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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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혹독했던 찬바람도 썰물처럼 지나가고 얼었던 운동장의 눈더미가 녹아서 운동장을 적실 무렵, 결국 보육원은 폐원이 확정되었다. 그간 관계기관에서는 새로운 인수자를 찾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그리하여, 안타깝게도, 아네스 보육원은 재단 설립 이후 23년 만에 폐원이 결정되었고 아이들은 보육교사와 생활지도원들의 눈물 섞인 배웅 속에서 각자 새롭게 배정된 보육원으로 이원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친권자들의 협의를 통해 부모의 품으로 돌아간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른들의 사정과 협의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잘 가, 형. 나중에 꼭 다시 만나.”
“잘 지내고 우리 나중에 꼭 보자. 알았지?”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와 위로를 보냈고, 그들은 늘 그랬듯이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잘 지내고, 축구 연습 많이 해야 돼. 그래야 학교에서 무시 안 당한다. 알겠지?”
“응.”
명수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격려했고, 재민이와 유철이는 눈물 한 방울로 명수의 마음에 보답했다. 그리고.
“······.”
한동안 밝아졌나 싶었던 지선은 다시 굳은 얼굴로 단유와 마주했다.
“···미안해. 지선아.”
“······.”
감정 없이 바라보는 듯 하지만, 그 눈 속에 담긴 슬픔과 외로움이 단유를 괴롭혔다.
“오빠랑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만날 수 있을 거야.”
어디로 갔는지만 알면, 꼭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씩씩하게, 건강하게 잘 지내야 돼.”
지선이는 고개를 끄덕여서 단유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러나 끝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차에 오르기 전, 지선이는 돌아와서 한 마디를 해 주었다.
“나중에 봐.”
단유는 지선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주었다. 동생을 떠올리게 하던 지선을 보내면서, 단유는 가슴이 쓰리다는 감정을 느꼈다.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걸까,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물었지만 이 이상 단유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는 지선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수밖에는.
“다시 볼 수 있을까?”
명수가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꼭 다시 만나야지.”
단유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동생처럼 영원히 못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꼭,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육교사도 그렇게 말해주었다. 이름과 출신 보육원만 알면, 다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지금은 사정이 어려워서 잠시 떨어져 지낼 뿐이라고.
단유는 그 말이 어쩐지 어른들이 보육원에 애들을 맡길 때 쓰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
“우와, 여기 집 넓다!”
명수가 가방을 둘러맨 채 거실을 구경하며 연신 감탄을 했다. 단유가 보기에도 깨끗하고 아늑한, 귀족들이나 살 법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1층 안방은 누나가 사용할거야. 그리고 너희들은 저 방이나 저 방을 골라서 쓰면 돼. 크기는 비슷하니까 각자 알아서 선택해서 쓰기. 알았지?”
하은이 소파에 앉아서 대충 방향을 지정해주며 집 구경(?)을 시켰다.
“화장실은 저기. 누나는 안방 화장실 사용할 거고, 니들은 거기 화장실 쓰기 없기. 주방에서 라면 같은 거 끓여 먹고 싶으면 알아서 먹어도 돼. 대신 불조심해야 되고. 그런데 너희 돌봐 줄 아주머니가 늘 계실 테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 거실에서는 항상 조용히 하고, 집 안에서는 뛰지 말 것. 층간 소음 심하다고 연락 오면 그 순간 무시무시한 벌칙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명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이 방, 저 방 왔다 갔다 하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우와, 화장실 되게 넓다. 석고야, 여기 봐!”
단유는 명수가 알아서 구경하게끔 두고, 하은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럼 이제 여기서 생활하는 건가요? 저희?”
“그래. 그렇게 듣고 온 거 아니니?”
“혹시 시간표도 있나요?”
“무슨 시간표?”
“아침 기상시간, 아침 식사 시간, 저녁 식사 시간, 외출 시간, TV 시청시간···.”
“아, 됐고. 그냥 니들 알아서 해.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든, 그건 이제 니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너무 늦게만 일어나지 마. 게으른 사람으로 만들라고 재훈 오빠가 후원해주는 건 아닐 테니까. 그리고 식사는, 아주머니랑 이야기해서 맞추도록 하고. 되도록 식사시간은 맞추는 게 좋겠다. 그래야 아주머니가 일하시기 편할 테니까. 오케이?”
