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61화 (161/956)

뉴웨이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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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떤 사람은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우연이 아닌 선택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선택의 순간에는 그런 명언 따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선택의 순간,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단지 마음가짐이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노라는 마음가짐.

명수는 그런 마음으로 선택했다.

“이 공으로 주세요.”

하은은 똑같아 보이는 축구공들을 늘어놓고 고민하는 명수가 이해되지 않았고, 그 공들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사장님의 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만의 대화를 통해 명수가 선택을 내리는 순간만큼은 기뻤다.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는 쇼핑은 쇼핑이 아니었다.

“일시불이요.”

공을 붙잡은 명수의 표정은 흡사 먹이를 노리는 부엉이 같았다. 동그랗고 새까만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레이저가 축구공을 뚫을 듯 하니, 하은은 명수가 그간 공을 많이 차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건 일정부분은 사실이기도 했다.

공을 산 다음날, 명수는 아침부터 공을 붙잡고 밖으로 나가더니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한참이 지나도록 들어오지 않는 명수가 걱정돼서, 전화를 해보려던 찰나, 오피스텔 현관의 문이 철컥거리며 명수가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라는 질문에 명수는 공을 붙잡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공 찰 데를 찾느라고요.”

그러고 보니 근방에 공을 찰 만한 곳이 없던 것 같기도 했다. 공을 차려면 아무래도 넓은 공터가 필요한데, 주변에 작은 동산에 마련된 공원은 있어도, 학교 운동장 넓이의 공터는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갔던 거야?”

“다 둘러봐도 없기에, 그냥 저기 뒤에서 트래핑이나 했어요.”

명수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공원이 있었다. 명수는 공원 내에 배드민턴용으로 마련된 좁은 땅 위에서 트래핑이나 간단한 드리블링을 하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제대로 공 차려면 학교 가서 해야 될 것 같아요.”

명수는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시작했다.

“석고는요?”

하은은 방을 가리켰다. 명수는 고개를 주억이며 계란말이를 집어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참 맛있게 먹는 명수였다.

****

개학을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날 아침, 단유는 오늘도 아침 6시에 눈을 떴다. 간단히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한 단유는 옷을 갈아입고는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11이 되었을 때, 문이 열렸다.

“오늘도 부지런하구나.”

오피스텔 1층 로비의 관리데스크에 앉아있던 흰 머리의 경비원이 단유를 보며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단유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로비를 가로질렀다.

“새벽에는 차들이 빨리 다니니까, 차 조심하고.”

“예.”

단유는 미소로 답한 뒤, 오피스텔 로비 문을 열고 나갔다. 3월 1일임에도 여전히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는 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바로 앞 대로에서 새벽 버스가 실내등을 밝힌 채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단유는 소매를 걷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오피스텔에서 길 안쪽으로 두 블록 정도를 들어가면 작은 공원이 있었다. 오피스텔에서 공원까지 갔다가 공원 위의 산책로를 한 바퀴 돈 후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매일 반복하는 단유였다. 작은 동산이라도 경사가 조금 있어서 코스를 따라 달리면 약간 숨에 차는 정도였다.

등줄기로 땀이 조금 흐를 때쯤 돌아온 단유는 부스스한 머리로 TV를 보던 하은과 마주했다.

“단유 왔니?”

하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오른손에 든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우아하고 품위 있게 새끼손가락을 치든 자세로.

“씻고 올게요.”

단유는 방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거실로 나왔다.

“왜?”

“저희 국기 안 달아요?”

오는 길에 몇몇 집에 달린 국기를 보고 오늘이 3.1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3.1절에 국기를 계양한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보육원에 있을 때는 생활지도원이 알아서 국기를 계양했기에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오피스텔에도 국기 게양대에 국기를 꽂아 넣은 집이 몇몇 보였기에 하은에게 말한 것이었다.

“없어.”

“뭐가요? 국기요?”

