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69화 (169/956)

Fait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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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이 학교 건물을 빠져나올 때, 교문 앞에서 종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야, 많이 혼났냐?”

재림은 종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종혁은 재림의 눈을 바라보며 수상하다는 눈초리를 보였다.

“운 거 아냐? 운 거 같은데?”

재림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걸음을 빨리하여 학교를 벗어났다.

“야, 어디가? 오늘 놀이터에서 모이기로 했잖아.”

무슨 이야긴가 싶어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아침에, 6학년 형이 모임을 지시했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 모임에 갈 수 없었다. 갈 기분이 아니었다.

“오늘은 나 빠질래. 너나 가.”

종혁이 후다닥 뛰어와서 재림의 팔을 붙잡고는 속삭였다.

“너, 무슨 소리야! 오늘 빠졌다가는 형들이 절대 안 봐줄 거야. 죽을지도 몰라.”

‘죽음’을 이야기하는 순간, 재림의 걸음이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종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림은 천천히, 나무늘보처럼 입을 열고 목소리를 냈다.

“‘죽는다’고? 넌 진짜 죽는 게 뭔지 몰라서 그래.”

“무슨 소리야, 갑자기?”

재림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리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짧게 숨을 몰아쉰 뒤, 겨우 걸음을 떼기 시작한 재림은 여전히 놀이터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아무튼, 난 안 갈 거야. 아니, 앞으로도 안 갈 거야.”

“왜? 아니, 무슨 일 있어?”

재림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종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죽을지도 몰라.”

종혁은 재림의 눈에서 공포에 떠는 아이를 보았다.

****

재림은 집으로 돌아왔다. 최근에, 아니 거의 2년을 통틀어서 이보다 빨리 집에 온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집에 들어왔는데도 밖에 해가 떠 있었으니까.

재림은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벗어던지고 이불을 둘러썼다. 어두운 집 안의 정적이 무겁게 짓눌렀다. 평소라면 그 정적이 무서웠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큰 혼란과 공포가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재림은 눈을 감았다.

‘꿈이었을까?’

사실일 리는 없다고 생각해야 옳았다. 멀쩡히 학교에 있던 자신이, 난데없이 산으로 둘러싸인 벌판 한 가운데에 서 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벌거벗은 채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흙길 위에 맨 발로 서 있는 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재림이 기억하는 바로는, 단유의 손에 교실에서 이끌려 나와 양호실로 가고 있었다. 선생님에게 호되게 맞은 뒤, 머리채를 붙잡힌 채 이리저리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흔들렸었다. 그 때문에 정신이 없던 상황이긴 했는데, 그 이후의 기억은 흐릿했다. 양호실을 가기위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어느 순간 자신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벌판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잡초가 우거진 벌판에는 몇몇 이름도 모를 잡목들이 서 있었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는 학교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등나무가 있었다. 벌판을 가로지르는 흙길이 하나 있었고, 그 흙길 위에 재림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갑작스러운 주변의 변화에 당황해했다. 벌판을 둘러싼 산들은 높기도 엄청나서 중턱 즈음에는 하얀 구름이 걸려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산도 있었다.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이 넓게 펼쳐진 가운데, 벌판의 잡초를 쓸면서 다가온 차가운 바람이 맨살을 때리고 지나갔다.

“이게 뭐야?”

재림이 당황한 가운데, 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무도 없어요?”

바람이 풀들을 쓰다듬는 소리만 주위에 가득한데, 인적이라곤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런 곳은 상상에서도 그려본 적 없는 곳이었다. 외국 같기도 하고, 한국 같기도 한데, 그 어떤 나라에서도 보기 힘들 거 같은 곳이었다.

재림은 몸을 움츠리며, 뭔가 몸을 가릴 것을 찾아보려 했다. 팬티 한 장 입지 않고 발가벗은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추위를 막는 게 더 시급한 과제였다.

‘무슨 일이지?’

