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57화 (157/956)

변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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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인평일보에서 터뜨린 기사는 세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거대 보육원의 추악한 진실』

‘거대’한 규모의 보육원은 아니지만, 재단 규모 상 ‘거대’라고 붙여도 나쁘지 않다는 선배의 조언에 살짝 양념을 가미한 이 기사는 그대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이내 중앙지와 공중파 방송에까지 보도되게 되었다.

양 기자의 말처럼 원장을 비롯하여, 행정과장과 전 사무국장까지 줄줄이 잡혀 들어갔고, 서울의 재단이사회에도 압수수색이 들어가면서 관련 인사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잡혀갔다.

문제는 더 커졌다. 재단내부의 비리였다면, 적당한 선에서 그칠 문제였는데 보궐선거로 당선된 주정호 의원의 이름이 거론되더니, 여의도의 금배지들과도 연계되어 있다는 후속보도가 나오면서 정재계의 파문으로 이어졌다.

횡령과 회계조작이라는 죄목이 외환거래법 위반으로 확장되고 해당 펀드를 운영하던 운용사와 관련자들에게까지 수사가 확대되면서 가히 전국을 뒤흔드는 태풍이 되었다.

****

“하여튼 이 나라도 요상해. 여기저기 다 얽혀서 말이야,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생각도 못했어.”

양 기자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중얼거렸다. 그는 ‘뉴스특보’라는 활자를 크게 띄우고 진행자가 격앙된 어조로 뉴스를 보도하고 있는 한 종편 채널을 보고 있었다.

“어쨌든, 잘 된 거 아닌가요? 2년인가, 3년인가 추적해오던 비리를 밝혀냈으니 말이에요.”

선혜가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뭐, 이제는 내 손을 떠났으니까. 어쨌든 너나 나나 한 건 올렸으니 올 해 스타트가 좋네. 그치?”

“네, 전부 선배 덕이네요.”

겸양의 말이 아니라, 실제로 양 기자의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몇 년 전, 아네스 보육원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엄밀히 말해서 소미의 성폭행사건은 보육원 내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을 접하고, 이를 파고 들던 중 보육원을 관장하는 재단 내에 두 패가 나뉘어서 자리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뭔가 있겠다는 촉이 발동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적확한 진실 보도가 될 때까지 자료를 모으고 모으다 마침내 터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선혜가 도움이 전혀 안됐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양 기자 등에 업혀 간 것은 사실이었다.

“보너스는 얼마나 나오려나?”

사실 양 기자가 깨끗하고 정의에 넘치는 사람만은 아니었다. 그간 곁에서 따라다니면서 종종 봐왔던 사실이다. 하지만 양 기자는 묘하게 기자의 명예를 중시하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기자의 명예는 오로지 특종으로만 지켜진다고 생각하는 특이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특종에 따른 보너스를 유난히 좋아했다.

“보너스를 받아야 일이 끝난다.”

마무리는 확실하게, 라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혜는 키보드에서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지금 쓰는 이 글이 보육원 아이들, 특히 단유에게 어떤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자로서 이 정도는 해 줘야 덜 미안해질 것 같았다. 지금 같아서는, 비록 단유의 격려가 있었다지만, 왠지 그 아이들에게서 집을 빼앗았다는 미안한 감정이 더 컸다.

선혜의 작업을 힐끔 쳐다본 양 기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거 아무 소용없다.”

“뭐요? 이거요?”

선혜가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가리키자 양 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시국에 애들이 보육원 떠나서 떠도니 마니 하는 이야기가 나와 봐야 누구한테 관심이나 끌겠니? 아무 의미 없는 짓이구나.”

“그럼 어떡해요?”

“어떡하긴? 그게 다 인생이다, 생각하고 감수해야 하는 거지.”

양 기자의 인생론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지만, 선혜로서는 딱히 다른 방도는 생각나지 않았다. 대신 기사 제목을 바꿨다.

『길거리로 내몰린 아이들』

실제로 길거리로 내몰릴 아이들은 없지만, 이렇게 해 놓으면 관심은 끌지 않을까?

****

“석고야, 우리 어떻게 되는 거야?”

명수가 밖에 나가지도 않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아무래도 원의 분위기가 분위기다 보니, 아이들이 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형들이 우리 모두 뿔뿔이 흩어질 거라는데.”

