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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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냈어?”
혜린이 수줍은 얼굴로 먼저 말을 건넸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답했다.
“응.”
“···많이 바빴어?”
“아니.”
“그렇구나.”
지켜보던 혜린의 어머니가 가슴을 두들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둘을 지켜봤다.
“어머니 입술이 떨리시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 엄마?”
혜린과 단유의 시선이 혜린 어머니에게로 모이자, 어머니는 호호 억지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차로 데리고 갔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단유에게 말을 걸어보는 혜린이었다. 지난 달 고대하던 생일파티가 허무하게 무산된 이후, 실의에 빠졌던 혜린이 모처럼 기운을 내서 나온 자리였다. 아침부터 이 옷 저 옷 고르느라 어머니의 신경까지 날카로워질 정도로 예민했었는데, 막상 단유의 얼굴을 보더니 묽은 죽이라도 된 것처럼 헤시시 웃으며 풀어지는 혜진이었다.
“그냥 똑같았어. 밥 먹고 책 읽고··· 그랬지.”
단유는 전혀 귀찮아서 대충 설명하는 게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잔뜩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내용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어머니가 룸미러를 통해 단유를 째려보지만, 단유는 미처 거기까지는 신경이 닿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유의 말을 쉽게 받아들였다.
“역시 단유답다. 난 엄마랑 여행 갔었어. 강원도에 바다 보러. 겨울바다가 좋다고 하길래, 엄마한테 졸라서 갔었어. 그치 엄마?”
“그, 그래. 좋았지.”
갑작스런 딸의 토스에 무방비 상태였던 어머니가 화급히 대답하며 딸의 자랑에 어울려주었다.
“저기 속초 해수욕장에 가서 바다 구경하는데, 바람이 차갑긴 해도, 파란 바다가 멋있었지.”
“응, 그래가지구 엄마랑 사진도 많이 찍고 그랬어.”
실은 실연(?)에 빠진 딸을 위로하기 위해 훌쩍 떠났던 즉흥여행이었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아름다운 겨울 바다에 혜린은 무척 만족했다.
“그리고, 겨울인데도 갈매기가 날아다니는데 걔네들은 춥지도 않은가봐.”
“원래 갈매기는 겨울철에 월동하는 대표적인 겨울새야.”
“아, 그래?”
당황해하는 혜린과 아무렇지 않은 단유와 그걸 룸미러로 지켜보는 어머니, 세 사람은 이후 소소한 잡담 없이 조용히 식당으로 이동했다.
****
“명수야, 점심 먹어.”
“네!”
명수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기 서서 먹을래? 얼른 와라.”
하은이 재차 독촉하니, 그제서야 아쉬운 발걸음을 떼는 명수였다. 거실 소파에서 식탁까지 열 걸음도 되지 않는데, 그 열 걸음이 마치 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신중하다.
“인명수!”
하은이 빽 하고 소리 지르니, 명수가 후다닥 자리에 앉는다. 하은이 턱을 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도 참 기인은 기인이다.”
“기린이요?”
“기린이 아니고 기인. 신기한 사람이라고. 어떻게 하루도 안 빠지고 TV에만 목매달고 사니? 지겹지도 않아?”
명수가 못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놀란 얼굴을 하고 되물었다.
“저게 어떻게 지겨울 수 있어요? 누나는 지겨워요? 재방송도 아니고 매일매일 새로운 프로가 나오는데 어떻게 지겨워요?”
하은은 못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다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잇어서 다시 명수의 고개를 돌렸다. 명수는 숟가락을 문 채로 TV를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붙잡혔다.
“너 축구 좋아한다고 안했니?”
“좋아해요.”
“그런데 왜 난 니가 이곳에 오고 나서 축구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운동도 안하는 것 같고.”
명수는 한쪽 팔을 식탁 위에 올리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 첫 번째로, 축구공이 없어요. 공 없이 어떻게 축구를 해요.”
“그럼 공 사달라고 하질 그랬어?”
“그래도 돼요? 에이, 미안하게 어떻게 그래요.”
하은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자신감 있게 말했다.
“공 사줄게. 축구 공, 당장 사줄 테니까. 운동 좀 해라.”
“두 번째 이유 때문에 조금 힘든 데요.”
“뭔데?”
“아침에 8시부터 드라마를 하더라고요. 그거 때문에 운동을 할 시간이 없어요.”
“그 전에 하면 되잖아. 단유도 아침 7시에 운동하러 나가지 않니?”
국을 떠먹으며 명수가 우물거리는 소리로 답을 했다.
“석고는 6시부터 운동하고 있어요.”
“그럼 그 때 같이 하면 되지.”
“졸려서 안 돼요.”
하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럼 오후에는?”
“만화할 시간이랑 겹쳐요.”
