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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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다른 이야기를 물었다.
“저만 입양되는 건가요?”
“무슨 뜻이지?”
단유는 생각을 정리한 후 이야기를 했다.
“저랑 같이 방을 쓰는 명수라는 친구가 있어요.”
주영이 추임새를 넣었다.
“그래, 잘 먹는 친구.”
“전 그 친구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래서 다른 보육원으로 갈 때도 함께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요. 그런데 만약 제가 입양이 된다면 그 친구랑 떨어져야 한다는 거잖아요? 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왜?”
“그 애는 제 가족이니까요.”
재훈과 주영은 입을 다물었다. 단유가 ‘가족’이라고 말할 때의 그 단호함과 의지가 두 사람에게 진정성 있게 들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재훈이 만들어주려고 했던 가족이 이미 단유에게 있었던 셈이었다. 물론 그 가족이 생계를 책임져 주지 못하니까, 여전히 단유에게는 부양자의 필요성이 존재했다.
“어떡하지?”
“뭘요?”
“두 아이의 아빠.”
이 사람, 제대로 정신 나간 것인가? 주영은 재훈을 흘겨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제가 이야기했던 대로 하시는 게 제일 좋겠네요.”
후견인으로서의 지위를 얻는 것. 아동복지법 제13조, 보호시설에 있는 고아의 후견 직무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라 후견인으로서 지정신청을 한다면, 굳이 입양이라는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단유가 어른이 될 때까지 지원해주는 것이 가능하다.
“난 아들 삼고 싶은데.”
주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유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아빠가 필요해?”
“굳이··· 말하자면, 아니요. 전 기억 속의 아버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재훈이 울상을 짓고, 주영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재훈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는데.”
재훈과 단유는 고작(?) 18살 차이다. 아빠와 아들이 되기엔 사회적 통념상―물론 없지는 않겠지만―무리가 있다. 단유가 나이를 언급하니, 재훈은 멋쩍은 표정으로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젊은 아빠가 좋지 않냐는 말은 주영이 눈을 부라리는 바람에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그 방법이라는 게 어떤 건데요?”
주영은 후견인제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법적으로 정식 절차를 거쳐 후견인이 되면, 단유는 보육원에 위탁되지 않아도 된다. 단유가 생각하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다만.
“너무 잘해주시니까 좋긴 한데, 제가 이렇게 대우를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부담스러웠다. 재훈이 웃었다.
“괜찮아. 넌 충분히 그런 대접받을 가치가 있는 아이니까.”
주영은 재훈의 그 말이 단순한 빈말이 아니라고 느꼈다.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금수저’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사실 재훈의 지난 삶이 평탄치 않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 말은 사실 단유가 아닌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고 생각했다.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명수는요?”
재훈이 주영을 바라보았다. 단유가 먼저 이야기했다.
“만약 ‘가치’라는 것을 따진다면, 명수는 저보다 더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거예요.”
“왜?”
재훈은 물론이고, 가끔씩이나마 명수를 만나왔던 주영 역시도 단유의 호언장담에 의문을 품었다.
“명수는 축구를 잘하거든요. 국가대표가 될 지도 몰라요.”
그 시간, 축구 국가대표를 꿈꾸는 명수는 다른 아이들과 TV를 보고 있었다. 단속하는 어른들이 사라지니, 아이들에게 무한한 TV시청시간이 주어졌다.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
TV에서는 가요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조악한 TV스피커를 통해 발랄한 댄스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루 종일 TV를 볼 수 있다면, 난 축구를 안 해도 기분 좋을 거 같아.”
명수가 헤벌레 미소를 지으면서, TV화면에 푹 빠져있었다. 요즘 대세라는 걸그룹이 나와서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명수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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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알겠습니다.···방학 잘 보내라고 전해주세요.”
혜린의 어머니는 통화를 마친 후,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정확한 사정은 이미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된 상황이었고, 지금도 뉴스에 나오고 있었다. 다만 보육원의 이름은 사건 초기에나 한 번 언급된 이후, 지금은 불길이 다른 곳으로 번지면서 보육원의 이름은 잘 나오지 않고 있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모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내일 있을 혜린의 생일이었다. 내부 문제로 단유가 외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혜린에게 알려 주냐는 것이었다. 방학 이후부터 지금까지 약 2주간 혜린이 보였던 기대감과 설렘을 꺾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혜린아, 엄마가 할 이야기 있는데.”
