럼 더 거칠어졌고, 자신의 호명하는 소리는 점점 하나의 목소리로 변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목소리는 꽤 익숙한 소리로 바뀌었다.
“야, 성재림! 너 안에 있지! 문 열어, 어서!”
잠결에도 알루미늄 문을 쾅쾅대며 부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정신을 차린 재림이 이불 속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느릿느릿 현관으로 걸어간 재림이 문을 열자, 얼굴이 엉망인 채로 나타난 종혁이 재림의 멱살을 붙잡았다.
“야, 이 개새끼야. 니가 친구야? 응?”
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앞에 선 종혁이가 미친 건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종혁은 재림을 데리러 오는 동안 분을 참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육두문자를 입에 주워 담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시선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개새끼, 씨발새끼.”
두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 사람은 지욱이었다. 한 살 많은 주제에 잘나면 얼마나 잘 났다고 매일 젠체하면서 사람을 들들볶는다. 부려먹고 시켜먹는 것도 모자라 상납도 시킨다.
물론 종혁이나 재림은 그 형의 위세에 빌붙어 지난 시간동안 꽤 어깨에 힘주고 다녔다. 다른 동네 아이들과 맞붙어도 지지 않았고, 다른 선배들이 무시하지 않았다.
담배 같은 것도 손쉽게 조달할 수 있었던 것도, 지욱의 공이 크긴 했다. 그래서 가끔 지욱이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담배를 꼬나 물고 있으면 아니꼬운 때가 있어도 티 내지 않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비위를 맞추곤 했다.
하지만, 지욱이 그들을 후배로 대접한 적은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후배가 아니라 잡일 봐주는 노예였다.
“저거 좀 뽀려와.”
라고 하면 이 악물고 쿵쾅거리는 가슴을 감추며 문구점에서 비싼 장난감을 훔쳤고, 슈퍼마켓 앞에 진열된 과자더미를 들고 수십 미터를 뛰어야했다. 잡혀도 자력구제―훔친 물건을 던져서 놀라는 사이에 도망을 가는 등―해야 했고, 잡히지 않아도 얼굴이 팔리면 그 쪽으로는 갈 생각을 못했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항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성공한 뒤의 칭찬과 포상이 그 때는 어찌나 자랑스러웠던지, 더욱 기를 쓰고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 지욱의 얼굴은 정말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 종혁은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무서웠던 나머지 오줌을 지릴 뻔 했었다.
그렇게 각인된 지욱의 얼굴 옆으로 또 다른 얼굴이 떠오르니, 절친한 재림이었다. 아니, 절친했다고 믿었지만, 그 믿음을 배신한 원수 같은 놈이었다.
분명히 아침에 모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 당연히 오늘 어떤 일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은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붙잡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미 종혁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당해야 했던 일들의 원인 제공자로서 재림이 존재할 뿐이었다.
“개새끼, 나는 선생님 앞에까지 가서 보호해주려고 했는데, 개새끼.”
선생님 앞에 나선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개새끼는 모를 것이 분명했다. 자기는 그 놈과 똑같이 혼날 수 있다는 것도 각오하고 앞에 나선 것이었는데, 그 새끼는 지 혼자 편하자고 자신을 모른 체했다. 친구라는 놈이 그런 행동을 했다.
이윽고 재림의 집으로 뛰어간 종혁은 숨도 고르지 못한 상태에서도 재림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들겼다.
“야, 성재림! 개새끼야! 너 안에 있는 거 다 안다고, 새끼야!”
알루미늄 문을 힘껏 쳐댔다. 삐걱대는 소리와 쇠 갉아먹는 소리가 났지만, 흥분한 종혁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음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기척이 나더니 문이 열렸다. 종혁은 자다 깬 듯한 재림의 얼굴을 보자 화가 치솟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곧장 재림의 멱살을 잡고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 개새끼야!”