단유 역시 선혜에게 들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실제로 진행중에 있었지만, 아이들만 몰랐다. 복지사가 연일 들락날락거리면서 보육교사와 함께 명단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운영주체가 붕 떠버린 보육원의 해체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넌 걱정 안 돼?”

명수는 변함없이 책을 읽고 있는 단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단유는 그제야 책에서 시선을 떼고 명수를 바라보았다.

“내 걱정은 안 돼. 어딜 가든, 여기와 다를 게 없다고 하니까.”

선혜는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조금씩 다른 점은 있겠지만, 다른 곳에 가더라도 지금과 비슷한 생활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더 좋은 데로 갈 수도 있다고 했다.

“너 나랑 떨어져서도 잘 살 수 있어?”

명수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이 물었다. 단유는 그 묘한 표현과 뉘앙스에 난감해하면서도 명수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너랑 떨어지는 것은 반갑지 않지.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아.”

“왜? 우리 같이 가고 싶다고 말하면 같이 보내주지 않을까?”

선혜의 말대로라면 각 보육원에서 받아줄 수 있는 인원과 나이대가 정해져 있어서, 같은 나이대의 친구라면 같이 갈 확률이 높다고 했다. 다만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결정을 두고 보자는 심리가 단유에게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명수 말대로 의사를 표시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위에서 결정한대로 따라야 한다지만, ‘의견’을 내는 걸 거부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리 거부당할 거라고 짐작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인 행동이었다. 예전의 단유였다면, 그냥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갔겠지만, 이제는 변할 때도 되었다.

“그래, 한 번 가서 이야기나 해보자.”

“좋아! ···그런데 누구한테 가서 이야기 해?”

단유는 그 점에서 거침이 없었다. 일단 보육원에서 상대를 할 수 있는 사람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보육교사를 만나면 되리라.

“선생님.”

상담실 앞에서 단유와 명수는 노크를 하고 기다렸다.

“들어와.”

단유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몇 몇 서류를 테이블 위에 펼쳐 놓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단유니? 명수도 왔네? 무슨 일이야?”

보육교사가 단유에게 물었다. 단유는 침착하고 바른 어조로 이야기했다.

“저희가 이 보육원을 떠나야 한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다들 다른 보육원으로 흩어져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사실인가요?”

보육교사는 마주 앉은 복지사를 보며 난감해하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아마, 그럴 거야. 그런데 어쩔 수 없단다.”

“예,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만약 꼭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같이 갈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나요?”

“누구? 명수?”

“네.”

“명수도?”

“네. 저 석고랑 같이 갈 거예요.”

명수가 단유 뒤에서 서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는 명수는 본 적이 없었는데. 보육교사는 잠시 복지사를 바라보았다. 복지사 역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

“그래서 아이들은 모두 보육원에서 나가야 하고?”

“네.”

“단유도?”

“네.”

재훈은 고민에 빠졌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차라리 단유를 데리고 나오는 게 좋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데리고 나올 거, 2년 일찍 데려온다고 생각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는 지금 너무 급작스럽게 일이 벌어진 터라 준비가 덜 됐다는 것이 문제였다.

“굳이 서두르실 필요는 없지 않아요?”

“하지만 그냥 둘 필요도 없지. 오히려 잘 된 것 일수도 있어. 이럴 때 입양 신청을 하게 되면 해당기관에서도 편의를 잘 봐줄 수도 있고, 그러면 조금 더 간편한 절차를 밟을 수도 있으니까.”

“입양은 안 된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그냥 후원자의 자격으로 데려와 부양을 해도 될 일이었다. 굳이 ‘입양’이라는 자격을 달 이유가 무엇인가?

“왜 안 돼?”

주영은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나가실 준비 하시죠?”

“응?”

“지금 바로 단유에게 가 봐요. 가서 물어보죠. 입양, 결국 본인의 의지도 중요한 거 아니에요?”

것도 그렇다. 그렇게 해서 서둘러 외출 준비를 마친 재훈을 데리고 주영은 인평시로 차를 몰았다.

“난 니가 이렇게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차 안에서 조용히 갔으면 좋으련만, 또 저 입을 나불댄다. 주영은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인지, 선배인 재훈에게 막 화가 났다.

