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62화 (162/956)

뉴웨이브(2)

-------------- 162/952 --------------

저녁식사를 마친 뒤, 하은이 두 사람을 앞에 앉혀두고 점검을 했다.

“방학숙제는 다 챙겼지?”

“네.”

“내일 아침에 아침 먹고 바로 차 탈거니까, 명수는 일찍 일어나서 씻고 준비해야 돼. 알았지?”

“네.”

“학교 마치면 그 때는 너희들이 스스로 돌아와야 돼. 길은 알지?”

이미 며칠 전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돌아오는 방법에 대해 배운 두 소년이었다. 명수가 조금 걱정은 되지만, 단유가 있으니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하은은 그 외에도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며 당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나한테 전화해야 돼. 알았지?”

하은은 보육원을 벗어난 두 아이가 새로운 질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 동안은 거의 반쯤 집에 가둬놓고(?) 생활해 왔던 터라 걱정이 덜 됐는데, 내일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생활을 맞이하는 것인지라 두 아이는 물론, 자신 역시 걱정이 많았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굳이 피하려들지 않았다. 이제는 두 아이의 뒤를 봐줄 ‘선생님’으로서의 의젓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내일부터는 학교 마친 뒤에 선생님이랑 같이 공부할 거야. 특히 명수 너는 공부 좀 많이 해야 되겠더라. 그치?”

명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면서 명수의 어깨를 톡톡 쳐주었다.

“단유는 추가로 1시간 더 공부할거야. 그 때는 지난 방학 때 배웠던 공부의 연장이다. 오케이?”

“네.”

잘된 일이었다. 이번 방학 때도 과외를 하려 했지만, 이러저러한 일들이 터지면서 시간이 마땅치 않았기에 할 수 없었던 공부였다. 학교 공부쯤이야 널널하게 해도 시간이 남아도는 편이니, 따로 ‘선행학습’을 더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늦잠 자면 용서 안 할 거다.”

특히 명수를 바라보는 하은의 눈빛에 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자기 방으로 해산!”

“저기, 선생님!”

명수가 손을 들었다.

“왜?”

“오늘 마지막 날인데, TV보면 안돼요?”

하은은 명수를 보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만 제대로 챙겨놓고 봐라.”

명수가 헤벌쭉 웃었다. 빨리 서두르면 5번에서 하는 일일드라마는 볼 수 있으리라.

****

특별한 일이 있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너무나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개학식이었다. 단유는 5학년 1반에 배정되었고, 명수는 운명의 장난인지 5학년 2반에 배정되었다.

“누가 일부러 이렇게 하는 거 같지?”

명수는 투덜거리면서 옆 반으로 들어갔다. 단유도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늘 그랬듯이, 명수는 곁에 있었으니까.

5학년이 되면서 달라진 가장 큰 점은 아무래도 교실이 위치한 층이었다. 5학년 교실은 가장 위층인 4층에 있었다. 남는 교실은 교과전담실이나 영어실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6학년이 되면 본관 뒤의 별관 2, 3층으로 밀려나게 된다.

아무튼 가장 위층에 오게 되니,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게 되나 보다. 복도 맨 끝의 1반 교실로 향하던 단유가 지나가던 아이와 어깨가 부딪혔다.

“뭐야?”

옆의 아이와 장난치며 뛰던 아이는 마주오던 단유를 보지 못했고, 단유는 피한다고 피했는데, 좁은 복도 가운데를 뛰어다니는 아이에게서 완전히 피하지 못해 어깨가 충돌하는 사고가 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힘에 밀린 것은 뛰어오던 아이. 낯선 얼굴의 소년은 단유와 부딪히는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 했지만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소년의 입은 전혀 다행스럽지 않았다.

“사과 안 하냐, 이 새끼야?”

한 학년에 7개 반이다 보니, 5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못한 아이도 많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였다.

“니가 뛰어 왔잖아.”

“웃기고 있네, 봤으면 피하면 되잖아? 일부러 부딪힌 거잖아!”

첫날부터 이게 웬 소란인가 싶어, 아이들의 시선이 몰릴 즈음 명수가 교실에서 뛰어나왔다.

“석고야, 어? 너 뭐야!”

“명수네?”

어깨를 부딪쳤던 아이가 명수를 알아보았고, 명수의 호명에 자기 앞에 선 아이가 단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니가 단유냐? 야, 공부 잘하면 다냐? 공부 잘하면 어깨 치고 다녀도 돼?”

