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웨이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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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령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교과 담당만 맡는 교사들의 경우와 달리 담임교사들은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피로를 호소하기 마련이다. 특히 갓 담임을 맡은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하하 호호 웃으면서 꿈과 이상의 판타지적인 교실을 꿈꾸며 학기를 시작했다가, 곧 현실을 깨달으면서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경우도 있고 더러는 아예 교직생활을 관두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 경험과 노련미가 쌓이게 되면, 부처님처럼 아이들을 손바닥 위에 놓고 굴릴 수 있는 스킬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특히 다년간의 노하우가 쌓이면서, 여타의 선생님들이 말하는 수업 진행의 부담이라는 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로 교육부에서 개선책이랍시고 몇 가지 내놓는 특이한 수업지도서 때문에 머리를 감싸 쥘 때도 있지만, 이 역시도 어느 정도 지나면 별 의미가 없어졌다.
“자, 다음 41페이지 문제 있지? 선생님이 시간 줄 테니까 1분 안에 풀어보기, 시작!”
아이들은 익숙하게 노트에 문제를 적고 풀어보기 시작했다. 노트 위에 흑연이 새겨지는 소리가 사각사각 대며 교실을 채울 때, 몇몇 아이들은 샤프 대신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했다.
“자, 훈이랑 미진이랑 나와서 칠판에 풀어 봐요.”
두 아이가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설 때, 몇몇 아이들은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생각했고, 몇몇 아이들은 무사히 넘겼음에 안도했다.
교과서가 개정될 때마다, 수학의 난이도가 조금씩 어려워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초등학교 수학이라는 게 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경자선생님은 능숙하게 아이들을 지도해 나갔다. 가끔 시선이 단유에게로 갔지만, 여태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있었던지라 가볍게 무시했다. 단유도 별로 수학시간이나 과학시간, 아니 거의 모든 시간에 튀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선생님도 안심하고 거를(?) 수 있었다.
“훈이는 들어가고, 미진이 넌 여기가 틀려서 답이 딱 안 맞게 나오는 거야. 여기서는 더하기를 해줘서 풀어줘야지. 그러면 ···이렇게 답이 나오지? 여러분들도 알겠죠?”
“예!”
“미진이도 이제 들어가.”
미진이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 선생님은 다음 페이지를 펼치고 수업을 진행했다.
모든 아이들을 사랑과 정성을 격려하는 것은 초임교사들만의 것이었다. 조금 경험이 쌓이면 초등학생이라고 부르는 이 나이때 아이들의 본성과 특성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마냥 격려하는 게 도움이 되지 않고, 때로는 엄하게 벌을 줄 필요도 있음을 알게 된다. 지침상 매를 들지 않지만, 매를 들지 않고도 아이들을 혼낼 수 있는 스킬에 매년 레벨업했다.
“재림이, 넌 니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몰라?”
“······.”
“대답 안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널 용서해 줄 것 같아? 안 해줄 것 같아?”
“······”
“응?”
“···안 해줄 것 같아요.”
“그러면 대답을 해야겠지?”
“네.”
“니가 뭘 잘못했어?”
“수업시간에 떠들었어요.”
“또?”
“앞에 앉은 애랑 장난쳤어요.”
“수업시간에 정구랑 장난쳤지?”
“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장난치지 말라고 했는데도 선생님 지시를 어겼고, 니가 장난치면서 떠드는 바람에 니 짝이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지? 또, 선생님이 수업 중간에 너 때문에 수업을 멈추면 다른 친구들도 수업을 계속 못하니까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지? 니가 잘못한 게 맞지?”
“···네.”
“교실 뒤로 가서 10분간 손들고 서 있어. 그리고 앞으로는 수업시간에 떠들지도 않고, 장난도 안치겠다고 속으로 반성하고 있어야 돼. 알았지?”
“네.”
“다음에 또 떠들면 학교 끝나고 남아서 선생님이랑 상담해야 돼. 알았니?”
“네.”
“어떻게 한다고?”
“학교 끝나고 남아서 상담이요.”
“떠들면 안 되겠지.”
“네.”
“뒤로 가서 손들고 서 있어.”
아이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누차에 걸쳐서 지적하고 반성하게 한다. 마음 같아서는 파블로프의 실험처럼 매를 통한 조건 형성으로 아이들을 훈육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몸으로 체감하기 때문에 더 효율적일 수도 있었다. 그 정도 훈육이 아이들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시대가 어떠한가? 잘못하면 교육부 감찰이 아니라 경찰서 조서를 마주해야 할 일이니, 몸을 사릴 뿐이었다.