“나도, 나도. 엄마, 이게 좋아, 아니면 이게 좋아?”
드레스와 원피스 두 개를 손에 들고 활짝 웃는 딸의 얼굴을 보니, 괜히 미안해졌다. 마치 자기가 죄를 지어서 이런 사태가 온 것 같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전에 할 이야기가 있는데···.”
“옷부터 골라줘, 엄마.”
딸이 애교를 부리면서 선택을 종요하니,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하얀 원피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도 이게 좋던데.”
헤실헤실 웃는 딸에게 마치 사망선고를 내리는 의사의 심정으로 이야기를 전해야 했다.
“실은 조금 전에 전화가 왔어···.”
딸의 얼굴은 붉은색, 흰색, 푸른색으로 다양하게 변화했고, 신중하게 골랐던 옷은 마루에 널브러졌으며, 환하게 웃던 아이가 2시간에 걸쳐 침대 위에 눈물을 뿌렸고, 이후 시무룩한 얼굴로 TV만 보다가 잠들었다.
어머니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차라리 저 애를 데리고 보육원을 방문해볼까 생각했다.
‘그래, 오지 않는다면 가면 되지.’
어머니는 딸의 감정을 지켜주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복지기관 방문을 결정했다. 남자친구 집에 딸을 데리고 가는 엄마들이 없지는 않지만, 남자친구 만나게 해주려고 보육시설로 딸을 데리고 가는 사람은 자기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보는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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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핸드폰을 들고 있던 여자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단유 돌봐줄 수 있냐고.」
“내가? 왜?”
「음···개인교사?」
“···개인교사가 무슨 애를 돌봐? 내가 보모니?”
핸드폰에서 소리가 끊어졌다. 그러나 통화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잠시 후,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듣기 좋은 남자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누구···, 재훈 오빠?”
「어, 나다.」
“아, 정말! 왜 오빠가 벌인 일을 내가 수습하는 건데?”
「수습은 무슨. 너 어차피 지금 있는 오피스텔도 내가 빌려준 거잖아.」
“아, 됐어. 그럼 나 그냥 방 뺄게. 어차피 그만두려고 했었어. 서울 올라가지 뭐.”
「올라가서 뭐 하려고? 너 할 거 없다고 그러던데? 주영이가.」
이 기집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하은은 신경질이 나서 하이힐로 땅을 콕콕 찔렀다. 그래봐야 자기 힐만 상할 뿐, 재훈이나 주영에게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알았어, 그럼 관두고 나와.」
재훈이 먼저 포기했다. 그런데 막상 오피스텔에서 나오려니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정말 여자의 변덕이란 어쩔 수 없나보다, 라고 자신을 자책하며 하은은 슬쩍 조건을 들이밀었다.
“그래요, 나갈게요. 근데 만약에 조건만 더 맞춰준다면 고려해볼 여지는 있어요.”
「됐어, 그냥 나와. 다른 사람 구할게.」
아니 이 오빠, 아니 이 남자 정말 사람 상대할 줄 모르네. 이러니 주영이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거겠지. 하은은 괜히 신경질을 부렸다.
“아니, 사람이 왜 이랬다 저랬다 해요? 방금은 맡으라고 했다가, 이제는 나가라고 하고. 도대체 왜 그래요? 사람이?”
수화기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요?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요? 이제 상대도 하기 싫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주영이가 오빠한테 실망하는 거예요. 아세요?”
요란스런 소리와 함께 통화 상대가 바뀌었다.
「넌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하고 있어? 그건 그렇고, 뭔데? 니가 원하는 조건이.」
“양육비가 필요하지 않겠어?”
「집안 일 봐줄 아주머니 구할 거야. 돈 많이 안 들고, 대신 니 월급만 20% 올려줄게.」
지금은 월급을 받지 않지만, 방학 때 단유를 가르치는 동안 받았던 월급은 꽤 센 편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20%? 그럼 생각해 볼만한 금액이긴 했다. 혼자 돌보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 해주실 분도 있다면 뭐, 어려울 건 없겠다.
“좋아, 그럼 언제부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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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쟤 괜찮냐? 완전 미친 애 아냐?”
재훈이 씩씩거리면서 주영에게 따졌다. 주영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아마도, 그냥 오늘 좀 불편한 날이었는지도···.”
