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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156화 (156/956)

변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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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의 폭설은 마치 먹다 남긴 피자처럼 운동장 구석에 꽁꽁 얼어붙은 눈더미만 남기고 사라졌다. 피자라면 차라리 씹고 뜯고 맛보면서 즐기기라도 했겠지만, 폭설에 할퀴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겐 지옥의 맛이었으리라.

상담실에서 보육원 전경을 바라보는 보육교사의 마음도 그러했다. 오전에는 경찰서에서 두 사람이 와서 사정청취라는 이름으로 며칠 전의 일을 묻고 갔다.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없다며 입을 굳게 닫고 있더니, 아기는 그날 저녁에 사망선고가 내려졌다며 알려줬다. 차라리 아무것도 알려주지나 말 것이지.

“선생님, 식사하러 가셔야죠.”

그 날, 함께했었던 생활지도원이 상담실에 목만 내밀고는 점심을 권했다.

“별로 생각이 없네요. 선생님이 가셔서 아이들 좀 봐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보육교사는 겨울햇살에 빛나는 정문 옆 눈더미를 눈에 담았다. 당시 단유가 저쯤에서 몸을 숨기던 그 여자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무 쓸모도 없는 가정과 상상 속에서 무거워진 마음을 껴안아야 했던 보육교사였다.

그러던 와중에 보육원 정문으로 낡은 회색 승용차 한 대가 비실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여긴 참 사고가 많네요. 다른 곳도 이럴까요?”

“차라리 다른 곳처럼 큰 거 한 방 빵 터뜨리면 좋을 텐데, 이건 뭐 500원짜리 불꽃을 한 시간 간격으로 쏘아 올리는 거랑 뭐가 달라?”

묘하게 구체적인 선배의 묘사를 들으면서 선혜는 저 앞으로 다가온 보육원 건물을 바라보았다.

“부산에는 집단 학대로 발칵 뒤집혔다는데, 그런 거에 비하면 얌전해서 좋은 거 아닌가요? 틈틈이 기사거리로 쓸 만한 거 하나씩 툭툭 던져주니까요.”

“평소라면 기사거리도 안 돼. 연초(年初)다 보니까 이런 것도 기사가 되고 활자 포인트도 키울 수 있는 거지.”

후배의 말에 시니컬하게 양념칠하는 양 기자였다. 그의 말마따나 연초의 가정적 분위기에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는 기사였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다른 시기였다면 일반 사회면에 겨우 몇 줄이나 나올까 의심스러울 사건이기도 했다.

보육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온 두 사람은 곧장 원장실로 갔다.

“아이고, 양 기자님. 오랜만입니다.”

어색한 너털웃음을 짓는 원장을 보며, 양 기자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잘 지냈죠.”

“그거 참 다행이네요. 일이 많아서 이마가 더 넓어지시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요?”

“네?”

양기자는 딴청을 피우며 대신 옆에 선 선혜를 소개했다.

“여기는 제 후배 기자인데, 일전에 보신 적 있으시죠?”

“어, 한 번 봤던 것 같기도 한데,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허허.”

양기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자주 볼 텐데요. 너도 인사해야지?”

이런 상황에 대해 미리 알려주고나 이야기를 하시던지. 당황스러운 대면 인사를 맞이한 선혜는 떨떠름한 얼굴로 선배를 바라보다 곧 표정을 고치고 인사를 했다.

“반갑습니다. 인평일보 오선혜 기자라고 합니다. 일전에 이곳 보육원의 김단유라는 어린이를 취재하고자 잠시 들렀던 적이 있었죠.”

“아, 그랬던 가요? 예, 반갑습니다.”

‘앞으로 자주 본다’는 양 기자의 말에 신경이 쓰였지만, 내색하지 않는 고단수 너구리 원장 되시겠다.

“일단 자리에 앉죠?”

양기자는 마치 자기가 이 방의 주인인 냥, 먼저 소파에 앉아버렸다. 너구리 역시 예의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그나마 상석을 양보해준 양 기자의 성의에 따라 얌전히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작년이었던가요? 저희가 대충 운(韻)을 띄어드렸던 탓에 무사히 위기를 넘겼던 같습니다?”

‘사무국장의 일을 말하는 것인가?’

사무국장이 위조서류를 빼돌려 넘기려던 일이 있었지만, 그 서류가 양기자에게 갔다는 것은 모르는 원장이었다. 너구리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것을 보며 속으로 함박웃음을 지은 양 기자는, 그래도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게끔 온화한 표정으로 원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요즘 주정호의원을 자주 만나신다면서요?”

“허, 주 의원님께서 인평시의 복지정책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더군요. 여러 가지 자문을 듣고자 사회 각 분야의 분들을 모시던 와중에 기회가 닿아서 저도 가서 짧게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었죠. 하지만 자주 만나지는 못하죠. 그 분이 얼마나 바쁘신데.”