개성 강한 아이들을 모아놓은 교실에서 천편일률적인 교육환경을 구성하여 통제하고 교육하는 현 교육계를 비판할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자기가 뭐라고 한 마디 한다고 해서 바뀔 일도 아니었기에 이 선생님은 오늘도 철저히 교과지도서의 틀에 맞춰 자신의 노하우를 듬뿍 첨가한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대부분 아이들은 잘 따라오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 몇몇 아이들이 재림을 중심으로 뭉쳐서 수다를 떨었다.
“너 졸라 짜증났겠다.”
“아니, 별로.”
재림은 먼 산 바라보는 표정으로 느긋하게 대답했다.
“왜? 선생님한테 졸라 혼났잖아? 나라면 졸라 짜증 날거야.”
“난 좋던데? 뒤에 서 있으면, 책 안 봐도 되고 문제 안 풀어도 되잖아.”
의자를 기울여 두 다리만으로 중심을 잡게 만들면서 앞뒤로 흔들거리는 재림은 여유만만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오, 졸라 대단해.”
“됐고, 점심 때 우리 팀 누구누구하기로 했어?”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함께 할 축구시합의 멤버 구성에 열을 올렸다. 그들의 머릿속에 선생님의 훈육 따위는 한 톨이라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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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지금부터 반장선거를 시작해요. 우선 후보자들 나와서 자기 소개하자. 출석번호 순으로 하고, 우선 민기부터 앞으로 나와.”
1반의 반장 후보는 모두 5명이었다. 이전 학년과 달리 꽤나 많은 아이들이 입후보하여 경쟁을 펼쳤다. 아이들은 각자 집에서 공들여 준비한 듯 더듬지도 않았고, 유머를 섞어가면서 자신의 공약을 설명했다. 진지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선거공약들을 설명했다. 개중에는 단유의 반에서 시행했던, ‘고맙습니다’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어서 반의 화합을 도모하겠다는 아이도 있었다.
“자, 그럼 각자 마음에 드는 사람 이름을 적어서 선생님이 지나갈 때 투표함에 접은 종이를 넣도록 해요. 종이는 두 번만 접어야 돼요. 알았죠?”
단유는 무심코 이름을 적으려다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는 반장의 역할에 대해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차피 반장이 이런 저런 공약을 내걸어봐야 그대로 시행되는 것은 거의 없었고, ‘우리 반이 더욱 활기찰 수 있게 하겠습니다’ 같은 모호한 공약 따위는 있으나마나한 이야기였다.
반장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수업시간 전후로 선생님께 인사하는 정도? 그리고 학급회의 진행을 맡는 정도가 반장 업무의 70, 80%는 될 것이다. 그러니 누가 반장이 되던, 단유에게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아이들도 비슷하게 생각하던 바였다.
그러나 지난 학년에서 직접 겪은 바, 그리고 지난 겨울의 일들을 통해서 느낀 바, 아무나 반장으로 뽑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하면 그냥 이름만 반장인 채로 남을 수 있는 직책이지만, 하고자 한다면 보다 얼마든지 반장의 직위를 이용해 무언가를 바꿀 수도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5학년이 되고 5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반장 선거에 입후보한 것에도 그런 의식의 변화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비록 단유는 ‘조용한’ 생활을 꿈꾸기 때문에 극적인 변화나 무리한 개혁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치게 적극적인 공약을 내거는 후보들은 제외하고 싶었다. 괜히 불붙여놓고 수습도 못하면, 피해는 반 아이들이 책임져야 할 테니까.
가령, 두 번째 후보였던 성재라는 아이는
“반의 환경 미화를 위해 아침과 오후 두 차례 뿐만 아니라, 점심시간에도 청소당번을 만들어서 깨끗한 교실을 만들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 공약은 듣기에는 좋지만, 수행해야할 아이들의 피로도는 전혀 고려치 않고 있으니 따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선생님은 이 공약이 나왔을 때 눈을 반짝였다.
네 번째 후보였던 현화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매 주마다 원하는 짝과 앉을 수 있도록 건의하겠습니다!”