하은은 다시 귀찮아하면서도 말문을 트이고 나니 다시 수다 본능이 발휘되는지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마 그럴 나이는 아니겠지만, 벽에 낙서하지 말고, 바닥에 흘리면서 먹지 말고, 만약 흘렸다면 바로바로 청소하고, 청소기는 저기 있는데, 너희 청소기 쓸 줄 아니? 가르쳐 줘야 하나? 그런데 몇 번 만져보면 대충 쓸 수 있을 거야. 방청소도 아주머니가 대신 해주시겠지만, 사소한 청소는 너희들이 직접 하는 게 좋아. 나도 그럴 거고.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 예전에 혼자 있을 때는 이 넓은 집을 혼자 청소하려고 했더니, 어찌나 힘이 들었는지. 며칠 전에 아주머니가 와서 대청소를 해주셨기에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말도 못할 거다. 그렇다고 내가 게으르거나 지저분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단지 이 집이 너무 커서 관리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야.”
단유는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꿋꿋이 이야기를 다 들었지만, 너무 길어지는 것은 반대였기에 적당히 틈을 봐서 이야기를 잘랐다.
“알겠어요. 그럼 저희 방 정리는 저희가 알아서 하는 걸로 할게요.”
“누나, 누나! 지금 TV나와요? 지금 볼 수 있어요?”
화장실을 구경하던 명수가 두 볼이 상기된 채로 하은에게 달라붙었다. 하은은 대답대신 손짓으로 리모컨을 가리켰다.
벽에 걸린 65인치 TV에 전원이 들어오면서, 화면에 광고프로그램 하나가 떴다. 단순한 음료 광고일 뿐인데도 명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석고야, 저것 봐. 우와 크다!”
하지만 단유에게는 다른 물음이 있었다.
“외출은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외출? 어디 갈 데 있어?”
“나중에 도서관이라도 가보고 싶어서요.”
보육원 도서관도 좋았지만, 역시 시립도서관보다 좋을 순 없었다.
“어, 거기는 꽤 멀 텐데.”
“그래요?”
“뭐, 그래도 혼자 못 갈 정도는 아니지. ···그렇지만 니가 중학생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혼자 보내긴 어렵겠다. 만약 꼭 가고 싶다면, 누나랑 같이 가자. 그 정도는 내가 에스코트 해줘야지.
분홍색 트레이닝 복을 상하로 입은 하은이 소파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거기 먹보, 뒤로 와서 봐. 눈 나빠져.”
명수는 65인치 TV를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경건한 자세로 시청하고 있었다. 하은의 말에 명수는 조금씩 슬금슬금 무릎걸음으로 물러났지만,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쟤 원래 TV를 저렇게 좋아해?”
“저도 몰랐네요.”
명수는 소파 아래에 발이 부딪히기 전까지 물러나야 했고, 그 이후부터 저녁 먹으라는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TV에 빠져 있었다.
****
방 정리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위해 식탁으로 나왔을 때, 하은은 각자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씩 주었다. 명수가 소리 질렀다.
“우와! 핸드폰!”
하은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주의를 주었다.
“집 안에서 조용히 하랬지? 목소리 낮추고. 이 폰은 오로지 너희들과의 원활한 연락과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주는 거지, 가지고 놀라고 주는 게 아냐. 만약 일정 이상의 요금이 나온다면 그 즉시 압수다. 알았지? 특히 먹보 너. 게임하는 건 봐줘도 현금 결제하면 용서 안한다. 알았어?”
“왜 계속 먹보라고 불러요?”
단유의 물음에 하은이 턱을 괴며 명수를 바라보았다.
“혼자서 스테이크 3인분을 해치우는 11살짜리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 그 날의 충격이 생생해.”
단유는 대답대신 건네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유광이 빛나는 최신 기종의 핸드폰이었다. 물론 단유는 그게 최신 기종인지 아닌지 알지 못했지만.
하은은 흥분한 명수를 진정시키면서 두 사람에게 간단한 핸드폰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전화랑 문자 사용법만 제대로 익혀두고, 인터넷은 되도록 집에서만 쓸 것. 집에서는 와이파이가 잡히니까.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현금결제하면 정말 각오해야 할 거야. 특히 먹보 너! ···이야기는 듣고 있는 거니?”
“예, 예.”
정말 성의 없는 대답의 정석이었다. 명수는 핸드폰 여기저기를 누르면서 첨단 테크놀로지의 향연에 감탄했고, 단유는 식탁 위에 올려둔 뒤 대신 숟가락을 들었다.