너구리가 아니라 능구렁이라도 되나보다. 매끈매끈한 변명들이 유려하게 쏟아져 나왔다. 역시 상대가 이래야 재밌지. 양 기자는 슬쩍 선혜를 바라본 뒤, 원장에게 말을 건넸다.

“주정호 의원, 그 양반이랑 만나서 복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셨다면 제가 올 이유는 되겠지요. 하지만 여기 후배 녀석은 사회부 기자거든요.”

너구리의 시선이 잠시 옆에 앉은 선혜에게 잠시 머물다 돌아왔다.

“불과 2주 전에 여기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관심이 많더라고요. 저희 후배가.”

원장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그 정도라면야.

“그러시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는데, 저희로서는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당시 저희 원에서 당직을 서시던 선생님은 경력도 오래 되셔서 경험이 많으신 분이신 데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하시더군요. 병원에서도 그렇게 진단이 나온 것으로 알고요.”

선혜가 말을 가로챘다.

“예, 그 점은 알고 있습니다. 경찰에서도 그렇게 발표를 했지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의 날씨와 겹쳐서 생긴 문제였다고요. 미혼모 여성의 철없고 무책임한 행동이 만들어낸 비극, 이었다죠.”

원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그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원내의 복지가 문제가 아니라, 인평시 전체의 복지시스템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죠. 여전히 이 사회에는 미혼모가 많이 있고, 그들을 제대로 케어해줄 수 있는 시스템은 미미한 형편이니까요.”

선혜는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그런데, 그 날 보육원에는 원장 선생님이 자리에 안 계시더군요.”

“허허, 아시다시피 그 날 눈이 많이 내려서 도로가 통제되었지요.”

“오전 7시에서 8시 사이에는 도로 통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눈길이 미끄러워서 부분 통제가 되고 있었고, 위험하다는 생각에 출근을 미루다보니 그 날 보육원에 오지 못했죠.”

준비된 듯 술술 나오는 진술은 적을 가치가 없다는 듯, 선혜의 펜은 움직이지 않았다.

“원장 선생님의 집에서 보육원으로 오는 길에는 부분 통제된 곳이 있었습니다.”

“예, 그렇죠.”

“그런데, 당시 원장 선생님은 집에 안 계셨더군요.”

너구리의 얼굴이 석고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후배와 원장의 대화를 여유롭게 들으면서 차를 마시던 양 기자가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서 이제 제 일이 생기네요. 원장 선생님, 그 날 저녁에 어디 계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이거 좀 불쾌하군요. 양 기자님께서 언제 경찰로 전직이라도 하셨나요?”

“아, 취재입니다, 취재. 강요하는 건 아니고요. 묵비권 지키신다고 해도 저야 할 말은 없죠. 대신 저는 계속 떠들어도 되죠?”

원장의 눈썹이 꿈틀거릴 때, 양 기자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느긋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폭설로 인해 보육원에 문제가 생겼던 그 날, 원장선생님께는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지시를 못 받았던 것 같더라고요. 핸드폰이든 집 전화든 다 받지를 않으셨나 봅니다. 그래서 집에 안계시고 어딜 가셨나 궁금해서 ‘취재’를 했더니, 아니 세상에? 우연히도 주 의원님도 그 시간에 집에 안 계셨더라고요?”

“······.”

“그리고 세상에, 우연히도 주의원님과 원장님이 전날 만나기로 약속했었다는 것을 알아냈지 뭡니까? 저녁 약속을 말이죠.”

원장이 눈을 부릅뜨고는 양 기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세상에, 우연히도 주의원님과 원장님이 만나기로 한 장소도 알아냈지 뭡니까? 인평시 외곽에서 오붓하게 만나기 좋은 그 장소를요.”

“양 기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양 기자가 피식 웃었다.

“아시겠지만, 저 정치부 기자입니다. 정치 관련 소스를 찾는 하이에나가 접니다. 그런데 왜 여길 왔겠어요? 냄새가 나니까 왔죠. 그 냄새가 이야길 하더라 이겁니다. 주정호 그 양반, 구린내 풀풀 풍기는데 이제 잡아먹어야겠다, 라고.”

섬뜩한 이야기였다. 원래 양 기자란 사람이 나름 기자로서 발도 넓고 촉이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인 줄 몰랐다. 실제로 주정호 의원과의 만남은 별 거 아니었었다. 만날 때까지는. 만난 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일이 커졌고, 감히 밖으로 드러낼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것을 냄새 맡고 여기로 달려온 것이다.

“저는 아무것도 이야기 할 게 없습니다.”

“작년에 저희가 운을 띄어준 것 기억나십니까?”

“예?”

아까도 그러더니, 작년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다는 거지? 원장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양 기자는 원장의 뒤편 책장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아네스 복지원이 참으로 열심히 라고 말입니다.”

“그야··· 어느 복지원이든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건데요.”

“디딤돌.”