“팔 집어넣고 창문 닫으세요.”

도대체 한 겨울에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중에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느끼는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퇴원한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주영의 날 선 목소리에 움찔한 재훈이 창을 올리자, 주영이 다시 말했다.

“제가 반대하는 이유는 단 하나에요. 선배의 인생이 더 이상 꼬이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죠.”

“그렇게 말하지 마. 니가 그렇게 말하면 진짜 내 인생이 꼬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기분이 아니라 사실이에요.”

재훈은 주영을 훔쳐보더니 피식 웃었다.

“주영아.”

이 남자 또 왜 이래? 라는 표정으로 재훈을 흘끔 보다 느끼한 눈을 마주치곤 놀란 토끼처럼 시선을 피해버렸다.

“왜요?”

“난 내 인생 별로 안 꼬였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내 인생, 잘 나간다고 생각해. 생각해봐. 금수저로 태어나서, 해외여행 실컷 하다가, 이제 명함 좀 파보겠다고 병원까지 짓고 있잖아?”

병원 짓는 이유가 명함 때문이었어?

“게다가 날 위해서 걱정해주는 니가 옆에 있는데, 이게 꼬인 인생이야?”

얼굴이 붉어진 주영이 아무 말도 못하고 전방주시 의무에 전념했다.

“내가 원래 이런 달달한 이야기 안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주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주영아.”

주영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네가 보여준 신뢰와 믿음은 나중에 니 결혼식 축의금으로 보답할게. 니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두꺼운 봉투를 받게 될 거야.”

주영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눈을 껌뻑이다가, 하마터면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이 정신 빠진 인간 같으니라고.

“주영아, 너무 밟는다, 속도 좀 줄여.”

“그냥 같이 죽죠.”

“주영아!”

****

“입양이요?”

단유는 눈을 느릿하게 껌뻑거리며 단어의 의미를 되새김질했다.

“싫어?”

“싫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요, 정확히 어떤 의미로 절 입양하시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재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슨 뜻이긴, 내가 니 아빠 노릇 좀 하겠다는 거지.”

“왜요?”

“글쎄다,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이 딱히 없는데? 그냥 니 아빠 노릇 좀 하면서 니가 잘 클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마음?”

단유는 재훈을 바라보면서 잠시 ‘아버지’란 존재의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어머니’와 다르게 ‘아버지’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단유의 기억 속에 편린처럼 남은 아버지에 대한 흔적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어디갔는지도 모르는 어머니와 다르게, 아버지는 적어도 늘 함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하늘 아래서든, 늘.

그런데 새로운 아버지가 생긴다는, 아니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단유는 작은 혼란을 느꼈다.

“제게 아버지가 없어도 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요.”

“물론 물리적으로 니가 성장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사회에서 니가 평범한 다른 이들처럼 교육을 받을 수도 없거니와,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거기에 들어가는 돈이며 시간에 대한 투자와 그 시간의 위한 다른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에 대해 넌 책임을 질 수가 없는 처지잖아.”

“예?”

“간단하게 말하면, 입고 먹고 쓰는 돈을 니가 구할 수 없으니까 대신 ‘아빠’가 대준다는 것이지.”

“돈이 많이 드나요?”

재훈은 단유를 바라보다가 묘한 괴리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너, 혹시 지금 돈이 필요하니?”

“아니요.”

“혹시 예전에 돈 필요한 적 있었니?”

“아니요.”

주영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사채업자 놀이라도 하려는 건가?

“너, 돈을 모르는구나.”

“돈은 알죠. 물건을 살 때 그 가치에 상응해서 주고받는 화폐를 말하는 거잖아요.”

“그런 교과서적인 답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네.”

“뭔데요?”

“물건을 산다는 것. 넌 단 한 번도 너의 의지로 물건을 사본 적이 없지?”

단유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과연 그랬다. 학교 준비물은 보육원에서 생활지도원이 알아서 준비를 해주었고, 옷은 물려받았고 밥은 식당에 가서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책은 도서관에 있고, 교통은 보육원 승합차를 이용했다. 어디에서도 단유가 돈을 쓰거나, 쓸 일은 없었다.

“주영아, 얘 경제개념이 없는데?”

재훈이 뒤돌아보며 말하자 주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돈 무서운 줄 모르는 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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