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멤버 더 네임-151화 (151/956)

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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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추위가 계속 된다며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는 겨울이었다. 남부와 제주도에 관측 사상 가장 많은 겨울비가 내리던 어느 날, 보육원에도 수없이 많은 눈이 쏟아졌다.

“눈사람 만들래?”

명수가 단유를 꼬셨다. 하지만 단유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왜?”

“너 감기잖아?”

명수는 감기에 걸렸다. 며칠 째 코감기 때문에 코를 훌쩍이면서도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1년 내내 밖에서 뛰어다녔던 명수에게 방에서 가만히 쉬라는 보육교사의 명령은 그렇게도 가혹했었나보다. 명수가 열이 나는 것은 감기 때문이 아니라 뛰지 못해서라고 생각들 정도였다.

“운동해야 건강해진다고 그랬어.”

“넌 이미 감기에 걸렸어.”

“운동하면 나아질 거야.”

“안에서 운동해. 가르쳐 줬잖아.”

단유는 명수에게 호흡법과 함께 간단하게 운동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운동은 곧잘 따라했지만, 호흡하는 법은 쉽게 따라하지 못했다. 호흡을 신경 쓰면서 하면 답답하다는 이유였다.

“작년에는 이렇게 안 추웠던 것 같은데.”

명수가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보며 말했다. 확실히 작년보다 추워진 것도 있었지만, 사실 단유가 알게 모르게 추위를 막아줬던 점도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단유도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방에 틀어박힌 상황. 물론 단유로서는 곤란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러나저러나 어쨌든 책 읽기 좋은 날씨였다.

“재민이랑 유철이한테 축구 가르쳐줘야 하는데.”

“겨울 끝나고 가르쳐줘도 돼.”

“겨울에 특별 수업을 해야 돼. 그래야 실력이 오르지.”

“그 말 똑같이 해줄게. 방학동안 책 좀 읽어.”

“눈 많이 온다. 그치?”

단유는 책에서 눈을 떼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정말 눈이 많이 내렸다. 사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기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적이 없었다. 내려도 금방 녹았던 것 같은데, 오늘은 유달리 많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 어디 간다고 안했어?”

원래 오늘 주영이 데리러 오기로 했었다. 하지만 아침에 연락이 와서 오늘의 약속은 미뤄졌다. 이 날씨에는 누구도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잠깐 나가면 안 될까? 너무 답답한데.”

계속된 명수의 칭얼거림에 단유가 한숨을 내쉬더니, 책을 덮고 일어났다. 명수가 기대어린 눈으로 반짝였다. 확실히 명수는 단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반응이 올 것이란 걸 잘 알았기에 계속 조를 수 있었다. 그리고 단유도 이렇게 될 거란 걸 알면서도 명수가 걱정돼서 굳이 반대를 하고 있었지만 결국 져주는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한테 이야기하고 잠깐 나갔다 오자.”

단유는 명수와 함께 보육교사를 찾아갔다.

“안 돼. 명수 넌 지금 감기야. 나을 때까지 방에서 쉬라고 했잖니? 더 심해지면 같이 지내는 단유도 힘들어져. 단유도 너처럼 감기 걸려서 힘들어지면 좋겠니?”

“아니요.”

“그럼 방으로 돌아가.”

“날씨가 추워지면 운동량이 줄어들게 되고 실내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 환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먼지나 오염물질, 세균, 바이러스 때문에 더 건강에 안 좋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역시 단유였다. 명수가 입을 헤 벌리고는 엄지를 척 내밀었다. 보육교사는 단유가 함께 왔을 때부터 이런 일을 예상했다. 단유가 함께 움직인 이상, 명수의 뜻대로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니 보육교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적당한 타협이었다.

“1시간. 더 이상은 안 된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알라뷰!”

“나가!”

두 사람은 후다닥 방을 뛰쳐나왔다.

“옷 제대로 입고! 장갑이랑 목도리도 해!”

“네!”

잠시 후, 두터운 잠바와 모자를 푹 눌러쓴 명수가 빨간 목도리를 칭칭 감고는 보육원 현관 앞에 섰다. 현관 앞에는 생활지도원 선생님 두 분이서 빗자루로 입구를 쓸고 계셨다.

“니네 지금 나가려고? 눈 너무 많이 오는데?”

“괜찮아요, 날씨가 추워지면 건강에 안 좋고 먼지가 많아서 환기에 안 좋대요. 그래서 밖에 나가서 놀아야 한다고 단유가 그랬어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연습이 수년간 단련된 지도원 선생님들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너무 심하게 놀지 마라. 젖은 옷으로 놀면 감기 더 심해진다.”

“네!”

기분 좋게 대답한 명수가 흐르는 코를 소매로 훔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도 적당히 좀 해라. 계속 저렇게 맞춰주다간 너만 힘들어.”

“괜찮아요, 전.”

