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웨이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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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성재림이랑 아는 사이야?”
개학 첫 날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가끔 부딪힐 때마다 이를 가는 모습을 보니 그냥 오다가마 만난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명수에게 물었다. 명수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자세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응, 같은 반이었어. 3학년 때.”
명수는 발 앞에 놓여있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운동장 가운데 떨어져 있는 돌멩이들은 치워야 한다. 축구하다가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사이가 별로 안 좋았어?”
“아니, 딱히 그런 일은 없었어.”
명수는 구르다 멈춘 돌멩이를 집어 들더니, 학교 담 쪽으로 집어 던졌다. 날아가던 돌멩이는 담에 톡 하고 부딪히더니 잡초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 때랑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어떻게?”
“그 때는 같은 팀에서 공 찰 때도 있었는데, 저렇게 막 시비 거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시비’라고 하니 재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까 화 많이 났었지? 괜찮아?”
“응.”
단유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오늘의 명수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물론 단유는 이제껏 명수가 다른 아이들과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는 화를 내는 모습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명수가 재림의 멱살을 잡을 때 한 번 놀랐고, 재림이 명수의 멱살을 잡았을 때 곧바로 뛰어들 심산이었다. 마침 선생님이 제지하셨기에 끼어들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때는 재림의 멱살을 잡을 정도로 화를 내던 아이가 지금은 칠십 먹은 할아버지 모양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니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아까 화났던 거 아냐?”
“아까는.”
“그런데 지금은 다 풀렸어?”
“뭐, 그냥 그래.”
잠시 뜸을 들이던 명수가 말을 이었다.
“만약에 걔가 진짜 우리 집에 온다고 상상하니까 웃기더라고. 지금은 아무나 올 수 있는 집도 아니고, 만약에 진짜로 왔다가 선생님한테 붙잡히면, 걔가 막 울면서 빌걸?”
“왜?”
“선생님이 식탁에 걔를 앉혀 놓고 말하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은 화장실도 못가고 계속 이야기만 들어야 하잖아.”
명수는 이제껏 하은만큼 말이 많고, 빠른 선생님을 본 적이 없었다. 작정하고 입을 열면, 한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명수가 얼이 빠져 멍해 있는 모습과 반대로 선생님은 상당히 개운해 하는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진짜 날 잡아서 한 번 데리고 갈까?”
명수가 골똘히 생각할 때, 단유는 명수의 손목을 잡아 끌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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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진짜 짜증나서 못 살겠네.”
재림은 아지트인 미끄럼틀 아래에서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후 하고 연기를 뿜어냈다. 유난히 길고 진한 연기가 눈앞을 가렸다가 사라졌다.
“그 새끼 한 번 밟을까?”
그러나 다른 아이들은 조금 떨떠름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다른 아이들 입장에서는 명수가 크게 거슬리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고, 심지어는 친한 아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작년부터 빛을 발한 명수의 리더십에 동화된 아이들도 있었다.
“그냥 한 번 봐줘라. 괜히 싸웠다가 피 보면 큰일 나. 걔네 선생님도 오고, 고아원에서도 사람들 나오고 그러면 어떡하려고.”
미끄럼틀 기구를 지지하는 기둥 하나에 등을 기대고 앉았던 아이 하나가 침을 뱉다가 말했다.
“야, 그 보육원 없어졌어.”
그 말에 다른 아이들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놀란 얼굴을 하고 돌아보았다.
“없어졌어?”
“응. 우리 엄마가 하는 말 들었는데, 그거 아네스 보육원인가, 그렇잖아? 그거 없어졌대.”
그러자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던 아이가 물었다.
“그럼 명수는 지금 어디 사는데?”
“모르지, 그건.”
명수와 단유가 재훈이 마련한 집에서 하은과 같이 산다는 사실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1반과 2반 담임 선생님들의 경우에는 미리 이야기를 들어 알지만, 굳이 그 사실을 홍보할 이유도 없어 학부모 중에는 아는 이가 없었다.
“야, 그럼 걔네들. 지금 길에서 먹고 자는 거 아냐? 거지처럼?”
“어, 진짜 그런가?”
“새끼, 단유 그 새끼 봐라. 그게 거지 얼굴이냐?”