라고 공약을 내걸었는데, 일단 그 번거로움은 차제에 두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대원칙인 선생님의 방침에 위배되는 공약이었기에 실현 가능성 제로였다. 그런 공약을 내거는 것 자체가 아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실현 가능성을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았음을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었더니, 막상 적을 이름이 마땅치 않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종이는 여전히 빈 종이였고, 선생님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단유는 고심하다 결국 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냈다.
“···이렇게 해서 반장은 총 15표를 얻은 박경호가 우리 반 반장이 됐어요. 다들 박수.”
아이들은 신나게, 혹은 기계적으로 박수를 쳤다. 경호는 앞으로 나와서 꾸벅 인사를 한 뒤, 당선소감을 발표했다.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우리 반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경호의 공약은 사이좋게 지내는 반을 만들기 위해, 대화의 시간을 따로 만들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하겠다는 공약이었다. 한 마디로, ‘잘 모르겠지만 듣기에 좋은’ 공약이었다. 4학년 국어 시간에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발표할 법한 내용이었다.
담임선생님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애들 선거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뒤에 남은 PA, 학부모회가 중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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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고야, 가자!”
명수가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잠깐만, 가방 덜 챙겼어.”
단유가 가방에 책을 집어넣고 있는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야, 인명수. 니네 반도 아닌데 마음대로 들어오고 그러지 말자. 응?”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명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이는 다름 아닌 재림이었다.
“뭐?”
명수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되묻자, 재림이 피식 웃으면서 명수에게 다가갔다.
“내가 한 두 번은 참아줬는데, 왜 계속 니네 반인 것처럼 들락날락 거리냐? 니네 집에는 아무나 막 들어와도 아무 말 안하냐?”
재림과 명수가 눈을 맞대고 섰다.
“아, 맞다. 니네 집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 나도 한 번 찾아갈까? 자원봉사 점수도 얻고 그래볼까?”
“이 새끼가!”
명수가 눈을 뒤집으며 재림의 멱살을 붙잡자, 동시에 명수의 멱살을 붙잡는 재림이었다.
“야! 성재림, 인명수! 너희 둘 뭐하는 거야!”
교사 책상에서 잡무를 보던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이 교실을 빠져나가느라 소란스러웠던 탓에 앞에 계신 선생님의 존재를 잊어먹고 난리를 벌인 두 아이였다.
“둘 다 앞으로 나와!”
아이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하교길 이벤트(?)를 감상하기 위해서 시선을 돌렸다.
“누가 교실에서 싸우랬어? 응? 그리고 인명수, 넌 왜 남의 반에서 싸움질 하는데?”
명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안 싸웠는데요?”
“멱살 잡은 것도 싸운 거나 마찬가지야! 성재림, 너는 선생님이 교실에서 싸우면 어떻게 한다고 했던 말, 기억해, 못해?”
“······.”
시선을 아래로 떨군 재림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한 번 세게 쥐었을 뿐이었지만, 선생님은 이를 미처 보지 못했다.
“이게 또 대답 안하네? 대답안하면 선생님이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
재림은 명수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명수가 먼저 시비를 걸었어요.”
“야, 내가 언제···.”
어금니를 꽉 문 선생님은 손바닥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조용! 선생님 앞에서도 싸울 거야? 선생님이 그랬지? 이유 불문하고 교실에서 싸우면 가만 안두겠다고. 누가 시비를 걸었던, 교실에서 싸움을 하려는 자세가 나쁜 거라고, 선생님이 이야기를 했어, 안했어?”
“······.”
“죄송합니다.”
대답은 명수에게서 먼저 나왔다. 보육원에서 단체 생활을 하는 동안 숱하게 지적을 받고 혼나면서 컸던 명수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체득했던 아이다.
선생님은 시선을 돌려 재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재림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세만 보면 정말 재림이 억울한 일을 당한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뒤에서 바라보던 단유의 눈에 재림은 그저 선생님 앞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오랜 경력의 선생님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런 반항아 기질의 아이를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성재림, 대답안하지? 명수 너는 빨리 집에 가. 그리고 성재림, 넌 남아. 알겠어?”
명수는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싸우지 않겠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인지, 척척 나오는 사과와 인사를 들으며 단유가 쓴 웃음을 지을 때, 명수가 뒤돌아섰다. 단유가 손짓을 하자, 명수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단유에게 달려왔다.
“가자.”
두 사람이 뒷문으로 빠져나갈 때, 재림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두 소년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