“응.”

그렇구나.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곤 방으로 돌아가려다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럼 우리는 국기 게양 안 해요?”

하은은 단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우아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단유는 어쩐지 더 물었다가는 하은의 기분이 더 나빠지게 될 것 같아서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단유가 방으로 들어간 뒤, 하은은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주영아, 응 나야. 아니 별 일은 없고,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저기···오늘 국기 달아야 돼?”

한 동안 핸드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은은 주영의 마음이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

몸을 씻고 나온 단유는 마침 시간 맞춰 출근하시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한 뒤, 아침 식사시간 전까지 책을 읽었다. 고작 1시간이지만 그래도 글을 읽고 그 여운을 즐길 시간은 됐다.

이사 온 후, 좋았던 점은 자기가 읽고 싶었던, 혹은 읽으면 좋을 책들로만 구비된 책장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마도 재훈이 고르고 주영이 구입한 책일 것이다. 책의 가지 수가 도서관보다 작다고는 해도 당장 읽기에 무리가 없었다.

특히 재훈은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독서습관을 기르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런 이유로 준비된 책이 철학 서적이었다. 비교적 난이도가 높지 않은, 청소년 필독서 정도로 지정된 책들이었는데, 단유는 그 중의 하나를 아침마다 조금씩 읽으면서 지식을 쌓아나갔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좋은 말이다. 하지만 공자의 의도와는 조금 다르게, 단유가 학습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단지 배움의 기쁨에만 있지 않았다.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함에 있었다.

단유에게 학습이란 좋게 말하면 열정이고, 격하게 표현하면 투쟁이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공부법은 되도록 많은 책을 읽고 지식이든 상식이든 체계화시켜서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즉,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면서 행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부법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책은 그렇게 공부하면 안 된다는 재훈의 조언을 따라, 아침에 한 페이지나 두 페이지 정도를 읽으면서 그 챕터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부법을 익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러한 단련이 익숙하지 않은 단유였다.

‘마치 디아트리한테 배울 때랑 비슷한 것 같아.’

단유가 그렇게 동양 철학에 대한 몇 가지 지식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고 있을 때, 명수가 하품을 하며 방에서 나왔다.

“석고, 안녕?”

단유가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면, 명수는 거실로 가서 TV를 보는 하은의 곁에 앉았다.

“씻고 와.”

라는 하은의 말에

“예.”

라고 대답하면서 식사시간까지 함께 TV를 보는 일상이었다.

****

“아줌마, 이거 더 없어요?”

명수가 계란후라이가 담겼던 접시를 가리켰다.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두 개를 더 만들어 주었다.

“너 좀 있는 대로 먹어라. 다른 거 먹을 것도 많구만, 매번 아주머니 귀찮게 그래?”

“아유, 난 괜찮아. 애가 얼마나 먹고 싶으면 그러겠어?”

아주머닌 명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명수는 시금치를 집어먹던 와중에 아주머니를 보며 고맙다고 넙죽 인사를 하곤, 누가 집어들 새도 없이 순식간에 계란 두 개를 입안으로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너 요즘 부쩍 많이 먹는 것 같다?”

하은이 젓가락으로 김치 한 조각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운동하잖아요. 운동할 때는 많이 먹어도 돼요.”

“넌 먹으려고 운동하는 거지?”

“당연하죠.”

하긴 누군들 안 그럴까? 다들 먹고 살려고 일하고, 먹고 살려고 운동하는 거겠지. 하은이 나름의 방식으로 명수를 이해해보면서, 식사를 마쳤다.

“아, 단유야. 오전에 국기나 사러 가볼까?”

하은의 말에, 명수가 먼저 반응했다.

“국기는 왜요?”

하은은 쓰라릴 정도로 날카로운 눈매로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니?”

“오늘이요? 오늘 무슨 날이야? 석고 생일인가?”

“3.1절.”

단유의 대답에 명수가 이마를 치며 말했다.