단유의 흰 얼굴을 보면, 거지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흑백 스트라이프 문양의 티셔츠를 입은 아이가 추측해보았다.
“모르지, 집도 없는 애들인데 아침에 어디서 씻고 올 수도 있지.”
‘얼룩말 패션’의 추측에 ‘바가지 머리’가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야, 내가 전에 보니까 집 나온 형들이 공원에서 자고 일어나서, 공원 화장실 있잖아? 그런데서 씻고 나오긴 하더라.”
“공원 화장실도 있고, 저기 저 빌딩에도 화장실 문 열리던데, 거기서 씻을 수도 있고, 찾으면 많을 걸?”
“그런가? 그럼 먹는 건?”
“야, 학교에서 먹을 거 주는데 뭐가 걱정이냐?”
“저녁에는 배고프잖아.”
그 말에 기둥에 등을 기대고 연신 침을 뱉어대던 아이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우리 형이 그러는데, 편의점에서 날짜 지난 김밥 같은 거 거지들한테 무료로 주고 그런대.”
“진짜?”
편의점 김밥은 맛있다. 그걸 무료로 준다고?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재림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야, 거지도 아니고 우리가 그걸 왜 먹냐?”
“먹을 수도 있지, 새끼야. 공짜로 주는 건데 왜 안 먹냐?”
“아 씨발, 진짜 거지같이 구네. 야, 그냥 내가 쏠게.”
“오오! 웬일이야? 돈 생겼어?”
재림이 만 원짜리를 호주머니에서 꺼내자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아빠 지갑이라도 뽀렸냐?”
“묻지 마라. 그냥 가서 좀 먹자.”
“콜!”
암굴에서 기어 나오는 환자들처럼 미끄럼틀 아래에서 한 명씩 빠져나오기 시작한 아이들은 놀이터 모래밭에 침을 뱉어대면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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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텅 빈 교실에서 잡무를 보던 이 선생님은 교실 앞문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반겼다. 노란 카디건을 걸친 중년 여성은 선생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재림이 어머니 되시죠?”
“예, 예. 안녕하세요, 선생님.”
중년 여성은 교실이 어색한 듯, 주위를 둘러보면서 선생님이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아이들 의자라서 조금 불편하실 지도 모르겠네요.”
“아, 아니에요, 선생님. 괜찮아요.”
“차라도 드시겠어요? 티백 밖에 없지만, 녹차 어떠세요?”
“아이고, 선생님. 제가 드려야 하는데.”
이 선생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안 되죠, 그건. 그럼 큰일 나요.”
우스갯소리라도 되는 것처럼 웃으면서 화답한 선생님은, 이윽고 녹차가 든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나타나 하나를 어머니 앞에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학교에 오신 적이 없다고요?”
“예. ···사실은 제가 일을 하고 있는데 시간을 빼기가 쉽지가 않아서요.”
사실은 오늘도 겨우겨우 식당 주인에게 사정을 해서 빠져나온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까지 꼬치꼬치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재림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선생님이 예의바른 웃음을 지으며 상담이유를 설명했다.
“다름이 아니고요, 원래 매 학기마다 학부모 상담주간이 있어요. 물론 강제는 아니라서 어머니처럼 바쁘신 분은 안 오셔도 상관은 없죠. 그런데 최근에 재림이 학교생활이 조금··· 주의가 필요해 보였어요.”
“예? 혹시 무슨 사고라도?”
“아뇨, 사고를 친 건 아닌데요. 조금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이 보여요.”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요 며칠간 재림이 보였던 행동들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나올수록 재림의 어머니는 표정을 구기기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자녀의 교육이란 건 학교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요, 그렇다고 전적으로 가정에서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도 아니랍니다. 학교와 가정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책임을 함께 해야 하는 거죠. 아직 정확한 원인이나 이유를 모르는데 마냥 아이를 혼내는 것도 답은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어머니께 이야기를 드릴 겸, 또 가정에서의 재림이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들을 겸 해서 어머니를 모신 거예요.”
