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웨이브(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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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에서 뻐끔뻐끔 토해내는 증기가 공중에서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재림은 눈을 떴다.
“헉헉!”
격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정신을 차리려던 재림은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떡 몸을 일으킨 재림이 주위를 둘러보니, 학교 양호실이었다.
“뭐야, 이게···.”
아래를 내려다보니 옷을 모두 챙겨 입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까끌까끌하기만 한 낡은 천쪼가리를 둘러쓰고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냄새는 나지만 구멍하나 나지 않은 깨끗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때, 문이 열리면서 양호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어, 일어났구나. 괜찮아?”
티백이 담긴 종이컵을 든 선생님은 책상 위에 올려두고는 재림에게 다가왔다. 이마를 짚어보더니, 미소와 함께 말을 했다.
“열은 없고, 눈도 또렷한 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정신을 잃었다고 하니까,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긴 하거든?”
재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양호선생님을 바라보다가, 재차 묻는 선생님의 말에 고개를 젓고는 침대를 빠져나오려 했다.
“좀 더 있어. 10분 있다가 쉬는 시간이니까, 그 때까지는 누워서 쉬도록 해.”
재림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포근한 베게에 머리를 대고 눕자, 경황이 없던 와중에 잠시 잊고 있었던 조금 전의 일들이 생각났다.
“선생님, 오늘 며칠 이예요?”
“응?”
양호선생님은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재림의 엉뚱한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기억 안나?”
“저 여기 얼마나 있었어요?”
선생님은 벽에 걸린 동그란 시계를 잠시 바라보다가 답했다.
“한 10분쯤?”
10분? 그럼 방금 전까지 자기가 있었던 곳은 뭐지? 재림은 혼란스러웠다. 그 때, 종이 울리면서 조용하던 양호실의 바깥이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됐어, 이제 그만 교실로 돌아가.”
재림은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침대를 빠져나와서 교실로 갔다.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가자 일순 교실이 조용해졌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몰리는 것을 느끼면서 재림은 천천히 자기 자리로 갔다. 그리고 재림은 옆 분단에 앉은, 독서 중인 단유를 바라보았다.
“으으.”
재림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무릎, 다리가 떨려오면서 한 걸음도 떼기 힘들었다. 갑작스러운 변화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잠시 까먹고 있었는데, 그 일의 한 가운데 저기 저 애가 있었다. 그런데 저 애는 마치 그런 일이 어디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성재림, 앞으로 나와.”
교실 앞 교사책상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재림을 불렀다. 하지만 재림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고,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어쩐지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성재림, 선생님 말 안 들을래? 당장 앞으로 나와.”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재림이 억지로 몸을 틀어 움직이려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대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어?”
아이들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니, 선생님도 예삿일이 아니다 싶어서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셨다.
“뭐야, 너? 괜찮아?”
재림은 울컥하는 감정을 느끼면서 눈에서 눈물이 났다.
“다리가, 안 움직여요.”
“뭐?”
선생님은 얘가 무슨 수를 쓰나, 벙찐 얼굴로 재림을 둘러보는데 재림의 얼굴이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눈물까지 머금고 있는데 거짓말 같지 않아서 가슴이 철렁했다.
“왜?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때였다. 드르륵 거리며 단유가 의자를 뒤로 밀면서 일어났다. 소란의 가운데서 아무도 그 것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직 재림만은 단유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단유가 다가오니 점점 더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단유는 재림에게 다가오더니 재림의 팔을 붙잡았다. 순간 재림의 떨림이 멎었다. 떨림만 멎은 게 아니라 심장도 멎은 것처럼, 몸이 경직되었다.
“일어나.”
단유가 재림의 손목을 붙잡고 당기자, 힘없이 이끌려 세워졌다. 그러나 곧바로 다리에 힘이 없어 무릎이 꺾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유가 재빨리 재림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넘어지지 않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재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신 차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라고 말하면서 재림의 옷을 여유롭게 털어주었다. 그 모습에 아이들과 선생님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유는 재림의 옷을 털어준 뒤 다시 이야기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혼자 속에 담아두고만 있지 말고.”
그리고 옆에 무릎 앉은 자세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선생님을 응시했다.
“선생님, 학교 끝나고 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직 반 아이들이 들을 수업이 많이 남았는데, 다시 재림이 붙잡고 푸닥거리 하지 마시죠,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선생님은 단유의 말이 틀리지 않다 여겼고, 그래서 일단은 단유와 함께 재림을 부축해서 자리에 앉혔다. 방과 후, 교실에 남도록 지시를 내린 선생님은 다시 교사책상으로 돌아갔다.
“야.”
돌아가던 단유를 재림이 붙잡았다. 단유가 돌아보자, 재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아까, 저기··· 거기.”
“거기라니?”
“거기 있잖아. ···산 많이 있던 데.”
“···무슨 소리야?”
단유는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재림은 단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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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림, 말해 봐. 아까 왜 그랬어.”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고 텅 빈 교실에 선생님과 재림만 남았다. 재림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럼 선생님부터 이야기할게. 우선 선생님도 아까 너 때린 거 미안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한테 손찌검하면 안 되는데, 미안했다.”
선생님의 사과에 재림이 고개를 들었다.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 니가 주먹을 휘둘러봐야 얼마나 아프겠니. 그런데 선생님도 그 때는 너무 당황했었어. 그래서 선생님이 잠깐 자제력을 잃었던 거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님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재림이 너한테 많이 미안하다.”
눈물이 뚝뚝 흐르는데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를 꽉 깨물고 울음소리를 참아보려 하는데도 참아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 때 재림의 머리 위로 손이 올라왔다.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님의 손길에 결국 재림이 무너졌다.