재림은 무서웠다. 왜 갑자기 이런 곳으로 오게 된 건지, 이유도 알 수 없어서 무서웠고,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그 때, 그의 앞에 짙은 파란색의 염이 된 천쪼가리가 떨어져 내렸다. 갑자기 뭔가가 눈앞을 휙하고 지나가면 바닥에 떨어지니, 놀란 재림이 흙길 위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입어.”

목소리에 반응한 재림이 얼른 천을 주어들면서 앞을 가렸다. 그리고 목소리를 향해 물었다.

“누, 누구세요.”

대답은 없었다. 역광을 받아서인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재림이 고개를 기울여가며 얼굴을 보려했는데 상대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희미한 윤곽 속에서 얼굴이 드러났다.

“어? 너?”

“입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여기 어디야?”

“입어.”

단유의 재촉에 손에 쥔 옷가지를 보던 재림이 이게 뭐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도 앞에 있던 단유가 모습을 감춘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어디에서도 단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벌판이었다. 그 사이에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모습을 감출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던 나무는 없었다.

그 와중에도 차가운 바람이 불어대니 이번에는 참기가 어려웠다. 재림은 서투르게 옷가지를 펼쳐서 입었다. 헐렁하지만, 없는 것보다 나았다.

“가자.”

깜짝 놀라는 재림 앞에 어느새 단유가 나타났다.

“너, 귀신이야?”

“아니야.”

“그럼 뭐야? 어떻게 한 거야?”

“가자.”

재림의 질문은 깔끔하게 씹어 넘긴 단유는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재림이 허둥지둥 대며 따라갔다.

“니가 아무리 선생님을 때리고 욕을 해도, 선생님은 너한테 그렇게 할 수 없어. 왜냐하면 선생님이니까.”

단유의 말에 순간 발끈하며 따지고 들었다.

“니가 무슨 상관인데···.”

그러나 단유는 그 말을 잘라 먹으면서, 자기 말만 이어나갔다.

“그런데, 난 아냐. 난 너한테 똑같이 해 줄 수 있어. 그리고 난 너한테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

“그게 무슨 개소리야!”

어느새 벌판을 벗어난 두 사람은 산기슭을 오르기 시작했다.

“난 예전에 혼자였어. 왜 혼자여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혼자가 되었지. 그 때는 마냥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뿐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뭐든지 하려고 했어.”

어머니를, 동생을, 동네 사람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래야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가실 테니까.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세상에서, 도시에서, 보육원에서 홀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많이 괴로워하고 외로워했던가. 그래서 더욱 발악했었고, 위험을 앞에 두고도 위험한 줄 모르고 달려들었었다.

“왜 내가 이런 처지여야 하는지를 몰랐어. 그리고 늘 외롭다고 생각했었지. 주위의 모든 것들이 나를 몰아세웠고, 난 늘 경계해야 했어.”

산길을 맨발로 걷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재림은 작은 돌멩이를 밟고는 신음을 터뜨렸다.

“잠깐만, 나 발 아파.”

단유가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서둘러.”

단유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재림이 뒤에서 소리를 질렀지만, 단유는 점점 멀어져 갔다. 순간 아무도 없는 산길에 홀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어, 재림은 이를 악물고 단유를 쫓았다.

“한 번은 정말 죽을 위기에 놓였지.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의 정체를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어렴풋이 깨달았어.”

고갯길을 올라가는 단유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가만 보니 저만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너, 그 신발 어디서 났어!”

단유는 길가로 튀어나온 나뭇가질 꺾어서 바닥을 쓸었다. 작은 돌멩이들이 잎사귀에 쓸려 길 밖으로 튕겨나갔다. 그 후, 그 나뭇가지를 뒤로 던졌다.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운 재림이 단유가 보여준 것처럼 바닥을 쓸어 가면서 단유를 쫓았다.

“선생님에게 맞고 쓰러졌을 때, 니가 보여준 눈빛을 보니 알았어. 난 당시에 화가 났었고, 또 무서웠었어. 그런데 그때는 그 기분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래서 계속 나를 위험한 곳으로 내몰았던 거야.”