“억지 부리지 마. 난 분명히 피했어. 지금 내가 선 자리도 복도 가장자리야.”

“말빨 죽이네. 이···.”

이 때 명수가 끼어들었다.

“성재림, 까불지 마라. 니가 뭔데 석고한테 시빌 걸어?”

“너야말로 끼어들지 마. 내가 피해자거든?”

단유는 소란이 더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고개 숙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명수야, 넌 그냥 들어가. 난 괜찮으니까.”

“석고야.”

단유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명수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턱을 살짝 내리고 다리를 벌려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짧은 한숨을 쉰 단유가 다시 재림을 쳐다보았다.

“이 와중에 니가 뛰어오는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리도 없고, 그런데도 이렇게 우기면 너만 망신이야. 대신 첫날이니까 그냥 없던 일로 하고 조용히 넘어가자.”

“웃기고 있네, 니가 뭔데 조용히 하라 마란데? 응?”

어느새 1반과 2반 아이들은 물론 다른 반 아이들까지 슬금슬금 모여 들면서 신학기 맞이 특급 이벤트를 구경하기 위한 인파가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유는 이벤트 진행자도 아니었고, 이런 이벤트를 신청한 적도 없었다. 도리어 아이들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심정.

단유는 한 발 다가갔다. 재림도 물러서지 않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단유가 조금 더 큰 편이지만, 거의 비슷한 신장의 두 사람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가깝게 마주섰을 때, 재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새끼, 한 번 붙을래?”

“너, 싸움 잘 해?”

단유가 날씨 어떠냐고 묻는 듯 덤덤히 물었다. 그 침착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재림이 단유의 멱살을 쥐려 할 때, 단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절묘한 타이밍에 물러서는 바람에 재림의 손은 허공을 갈랐고,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댔다.

그 때, 오른손을 내밀어 허공을 방황하는 재림의 손목을 붙잡은 단유는 그대로 안으로 잡아 끌었다. 중심을 채 잡지 못했던 재림이 어어, 거리면서 앞으로 넘어지려 할 때, 단유는 친절하게 어깨로 재림을 받았다. 턱이 어깨에 부딪히며 자세가 무너지려던 재림. 손목을 끝까지 붙잡고 있던 단유가 손을 치켜들면서 재림이 넘어지지 않도록 도왔다. 그리고 어깨에 기댄(?) 재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니가 잘못한 거야.”

재림의 손목을 있는 힘껏 쥐려던 그 때,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니들 뭐하는 거야!”

정어리 떼처럼 모여 있던 아이들은 상어 같은 선생님의 등장에 와, 하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단유도 때를 같이하여 손목을 놓아주었다. 재림은 얼른 몸을 추슬러 바로 세운 뒤, 단유를 노려보다가 교실로 들어갔다. 단유는 그 모습을 보다가 한 숨을 쉬고는 뒤를 따라갔다. 불행히도 같은 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소리를 지르며 복도를 가로지른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5학년 주임이자 1반 담임을 맡은 이경자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이 뭉쳐있던 와중에도 가운데서 싸우던 아이들의 모습을 목격했던 선생님은 곧 탐문을 벌였고, 달리 조사할 필요도 없이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사람은 앞에서 1등이라고 떠들던 아이고, 한 사람은 뒤에서 1등이라고 떠들던 아이네. 서로 1등끼리 한 번 붙어 본 거야? 제발 얌전히 좀 지내라, 알겠니? 우리 반에서는 성적 불문, 이유 불문하고 싸우면 무조건 상담실에서 반성문 100장 쓰게 만들 거다. 알았니?”

단발에 검은 스모키 화장을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다크 서클의 중년 담임선생님은 그렇게 가벼운(?) 엄포를 놓은 뒤, 두 사람을 자리에 앉혔다.

“한 사람이라도 주먹질했으면 가만 안두겠지만, 첫 날이라서 적당히 봐준 거야. 특히 너, 선생님이 두고 본다.”

선생님들 사이에서 다른 의미로 유명했던 재림은 입을 삐죽이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건들거렸다.

“자세 바로 안하지? 응? 손 빼라.”

재림은 손을 책상 위에 턱 하고 올렸다. 담임은 엄지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다가 신경 끊는 게 상책이라는 듯, 시선을 돌려버렸다.

출석부를 교탁 위에 올려놓은 담임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고 아이들의 자기소개시간까지 이어졌다.