“엉엉, 선생님.”
눈물을 쏟아내는 아이를 보니, 선생님도 아까까지 가지고 있던 앙금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결국 이 아이에게도 선생님이란 존재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몰라.
그 뒤로도 한참을 선생님에게 안겨서 눈물을 쏟아낸 재림이었다. 그리고 눈물이 잦아들 때쯤, 재림과 선생님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은 재림에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음을 알게 되었고, 재림은 선생님이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길을 찾아주려 하는 사람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사실 재림이가 예전에 어땠는지 모르잖아? 그래서 사실은 재림이가 못된 아이인줄 알았어. 선생님 말도 안 듣고, 공부도 잘 안하고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런데, 선생님이 오해했던 거야.”
선생님은 치맛자락을 살짝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선생님도 사실 모든 걸 알 수는 없거든. 그래서 선생님도 계속 너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가 무엇을 고민하고 걱정하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너랑은 그런 대화를 하지 못했던 거야. 선생님이 실수를 했던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너랑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좋겠어. 선생님이랑 고민이든 걱정이든 뭐든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래서 앞으로는 서로를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알겠니?”
재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저한테 아무것도 이야기를 안 해요. 제가 뭘 하는지 궁금하지도 않고요. 맨날 늦었으니까 자라고만 해요. 어제는 저한테 학교에서 사고치고 다니지 말라고 했어요. 학교에서 뭐하는지도 모르면서. 아빠는 관심이 없어요, 저한테.”
선생님은 재림의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엄마도 저한테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엄마는 형한테만 관심이 많아요. 집에 들어오면 먼저 그래요. 형 들어왔냐고. 아침에도 형한테 그랬어요. 먹고 싶은 거 없냐고. 그런데 저한테는 그런 거 안 물어요. 형도 마찬가지예요. 형은 우리 집 일에 전혀 관심이 없어요. 집에 들어오면 방에서 책 보다가 자요. 제가 옆에서 뭘 하든 관심도 없고요, 그냥 졸리면 잤다가 일어나면 학교 가고.”
선생님은 재림의 손을 토닥였다. 그 손 위로 다시 눈물이 뚝 떨어졌다.
****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 저런 게 들어온 거지.”
하은이 소파에 드러누운 채로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하은이 가리킨 방향에는 하얀 털이 복실 하게 자란 포메라니안 종의 강아지 한 마리가 바닥에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명수가 환하게 웃으면서 하은에게 안겼다.
“어? 어?”
“고맙습니다! 선생님!”
명수는 금방 몸을 돌려 강아지에게 달려갔다.
“석고야, 이것 봐. 귀엽지? 그치?”
강아지 앞에 같이 드러누운 명수는 강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 참. 저게 털이 얼마나 많이 빠지는데··· 저런 걸 키우라고 보내?”
하은이 투덜거렸다. 분명히 저건 주영의 장난질일거라면서. 그러거나 말거나 명수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강아지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했다. 단유도 명수 곁으로 가서 개를 바라보았다. 조그만 강아지는 자기 꼬리를 잡겠다고 앞발을 버둥거리는데 다리가 짧다보니 꼬리가 잡힐 리 없었다. 그러다보니 벌러덩 드러누워서 다리만 꼼지락거리듯 움직였다.
명수가 손을 뻗어 강아지의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석고야, 이거 만져봐! 신기해!”
단유도 조심스럽게 손을 겹쳐 보았다. 분홍빛 살결 위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손끝에서 밀려온 온기(溫氣)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 거, 이름 짓자.”
“이름?”
명수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이름을 불러보았다.
“복실이, 멍멍이, 하양이, 백곰이··· 선생님, 얘 남자예요? 여자예요?”
“암컷.”
“곰순이, 꽃순이, 광순이, 복순이, 영순이···.”
“순이만 붙인 거 아냐? 작명 실력하곤···.”
하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석고야, 넌 생각나는 이름 없어?”
단유는 가만히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아마 앞으로 이 집에서 새로운 식구로 함께할 아인데, 쉽게 이름을 짓기가 어려웠다. 모름지기 이름이란, 그 생명의 시작과 끝을 함께할 ‘운명’이나 마찬가지, 라고 했었으니까.
“당장은. 원래 이름도 있었을 텐데, 마음대로 짓기도 그렇고.”
“원래 이름이 있어? 선생님, 원래 이름도 있어요?”
“몰라. 없는 거 아냐?”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 이름을 받는다. 다만 인간이 모를 뿐인 것이지. 단유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눈을 슬쩍 감으면서 단유의 손길을 느끼는 강아지였다. 작은 머리에도 풍성하게 자란 털이 단유의 손가락에 몇 올씩 묻어나왔다. 청소하기 힘들겠는걸?
“그럼 그냥 내가 정할래. 호빵이. 얘 이름은 호빵이야.”
암컷이라고 하지 않았나?
“호빵아?”
명수가 은근하게 부르자, 신기하게도 강아지가 명수를 바라보았다.
“봤어요? 봤어? 얘가 부르니까 보잖아? 그치 호빵아?”
명수의 부름에 강아지가 코를 씰룩이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를 취했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명수는 신이 나서 강아지를 품에 안고 거실을 굴렀다. 강아지가 떨어뜨린 작고 하얀 털들이 명수의 옷에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개인지, 사람인지···.”
하은이 쯧쯧 혀를 차면서도 돌리던 채널에 시선을 고정했다. 단유는 둘을 보며 생각했다. 호빵과 명수, 둘은 참 잘 어울린다,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