어머니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둘러말하지만, 재림이 문제가 가정에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사실을 반박하기도 힘든 것이 워낙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아빠 엄마가 모두 밖에서 일을 하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는 탓에 아이들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재림이 형이 있는데, 나이차이가 좀 나는 형이에요. 걔가 재림이를 돌봐준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부모만큼은 되지 않았던 것 같네요.”
비겁한 변명이지만, 그래서 무작정 방치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는지 어머니 입에서 형 이야기가 나왔다. 그에 번뜩 생각이 났다는 듯, 선생님이 물었다.
“아, 그런데 혹시 말이죠. 굉장히 실례가 될 수도 있는데, 혹시 아버지께서 담배를 태우시나요?”
“아, 예. 조금.”
“집안에서 태우시나보죠?”
어머니의 눈이 심상치 않게 흔들렸다.
“무슨 일 때문에··· 혹시!”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냥 재림이 옷에서 가끔 담배 냄새 같은 게 나서 말이에요. 집 안에서 담배 태우시는 어른이 계시면 가끔 옷에서 그런 냄새가 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여쭤본 거예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재림 어머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셨다. 정말 깜짝 놀랐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머니는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그 문제 때문에 종종 아이 아빠랑 다투거든요. 여름에는 그래도 가끔 밖에서 태우시는데, 겨울에는 집안에서 창문만 열어놓고 태우곤 하셔서요. 연기가 옷에 밴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애 아빠가 고집이 조금 세셔서···.”
선생님은 괜히 집안 분란을 만든 게 아닌가 싶어 머쓱한 마음에 식어가는 녹차를 입에 댔다. 하지만, 아이 옷에서 담배 냄새가 배일 정도라면 지적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재림이가 조금 반항적인 모습도 보이는데 너무 심각한 문제만은 아니에요. 조금 빠르긴 해도 이 나이 때에 사춘기가 오는 아이들도 있거든요. 아시겠지만, 사춘기는 반항을 시작하는 나이기도 하니까요.”
선생님은 말을 고른 뒤, 어머니를 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이야기한 문제지만, 원인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평소와 다르게 불량하다거나 반항한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를 다그치는 것은 좋지 않을 수 있어요. 다만 아이들이 너무 엇나가지 않게 그 때 그 때 지적해주고 훈계해주는 게 중요해요. 그래야 아이가 너무 엇나가지 않거든요.”
그 이후로도 선생님은 재림의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설명하며, 재림의 교육에 대한 가정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함을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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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수, 너 반항하니?”
하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명수가 찔끔하며 입에 물었던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선생님이 뭐랬지?”
“···쩝쩝 소리 내지 말고 먹으라고요.”
“알면서 왜 그래? 일부러 선생님 열 받게 하려고 그래? 분명히 말했잖아. 식탁 예절을 지키라고. 식탁 예절은 어른들과 있을 때만 지키는 게 아니라, 너희 친구들끼리 있을 때도 지켜야 하는 거야. 옆에 단유 봐라. 얼마나 조용히 먹니? 니가 늘 배고파하는 건 알겠지만, 밥 먹는 동안 듣기 불편한 소리를 내서 상대가 불쾌해한다고 생각해봐. 그 상대가 너랑 같이 밥을 먹고 싶겠니? 그런데 니가 그걸 안 고치면 어떻게 되겠어? 너랑 같이 밥 먹을 사람 없어지겠지? 그러다 나중에는 너 혼자 밥 먹어야 할지도 몰라. 너 혼자 밥 먹는 게 얼마나 외로운 지 알아? 내가 니들 오기 전에, 여기서 혼자 살 때 혼자 식탁에 앉아서 혼자 만든 반찬으로 밥 먹는데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기 때문에 너한테 이런 이야기 하는 거야. 지어내는 게 아니라고. 그 심정을 알기 때문에 니가 그런 외로움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거라고.”
이후로도 하은의 이야기는 줄줄 이어졌고, 그 사이 단유는 조용히 식사를 마쳤고, 하지만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명수는 숟가락을 들지 못하고 식어가는 국을 바라보았고, 뒤에 서서 바라보던 아주머니는 차마 끼어 들 틈을 찾지 못해 안타까운 눈으로 명수를 바라봐 주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냥 이런 모습이 이 집의 일상이었다.
대신 아주머니는 국이 담긴 냄비를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