“아니, 니들은 그게 무슨 변명거리냐? 뭐 지들 불리하기만 하면, ‘오늘 좀 불편해요’ 이 따위 말이나 하고 앉았고.”
“따위라뇨?”
순간 잘 벼린 면도칼 같은 눈으로 재훈을 째려보는데, 이번에는 재훈도 상당히 열이 받은 상태였다.
“왜 째려봐? 왜? 뭐? 야, 방금도 지가 싫다고 해서 관두라고 했더니, 뭐? 이랬다저랬다 해? 게다가 주영이가 말라? 마르긴 개뿔이?”
재훈의 말이 이어지면서 움찔했던 주영은 마지막 말에 욱하고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르더니 순간적으로 끈이 끊어졌다.
“뭐예요? 마르긴 개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어?”
톡 잘라서 발췌해내니, 표현이 거시기 하긴 했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 날씬하지, 날씬한데···.”
“지금 말 다했어요?”
재훈은 급격한 피로를 느끼며 자리에서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았다.
‘여자들이란.’
이런저런 말이 오가던 와중에 단유의 새로운 거취가 결정되었다.
“아, 명수는 말 안했네.”
재훈의 중얼거림에, 기관총처럼 연신 입을 털던 주영의 입이 다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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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명수를 붙잡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니가 만약 좋다면, 같이 재훈 형이 구해준 집에서 같이 살게 될 거야.”
“나야, 너랑 같이 사는 거면 좋지. 게다가 우리 둘만 같이 사는 거야?”
명수는 어쩐지 신이 난 얼굴이었다.
“방학 때 우리 방에 찾아오시던 여자 선생님 계시지? 그 선생님이랑 같이 살 거래. 대신 중학교 올라가기 전까지만. 그 이후에는 형이랑 같이 살 거라고 그러네.”
“그거야 상관없지. 어쨌든 여기서 나간다는 거잖아? 그럼 막 TV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오락실도 갈 수 있고, 군것질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야?”
“···하고 싶은 게 많았구나.”
명수는 의외로(?)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단유는 그렇게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던 것이었지만, 명수는 몰래 바라던 생활이 있었던 것 같았다. 사실 재훈과 주영이 겪었던 것처럼, 단유는 오직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보육원 안에서나 밖에서나 별 다른 차이가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단유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달랐다. 당장 윤정이만 해도 군것질을 좋아해서 외출이 자유로운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고, 군것질을 위해 보육원 밖으로 나돌아 다녔었다. 형근이나 철용이 같은 애들도 할 게 없어서 공을 차고 놀았지만, 실은 다른 아이들처럼 오락실도 가고 싶었고, 노래방도 가고 싶어 했다.
명수는 그야말로 욕심의 황제였다. 반 친구들이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 게임도 마음대로 해보고 싶었지만, 괜한 오해를 부를까봐 신경 안 쓰는 척 하며 더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먹는 과자나,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이나, 한 권씩 품고 다니는 만화책 따위는 정말 간절했다.
단유는 명수가 그런 간절함을 지금까지 억눌러가면서도 티를 내지 않았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에 대한 생각도 그런 식으로 억눌러 왔던 거겠지.’
명수가 얼마나 인내심이 강한 아이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럼 같이 가는 거야?”
“콜!”
명수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결정에 환호했다. 단유는 방긋 웃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수는 없는 일. 지선이나 유철이, 재민이 같은 동생들은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형들, 특히 철용이 같은 경우는 정말 오랜 시간 함께 했는데 떨어져야만 했다.
“철용이 형은 안 될까?”
명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후견인으로서 보살펴주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명수는 그렇다 치더라도, 면식도 없는 철용까지 봐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단유로서도 염치없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나중에 성공해서 만나자.”
단유가 나직하게 말했다. 명수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에서 철용을 비롯한 중학생, 고등학생 형들이 모두 나와서 공을 차고 있었다. 그들도 모두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있으리라. 그리고 저들 대부분은 다른 보육원으로 보내지겠지. 그리고 새로운 규율과 환경 속에서 적응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단유와 명수는 운이 좋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신이 도운 거야.”
생활지도원 한 분이 둘의 사정을 듣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후견인지정절차가 마무리 되는대로 두 사람은 보육원을 나갈 것이라는 이야기가 선생님들 사이에 퍼진 것이다.
“신(神)···.”
단유는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과연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