“만화를 저녁 내내 하진 않을 거 아냐?”
“만화를 저녁 내내 하는 채널도 있던데요. 근데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의아해하는 하은의 얼굴을 보며 명수가 답을 이야기했다.
“5시부터 6시까지 만화하구요, 6시부터는 ‘생생한 정보’라는 방송 보고요, 7시 반부터는 5번에서 일일드라마하고요, 8시 반에는 9번에서 일일드라마 하고요, 9시부터는 7번에서 퀴즈쇼보고요, 10시부터는 드라마 하는 데요, 11번에서 하는 드라마가 재밌다고 해서 그거 봐요.”
“됐다, 거기까지 해라. 듣고만 있어도 그냥 징글징글하다. 밥이나 먹어.”
명수는 히죽 웃으며 숟가락을 바삐 놀리기 시작했다.
‘대박이네, 대박이야.’
하은은 턱에 밥풀이 묻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밥술을 뜨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다음 목적지는 혜린이 그토록―단유와 함께―가고 싶어 했던 놀이공원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단유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저런 모습을 보면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귀한 인상의,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 남학생이었다. 그런데 유독 딸아이에 대해서만은 무신경하고 무감각하고 무정하기만 한 전형적인 나쁜 남자, 라고 어머니는 생각했다.
‘우리 애가 싫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객관적으로 봐도 혜린이는 날씬하고 예쁜 얼굴을 가진, 소위 아이돌 스타일이라고 어머니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혜린에게 무신경하기만 한 남자애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한 남자애가 지금 굉장히 곤란함 상황에 처했음을 혜린은 물론이고 혜린의 어머니도 알지 못했다.
“자, 차에 타.”
그 말에 단유는 식은땀을 흘렸다. 단유는 이제껏 이렇게 차를 모는 사람을 본 적도 없었고, 타 본 적도 없었다.
지금까지 단유가 타 왔던 보육원 승합차는 오랜 경력의 보육교사가 아이들의 안전과 원활한 등교를 위해, 정속주행과 널찍한 안전거리 확보를 통한 안정적인 제동과 가속이 이루어지는 운전이었다. 게다가 자동차로는 그리 멀지 않은 등하교길이다보니 그렇게 멀미가 날 정도로 오래 차를 타지 않았었다.
그런데 혜린의 어머니의 차는 남달랐다. 단유는 갑작스런 제동―사실은 룸미러로 아이들의 반응을 연신 살피다보니, 앞차와의 거리를 종종 놓치면서 발생한 일―과 급작스런 가속―사실은 혜린에 대한 단유의 반응에 속이 울컥하다보니 과하게 힘이 들어가면서 발생한 일―에 노출되면서 심한 멀미를 느꼈다. 차에서 내렸을 때는 조금 괜찮아지나 싶었는데 다시 어머니의 차를 타려니 타기도 전에 멀미가 나고 어지러운 것이었다.
“저기 조금 쉬었다고 가시면 안 될까요?”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단유는 미련하게 뒷자리에 몸을 묻었다.
“어머, 단유야? 얼굴이 조금 흰 것 같은데 괜찮니?”
미숙한(?) 운전 때문에 생긴 멀미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단유였다. 그저 장거리 운행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만 생각한 단유는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봐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희미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괜찮아?”
혜린이 소곤거리며 묻자, 그제야 어머니에게 들리지 않게 속내를 밝혔다.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 조금 있으면 괜찮을 거야.”
혜린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는 놀이 공원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욕심이 앞선 탓이었다. 참으면 된다니까, 조금 힘들더라도 놀이공원까지 간 뒤에 천천히 쉬면서 놀면(?)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이윽고 놀이공원에 도착했을 때, 단유는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다. 이는 마치 예전에 절벽에서 떨어질 때 느꼈던 공포보다 더 한 기분이었다. 지금 같아서는 차라리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말지, 저 차를 한 번 더 타진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돌아갈 때 다시 차를 타야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닿자 속이 메슥거렸다.
“괜찮니?”
혜린의 어머니가 부쩍 하얗게 변한 얼굴의 단유를 보며 물었다. 단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혜린을 보았다. 혜린의 미간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괜찮아요. 나 괜찮아. 가자.”
세 사람은 공포와 스릴로 가득한 놀이공원에 입장했다.
그 곳은 신세계였다. 여태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사실 듣기는 했다. 그러나 듣던 것과 보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그리고 보는 것과 겪는 것은 또 달랐다.
‘다양한 경험이 지식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고 했던 하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전까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지식을 단유는 얻었다.
‘멀미를 할 때는 놀이기구를 타선 안 된다.’
고양이 귀가 달린 머리띠를 매고 환하게 웃는 혜린 옆에서, 공중으로 비산하는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지는 줄도 모르고 비명을 질러대는 단유와, 그 둘을 웃으며 바라보는 혜린의 어머니는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거 먹을래?”