재림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바깥에는 해가 지지 않았으니,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현관문을 두드리고, 멱살을 잡고 신발을 신은 채로 거실 안으로 들어오는 종혁의 태도가 당황스럽기만 했다.
“야, 뭔데?”
태연한 재림의 말에 종혁은 자제력을 잃었다. 내가 쳐 맞고 있는데, 넌 잠이 오냐?
종혁은 재림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하고 재림이 무너지자 이 때다 싶어서 발로 밟았다.
“이 새끼야, 니가, 너만 살면, 다야? 이 개새끼가!”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그리고 재림이 얼마나 비겁하고 나쁜 놈인지를 일일이 예를 들어가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오로지 ‘개새끼’라는 단어 밖에 없었다. 뭔가 속 시원히 말을 못하니 화가 더 쌓이는 기분이었다.
“개새끼야!”
일단은 밟아놓고 데려가야겠다. 그래야 속이 조금은 풀릴 것 같았다. 그래야 조금은 덜 억울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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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몸 좀 풀었더니 좋다, 야.”
더벅머리를 한 아이가 목을 돌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새끼, 그 정도로 몸이 풀리냐? 난 아직도 배가 고프다.”
“븅신, 니가 무슨 감독이냐?”
아이들은 켈켈거리며 웃어댔다. 지욱이 담배를 쭉 빨았다가 코로 연기를 뿜으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 오늘 민주는 왜 안 온대냐?”
그러자 뒤에서 담배를 필터가 타 들어갈 때까지 빨고 있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친구랑 노래방 간다던데?”
지욱이 뒤를 돌아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떤 친구?”
“왜, 있잖아? 정흰가 하는 애.”
지욱이 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노래방 가려고?”
짧게 숨을 토한 지욱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래. 내 생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튀었다 이거잖아?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미친 거 아냐?”
더벅머리가 따라 일어섰다.
“종혁이 안 기다려? 애들 왔는데 우리가 없어봐. 우습게보지 않을까?”
“에이 씨.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안 와?”
여태 몸을 웅크리고 나뭇가지로 모래를 헤집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2배는 더 큰 몸을 가진 아이였다.
“도망간 거 아냐?”
“도망? 이 새끼들이 간땡이가 부었나?”
“야, 그냥 오늘 그 새끼들 잡아서 족칠까?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야 애들이 말을 잘들을 거 아냐.”
“그래도 말 잘 듣던 애들인데, 괜히 따까리 하던 애들만 버리는 거 아냐?”
더벅머리의 변호에 잠시 고민하던 지욱이 모래를 걷어차며 말했다.
“다른 새끼 구하면 되지. 선배 말 안 듣는 새끼들은 버릇을 고쳐놔야 돼. 그래야 다른 애들도 말을 잘 듣지. 그치?”
지욱의 말에 여태 말없이 일렬로 서 있던 5학년 애들 네 명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덩치가 몸을 세우더니 5학년들 앞으로 다가갔다. 5학년들의 눈에는 중학생 형들 못지않게 무서운 형이었다. 저 바위 같은 주먹을 맞으면 정말 뼈가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몸이 경직되었다.
“니들도 조심해. 배신 때리려면 각오하고 때려. 안 그러면 내가 제대로 때려줄 테니까.”
더벅머리를 비롯한 6학년 애들이 덩치의 라임에 키득거리며 웃었지만, 5학년들은 목울대만 꿀렁댈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대답 안 해?”
“예!”
“뭐? 배신 때린다고?”
“아닙니다!”
아이들은 바짝 기합이 든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욱은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버린 후, 모래 속으로 꽁초를 꾹꾹 눌러 밟았다.
“가자.”
인평초등학교의 일진회가 아지트에서 출발했다. 목표는 건방진 후배의 집이었다.
“아, 근데 너 재림이 집 아냐?”
지욱의 말에 더벅머리가 머리를 굴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치 빠른 아이 하나가 손을 들었다.
“제가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