세상 무서울 게 뭐가 있을까 싶던 원장의 눈이 전에 없이 커지면서 양기자를 바라보았다.

“나 참, 지금까지 표정 잘 지키시더니, 고작 그 한 마디에 무너지시면 어쩌십니까?”

양 기자의 너스레에도 원장의 눈은 작아질 줄 몰랐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억지로 다물고 있는 것만도 힘이 다할 정도였다.

“김 원장님, 지금까지는 용케 피하셨겠지만 이번에는 피하시기 어려울 겁니다.”

“아니, 양 기자, 저기 잠시만······.”

“욕심을 적당히 부렸어야죠. 애들 새 출발을 위해 각지에서 기부한 돈을 그렇게 삥땅치시면 어떡합니까? 복지시스템을 그리도 걱정하시는 분께서.”

원장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넓은 이마에서 흐른 땀이 턱밑으로 떨어질 때, 선혜가 쐐기를 박았다.

“오늘 저녁에 보도가 나갈 거예요. 그건 이미 막을 수 없어요. 아마 세무조사랑 검찰 조사 동시에 받으실 겁니다.”

“으으···.”

초점을 잃은 눈과 벌렁거리는 콧구멍을 감상하던 양 기자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아마 이 이후에는 여기서 뵙는 일은 없겠죠. 아마 구치소나 다른 곳에서 뵐 지도 모르겠군요. 그만큼 저희가 확보한 자료는 확실합니다. 다만 이렇게 된 마당에 원장님이 다 안고 가시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뵌 겁니다. 주정호 의원과의 일, 그냥 속 시원히 털어놓으세요. 그 분도 이 일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원장의 시선이 양 기자에게로 맞춰졌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 날, 위기를 헤쳐 나가던 경험과 지식이 수도 없이 저장되어 있지만 현재 이 위기상황에서 해결할 방법은 모두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양 기자는 그 앞에서 하나하나 원장이 저질렀던 일들과 수집한 자료들을 대조해가며 멘탈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 이 녹취록이라면 재단 이사장이신 구회장님도 원장님과 함께 소환당하시게 될 겁니다. 즉, 원장님의 인맥이 여기서는 아무 힘도 못 쓸 거라는 거죠.”

원장은 머리를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양 기자는 들고 있던 자료들을 내려놓고 차갑게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원장님, 가시기 전에 털고 가시죠. 주정호 의원에 대해.”

원장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

“안 가?”

차로 가던 양 기자가 선혜에게 물었다.

“잠깐 보고 갈 아이가 있어요.”

양 기자는 그 아이가 누군지 눈치 챘다.

“그러든지. 그런데 너무 미안해 하지 마. 이런 곳에 있는 것보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게 그 아이한테 더 좋을 수 있어.”

선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단유의 방을 찾아갔다.

“김단유.”

“어? 안녕하세요.”

책상에서 책을 읽고 있던 단유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부하는 중이었니? 방해한 거야?”

“아니요, 괜찮아요. 어쩐 일이세요? 혹시 또 인터뷰인가요?”

“아니, 여기 원장님한테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잠시 들린 거야.”

선혜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 때랑 크게 변한 건 없구나.”

“네.”

선혜는 명수의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같이 방 쓰던 친구는?”

“밖에서 공차고 있을 거예요.”

선혜는 단유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혹시 말이야. 여기서 지내는 거, 좋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선혜는 머리를 긁으며 설명했다.

“어쩌면 이 보육원에서 나가야 할지도 몰라서 말이야. 아니, 나가야 할 거야.”

“왜요?”

“보육원을 관리하시는 분들이 비리를 저질러서, 보육원 운영에 문제가 생겼거든. 아마 곧 원장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잡혀 갈 거고, 그러면 보육원이 폐원될 지도 몰라.”

단유는 별 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선혜를 바라보다가 한 마디 했다.

“그런 이유라면, 제가 보육원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아무 의미도 없지 않나요?”

“그렇지. 그런데 괜히 미안해서.”

“왜 기자님이 미안해요?”

“내가 이 사건을 터뜨렸거든?”

단유는 잠깐 뜸을 들였다.

“기자님은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하셔야 할 일을 하신 거 아닌가요?”

선혜는 멍하니 단유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꾸로 됐네. 난 이 일로 니가 머물 자리를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아서 위로해주려고 했는데, 도리어 니가 나를 격려해주는구나.”

딱히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단유는 선혜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떤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폐원이 돼서 여기서 나가야 된다면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건 인평시 복지과에서 알아서 할 텐데, 아마 다른 복지원들로 옮겨질 거야. 전학도 해야 할지 모르고.”

“그렇다면 여기 있던 아이들이 다 함께 가는 건 아니라는 건가요?”

“아마도 그럴 걸?”

이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다 받아줄 복지원은 없을 테니까. 그 순간 단유는 선혜가 앉아 있는 침대의 주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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