“김단유라고 합니다. 취미는 독서이고 특기는 없습니다.”

“특기가 시험 100점이라던데?”

선생님의 너스레에 아이들이 우우, 하는 야유를 보냈다.

“시끄러워, 다음.”

“손연미라고 합니다. 취미는 그림이고 특기는 춤입니다.”

“와!”

반에 반드시 10명 이상은 춤을 특기로 삼는 풍속이라도 생긴 걸까, 담임은 머리를 긁적이며 계속 소개를 이어나갔다.

“성재림이고요, 취미는 ···오락이고요, 특기는 권투입니다.”

“체육관에서 배우는 거니?”

“···아니요, 집에서 혼자 연습하는데요.”

어쩐지 ‘집’이 아니라 ‘스트리트’라고 말할 것 같은 인상이었지만, 담임으로서 체통을 지키기 위해 더 캐 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긴 자기소개가 끝난 뒤, 선생님은 학생들의 자리를 지정해주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인증된 가장 확실하고 반발이 덜 나는 순서는 바로 ‘키순서’였다. 이 지루한 작업은 매 학년 첫 학기마다 진행이 되는데도 적응이 잘 되지 않았고, 늘 어수선했다. 교실 앞뒤로 남녀를 키순서대로 줄을 세우고, 음표 마디를 구분하듯 분단을 구분해서 자리에 앉혔다.

성장기 아이들의 키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기 때문에 작년에 앞에 앉았던 아이가 한 학년이 지나면 제일 뒷자리에 앉기도 했다.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인 아이들이지만, 제일 뒷자리는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먼 자리라는 특혜가 주어지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탐을 내는 자리였다.

그리고 올해 뒷자리의 영광을 거머쥔 사람 중에 단유와 성재림이 있었다. 단유가 방학동안 또 한 번의 폭풍 성장으로 160을 향해 다가가는 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성재림 역시 단유와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고,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줄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짝이 된 것은 아니었다.

“반가워.”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털털하게 인사하는 사람은 단유의 새로운 짝이 된 공소연이었다.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긴 머리에 진한 눈썹이 특징적인 여자아이였다.

“니가 그 유명한 단유구나. 우리 엄마가 니 이야길 많이 하더라.”

단유는 지금껏 그와 같은 이야기를 수십 번 들었음에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왜 모두들 자기 어머니가 자길 이야기했다고 이야기할까? 자신은 그 엄마들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없는데 말이다.

“나도 반갑다.”

그렇다고 방긋거리는 새 짝에게 캐물어 볼 수는 없으니, 평범하고 짤막하게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 와중에 그녀의 머리 건너편으로 날카롭게 쏘아보는 재림의 시선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일단은 참아보기로 했다. 올해도 단유의 목표는 ‘조용히’ 1년을 보내는 것이었다. 시끄럽고 야단법석인 상황은 결코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아침의 일은 불길함의 징조였을까, 아니면 액땜이었을까?’

속으로 미래를 점쳐보는 단유였다.

****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이 첫날의 풋풋함 따위는 모두 교실에 남겨두고 지긋지긋한 학원과 체육관으로 일상을 전전할 때, 일단의 무리는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아파트로 향했다. 그 아파트에는 외따로 떨어진 놀이터가 있었는데, 어느 곳이나 비슷하겠지만, 이런 장소에 위치한 놀이터는 심심한 일상에 일탈을 꿈꾸는 아이들의 아지트가 되기 일쑤였다.

“후, 정말 짜증나네. 아침부터 별 개 같은 놈이 엉겨 붙는 바람에 기분 잡쳤어.”

“야, 나는 진짜 큰 일 나는 줄 알았다. 단유 걔, 오늘 완전 사망각이었는데, 그치?”

“킥킥, 걔가 재수가 좋았지. 그 때 딱 선생님 올 줄이야. 혹시 몰래 지켜보다가 걔 죽을 거 같으니까 나타난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네. 1등하는 애니까 선생님도 좋아하잖아?”

“씨발, 1등이 뭐 대단하다고.”

“그래, 너도 1등이다. 뒤에서 1등.”

아이들은 놀이터 가운데 위치한 미끄럼틀 아래의 좁은 공간에 모여서 입으로 하얀 뭉게구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천장에 부딪힌 구름이 스멀스멀 움직이면서 미끄럼틀을 감싸고 오르더니 원뿔 모양의 지붕의 끝에 다다를 쯤에는 스르르 흩어져 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