그리고 다른 사람까지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었지.

“니가 너를 알지 못하면, 너를 도우려는 사람들마저 위험하게 될 거야. 그러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지도 몰라.”

“······.”

“그래서 도와주려고. 너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도와준다고 하니 귀가 솔깃했다.

“어떻게?”

“당분간 여기서 지내봐. 그럼 알게 될 거야. 니 주위에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이 많은지. 그리고 그 사람들한테 니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뭐?”

단유는 재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기 밤에 늑대 나오니까, 조심해.”

그리고 사라졌다.

“뭐야?”

재림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후, 재림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주위를 계속 경계하면서 산길을 돌아다녔다. 다시 내려갈라치면, 자기도 모르게 다시 처음의 장소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밤이면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덜덜 떨어야 했고,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으려면 깊은 어둠이 자리한 숲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겁이 나서 갈 수가 없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던 단유는 중얼거렸다.

“니가 편하게 살아서 그래.”

다른 사람은 이렇게 못한다. 하지만 자신은 할 수 있다. 단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 같은 문제를 앓고 있는 사람에게 적절한 처방을 한 것이다. 단유는 재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죽게 놔둘 순 없으니까. 가끔씩 재림이 졸 때, 다가오는 늑대들을 먼 곳으로 보내는 수고 정도는 서비스로 해주었다.

일주일. 재림이 산 속에서 헤매고 다닌 시간이었다. 공포와 굶주림. 안전한 곳은 없었고, 모든 것이 죽음과 직결되는 환경이었다. 맨발은 상처투성이인데다가 추위와 싸우느라 온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신경이 곤두섰는데, 늑대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 소리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먹지 못해 화가 난 소리라는 것을 알지는 못했지만, 그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담긴 섬뜩함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재림이 다시 학교에서 눈을 떴을 때, 재림이 혼란 속에서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그리고 양호 선생님을 봤을 때, 그리고 아이들을 보았을 때, 담임선생님을 보았을 때 재림은 기쁘고 고마웠다. 일주일 사이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선생님이 자길 때렸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그래서 재림은 바로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가족들을 기다렸다. 평소에는 그토록 무심했던 가족들인데 지금은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어두운 방안에서 재림은 이불을 둘러쓰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외로움에 몸부림쳤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한 이불이었다. 이 모든 게 그리웠던 재림이었다.

****

“야, 성재림이는 왜 안 왔어?”

6학년 선배의 물음에 종혁이는 우물쭈물하면서도 대답을 못했다. 어떻게 ‘오기 싫었다’는 재림이 말을 전할 수 있겠는가.

“이 새꺄, 선배가 묻잖아!”

다른 선배가 종혁의 배를 걷어찼다. 놀이터 모래밭에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종혁에게 터벅터벅 걸어간 선배, 지욱이 말했다.

“오늘 내 생일이라서 웬만하면 피를 안 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지욱은 종혁의 얼굴을 걷어찼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종혁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요즘 형들이 가만히 있어주니까, 겁도 안 나지? 그래서 니들 꼴리는 대로 해보겠다는 거지?”

다시 걷어찬 발길질은 종혁의 옆구리에 틀어박혔고, 종혁은 눈물을 터뜨리면서 빌기 시작했다.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지욱이 피식 웃었다.

“니가 뭘 잘못했는데? 뭘 잘못했는지나 알고 그러냐?”

“야, 김지욱. 니가 애들을 풀어주니까 이런 거 아냐? 좀 더 밟아라.”

뒤에서 다른 소년이 담배연기를 뿜으면서 히죽댔다.

“그럴까?”

지욱의 눈에 붉은 빛이 돌았다.

“야, 그거 가져와봐.”

지욱이 뒤를 향해 손을 내밀자, 한 아이가 그 손에 소위 ‘맥가이버 칼’이라고 부르는 아미 나이프를 쥐어주었다. 종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잠, 잠시 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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