“단유야, 너는 안 궁금해?”
“뭐가요?”
“핸드폰.”
“전화랑 문자만 쓸 줄 알면 되죠.”
정말 호불호가 확실한지, 관심이 없는 것에는 일절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 단유였다. 하긴 과외 때도 저렇게 집중해서 책만 보는 아이가 있을까 싶었으니까. 하은의 기억에 과거 영재학교를 다닐 때도 단유만큼의 집중력을 보였던 아이는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너 좀 매력 없다.”
“예?”
“책만 보는 남자 말이야. 매력 없어. 책 말고 관심 있는 거 없니?”
단유는 대답을 피했다. 사실 책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게 없지는 않았으니까. 이를테면, ‘마법’이라든가.
****
며칠 동안은 새 집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 명수는 틈만 나면 하은에게 지적을 받아야 했고, 청소기 사용법에 익숙해졌으며, 매일 샤워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강요받았다.
“먹보야, TV 좀 적당히 봐라.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니?”
아침 먹고 소파에 앉아서 줄곧 TV만 보는 명수를 보며 하은이 한 마디 하자, 명수는 영혼 없는 어조로 답했다.
“괜찮아요, 전.”
너 괜찮냐고 물은 거 아니거든? 하은이 삐직 혈관이 솟아오르는 이마를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단유 좀 봐라. 개학 얼마 안 남았는데, 너도 책 좀 봐야 하지 않니?”
“예.”
예, 라고 대답했으면 TV를 끄고 방으로 들어가서 책을 본다거나, 아니면 언제까지 보다가 방에 들어가겠다는 약속 정도는 뒤따라 붙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명수의 시선은 TV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 TV에서는 보험 상품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저게 재밌어?”
“예.”
“뭐가 재밌는데?”
“암에 걸리면 천만 원 준대요.”
거기 어디에 재미 포인트가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규칙적인 생활을 강요받았던 보육원에서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니 이렇게 풀어지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도가 지나치긴 하지만, 또 아직은 어리니까, 라는 말로 이해 못할 부분만은 아니었다.
반면 도가 지나친 건 명수보다 단유였다. 단유는 아침 먹고 책상에 앉더니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벌써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내내 TV를 보는 명수와 일주일 내내 책만 보는 단유, 둘 중 누가 더 심각한 건지 고민해보았지만 쉽게 답이 나올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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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어요.···네, 그렇게 전할게요.”
하은은 통화를 마친 후, 단유를 찾았다. 그리고 보육원에서 온 전화 내용을 알려주었다.
“혜린이요?”
전화는 혜린의 어머니가 보육원에 찾아왔었다는 내용이었다. 혜린의 생일 전에 터진 문제로 생일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던 단유는 그 이후로 그 일에 대해 새까맣게 잊고 지냈었다.
“···그래서 그 애 어머니가 널 데리러 온다네? 친구끼리 재밌게 놀게 해주고 싶다면서 말이야. ···혜린이란 아이가 너 좋아하나보다?”
하은은 놀릴 거리가 생겼다며 좋아했지만, 막상 당사자는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외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썩 내켜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온종일 붙박이장마냥 방안에 처박혀 있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하은은 마침 잘 됐다는 얼굴로 단유를 꼬드겼다.
“방에서 계속 책만 읽는 건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까, 잠깐 나갔다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침에도 나가서 운동하고 왔는데요.”
단호하게 반응하는 단유였다.
“아침에 운동 나가는 거랑, 외출해서 나들이 가는 거랑은 또 다르지. 또래 친구들이랑 대화도 나누고,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면 정신적으로 환기도 될 테고 더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니?”
“그 반대일 거 같은데요.”
“여자애잖아? 여자친구 만들고 싶지 않아?”
“아니요. 별로 생각 없어요.”
철벽을 두른 듯.
“여자 친구가 아니더라도 또래 여자애랑 하루 정도는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원래 다양한 경험이 지식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법이니까.”
“경험이 지식을 만들어주지만, 때로는 선입견과 편견을 만들기도 하죠.”
니가 무슨 프랜시스 베이컨이냐?
“도대체 나가기 싫은 이유가 뭔데?”
“나가기 싫다고는 안했는데요?”
“뭐야? 그럼 나갈 거야?”
“···그럴게요.”
하은의 김샜다는 반응에도 신경 쓰지 않고, 단유는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돌아가 외출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