“아차, 깜빡했네.”

저 어색한 말투라니. 깜빡이 아니라 전혀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굳이 그걸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명수와의 대화는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국가의 기념일에는 국기를 매다는 거야. 사실 선생님도 깜빡하고 있던 거라서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초등학생이 둘이나 있는 집에서 국기를 안 다는 것도 교육적으로 좋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 이유로 오전에 국기를 사서 게양하기로 결정했다. 고로 같이 갈 마음이 있니? 단유야?”

“전 왜 안 물어보세요?”

“명수, 넌 그냥 따라올 거잖아?”

“맞아요.”

헤헤거리는 명수를 잠깐 흘겨본 하은이 단유에게 물었다. 예의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단유가 말했다.

“저도 갈게요. 근데 어디로 가야돼요?”

하은은 잠시 인터넷으로 검색했던 바를 말했다.

“다른 데는 모르겠고, 주민 센터에서 국기를 판다고 하니까, 거기 가보려고. 멀지 않아. 저기 동산 아래에 주민 센터가 있다고 하니까, 거길 가볼 작정이야. 어때?”

“예. 그럼 아침밥 먹고 바로요?”

“선생님도 준비를 해야 되니까, 1시간 뒤에 나가자.”

하은이 방으로 들어간 뒤, 명수는 단유를 끌고 TV앞으로 갔다.

“왜?”

“이거 재밌어. 오늘 저기 저 여자가 시어머니한테 바람피운 거 걸리는 날이야.”

“그게 뭐야?”

“나도 잘은 몰라. 그런데 보통 이럴 때 시어머니가 여자를 때리는 데 그게 재밌어.”

방에 들어갔던 하은이 허겁지겁 뛰어나와서 TV를 껐다.

“야! 인명수! 너 아침에 TV시청 금지야! 절대! 알겠어?”

“왜요?”

힘없이 항변해보는 명수에게 눈을 부라리는 하은이었다. 찔끔 놀란 명수는 물가에서 쫓겨난 사슴처럼 방으로 들어갔다.

****

의외로(?) 주민 센터에 태극기를 사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잠깐을 기다려 국기와 깃대를 산 하은 일행은 아침 햇살을 맞으면서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창가에 걸린 깃대에 태극기를 꽂아 넣으니, 하은은 왠지 뿌듯했다. 두 아이를 책임진 ‘선생님’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만족감이었다.

“얘들아, 어때? 태극기가 바람에 날려서 펄럭이는 모습이 멋있지 않니? 막 애국심이 솟구치면서 나라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는 것 같지?”

“······.”

명수와 단유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국기가 말이야, 사실 그냥 그린 게 아니라는 거 아니? 각각의 문양에는 다 뜻이 있단다.”

하은은 다소 들뜬 목소리로 국기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태극문양의 의미와 건곤감리의 4괘의 의미로 시작해서, 태극기가 만들어진 유래와 관련된 비화까지 상식이 닿는 한까지 설명을 이어나갔다.

한참을 듣던 명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시험에 나오나요?”

“시험에 안 나와도 배워야 하는 거야.”

명수가 다시 손을 들었다.

“안 외우면 어떻게 돼요?”

“무식한 사람이라고 욕먹겠지?”

명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데.’

하은은 가만히 있는 단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단유야, 너는 궁금한 거 없어?”

“질문해도 돼요?”

“그럼 되지.”

“건이 왜 하늘이에요?”

“응?”

“각각이 상징하는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왜 그런 뜻인지 궁금해서요. 작대기의 길고 짧음으로 다른 무엇을 상징한다는 게 신기하고 궁금해요.”

하은은 가만히 단유를 바라보았다.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바깥에서 휘날리는 태극기에 시선을 주었다.

단유는 하은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선생님, 저 화장실 좀 갈게요.”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는 일어나 명수의 손을 붙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하은은 한참동안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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