“아니, 나 물만 조금 마실래. 아까 너무 많이 먹었던 것 같아.”
혜린이 츄러스를 입에 물고 헤실헤실 웃을 때, 단유는 작은 물병을 입에 물고는 급히 수분을 섭취했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들어가니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심각하게 타격을 받은 내이(內耳)의 전정기관, 반고리관은 쉽게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저것만 타고 가자. 시간이 늦었어.”
혜린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가리킨 것은 ‘바이킹’이라는 놀이기구였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주위를 아득히 메우고 있는 무시무시한 놀이기구였다. 다가갈수록 커져가는 비명소리만큼이나 단유의 이마에 땀방울이 솟아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났다. 왜 거절을 못하는 것일까. 그냥 타기 싫다고 하면 안 될까?
“단유야, 아쉽다. 그치?”
타기도 전에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니, 단유는 타기 싫다는 말을 하기 어려웠다. 혜린의 어머니가 혜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야. 알겠지?”
처음에는 틱틱거리는 것처럼만 보이던 단유가 중국집에서 나온 뒤부터는 얌전하게 혜린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맞춰주는 모습이 기꺼웠다. 게다가 혜린이도 처음에는 조금 머뭇대더니, 점점 자신이 주도해서 단유를 데리고 놀이공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타고 다니며 즐거워했고, 그런 모습을 보니 자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바이킹에 올라탄 두 사람은 제일 뒤에서 4번째 줄에 앉았다. 제일 뒤는 고수들만 탄다고들 하는데, 사실 나이 어린 두 사람의 안전상 가운데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별반 차이는 없었다.
“꺄아!”
“엄마!”
바이킹에 탑승한 사람들에게서 각종 비명과 탄식과 감탄과 고성이 텅 빈 허공을 채워가는 와중에, 단유는 무던히도 참고 참았다. 입술을 깨물고 안전바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배에 힘을 주었다. 눈앞이 캄캄했다가 하애졌다를 반복했고. 숨이 멈추기를 반복했다.
비명이 잠잠해지고, 안전요원의 설명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고, 바이킹이 바닥에 안전히 착지했을 때도, 단유의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줄을 이어 바이킹에서 내려왔을 때, 혜린의 어머니가 다가와 물었다.
“재밌었니?”
“네!”
혜린이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어머니에게 달려들 때, 단유는 놀이기구 왼편의 화단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단유는 생애 처음으로 놀이기구타고 구토하는 경험을 했다. 주위에 자기 같은 사람이 몇몇 더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고집부리지 말걸.’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라던가? 괜히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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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은 오늘 일을 단유에게 들은 뒤, 간단하게 답했다.
“허세부렸네.”
“네?”
히죽 웃음을 짓던 하은은 다리를 꼬고 있던 자세를 풀면서 단유를 바라보았다.
“‘여자친구’ 앞에 있다고 억지로 참았던 거 아냐?”
“억지로 참기는 했지만, 허세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여자 앞에서 보기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 아냐? 그게 바로 허, 세 라는 거예요. 하여튼 남자들이란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다 똑같애. 어떻게 하는 짓이 다들 그렇대? 어떤 남자는 화장실 가고 싶은데도 일부러 안 가고 참다가 그만 바지에 지려서 울었다는 사람도 있더라만. 그게 뭐니? 미련하게 말이야. 사람이 참는 것도 적당히라는 게 있어야지, 좀 예쁘다 싶은 여자 앞에서는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거처럼 굴면서 곧 죽어도 남자라고, 약한 척은 절대 안하지. 그게 무슨 개똥같은 자존심이야? 아, 물론 너보고 개똥같다고 욕한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
단유는 고개를 젓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은은 피식 웃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푹 쉬고, 내일 보자. 그리고 몸도 안좋을테니 내일 아침에는 운동하지 말고 쉬어. 알았지? 굳이 나가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선생님 앞에서는 ‘허세’부리려고 하지 마.”
나가는 순간까지도 놀림에 멈춤이 없는 하은이었다. 불을 꺼지고 방문이 닫힐 때, 단유는 이불 속에서 생각했다.
‘허세가 아니에요. 만약 내가 못하겠다고 했다면, 아마 혜린이는 울었을 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은 못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혜린이는 오늘 하루 종일 울음을 참으면서 단유와 함께 했었다.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단유는 마주앉은 혜린의 눈에서 그것을 발견했고, 때문에 자신이 망가지는 한에도 차마 ‘못하겠다’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혜린이는 헤어질 때까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단유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혜린의 눈물을 본다면, 다시는 혜린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쓰지 못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단유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한바탕 토해냈더니 속은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