단유는 고개를 숙여보이곤 명수의 뒤를 쫓았다. 가끔은 이렇게 명수를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생존에 대한 절박함, 이계에 대한 걱정, 마법에 대한 고민, 미래에 대한 번민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앗, 그걸 피하다니!”

어느새 눈앞으로 날아온 하얀 눈 뭉치를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피해낸 단유는 손으로 긁듯이 눈을 모은 뒤, 재빠르게 두 손으로 꽉꽉 눌러낸 눈을 던졌다. 명수는 두 팔을 들어 눈을 막았다.

그렇게 잠시 설전(雪戰)을 벌이고 있으니 어느새 다른 아이들도 뒤따라 나와 싸움에 참전하면서 규모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야, 니들 저기 가서 해!”

입구에까지 눈이 튀면서 지저분해진 탓에 선생님들이 소리를 빽 지르자, 아이들은 운동장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운동장에는 꽤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유철이나 재민이는 앞으로, 뒤로 넘어지고 구르면서 즐거워했다.

“야, 너, 너. 이리 와서 빨리 눈덩이나 만들어!”

명수가 유철이와 재민이를 불러 일을 시켰다. 아이들은 짧은 다리로 허우적대며 다가와서는 반복노동에 참여했다. 명수는 연신 만들어진 눈덩이를 던지면서도 아이들이 쉬는 꼴(?)을 참아내지 못했다.

“지선이 너도 와!”

어느새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한 팀이 되고 고등학생이 반대 팀이 되었다. 고등학생들이 당연 숫자가 적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만한 페널티였다.

단유도 잠시 어울려서 눈싸움을 하다가, 잠시 물러났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눈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는데, 상대팀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명수야, 이만 들어가자. 더는 안 되겠어.”

“왜? 이제 시작인데!”

이미 1시간이 다 되었지만, 명수에게는 10분 정도밖에 체감되지 않았나보다.

“재민이, 유철이, 지선이는 따라와. 니들은 그만 놀아.”

“더 놀면 안돼요?”

“형~.”

“······.”

지선이는 아무 말 없이 눈뭉치를 뭉쳐서 단유에게 던졌다.

“안 돼. 더 놀면 니들도 명수처럼 감기 걸려. 그럼 앞으로 남은 겨울방학동안 계속 방에만 지내면서 못 나올지도 몰라.”

아이들은 순순히 단유의 말을 들었다. 단유는 지선의 손을 잡고 입구까지 데려다 주었다.

어느새 본관 건물이 눈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바람은 많이 불지 않는데도 눈발에 시야가 제한되니 괜히 겁이 날 정도였다.

“명수야!”

입구에서 명수를 불렀지만, 역시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단유는 목도리를 벗어 두어 번 공중에서 털어낸 뒤 다시 목을 감쌌다.

“애들 다 데리고 와. 더는 위험해서 안 되겠다.”

“네.”

보육교사가 입구까지 나와서 걱정을 했다.

“오늘 난방 확실히 해야겠네요. 저 아이들 들어오는 대로 다들 제대로 씻으라고 전해주세요.”

“네, 선생님.”

생활지도원 한 명이 대답을 하며 입구 앞을 계속 쓸었다. 미끄러지면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기에 열심히 쓸고 또 쓸었다.

“이제 들어오래요. 명수야, 그만 해.”

단유의 외침에 그제야 들고 있던 눈덩이를 내려놓고 좀비들처럼 느릿느릿 걸어서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화단과 길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여서 작은 소목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행히 그런 아이들도 푹신한 쿠션 덕에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다.

“단유야, 우리 아직 눈사람 안 만들었는데?”

“안 돼. 너무 눈이 많이 와서, 더 이상은 위험해. 그리고 이미 1시간 이상 놀았잖아.”

과연 명수는 온 몸이 푹 젖어 있었다. 저게 다 눈이 녹아서 생긴 물은 아닐 것이니, 열심히도 눈뭉치를 던졌음이 분명했다. 복숭아처럼 물든 뺨을 감싸며 명수가 달려왔다.

****

“눈이 많이 내리네?”

재훈이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뒤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감싸 쥔 주영이 대답했다.

“여기도 겨우 왔다고요.”

재훈은 아직 병원복을 벗지 않았다. 이제 거의 다 나았지만, 퇴원은 1달 뒤에 하기로 했다. 어느새 푸른 병원복이 일상복처럼 적응이 되어서 그런지, 야무지게 소매를 걷어 올리고, 두텁게 살이 오른 흰 팔뚝을 자랑하며 다니는 재훈이었다.

“선배, 정말 살 많이 찌셨나봐요?”

“그래? 그래도 계속 물리치료 받으면서 운동하는데도 그런가?”

괜히 뺨을 톡톡 두드리면서 다이어트를 고민하는 재훈이었다.

“얼마 전부터 꼬박꼬박 야식을 챙겨먹는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소문일 뿐이지.”

어느새 ‘나이롱환자’의 반열에 오른 재훈은, 1년간의 재활기간 동안 먹지 못했던 것을 몰아 먹겠다고 마음먹었는지 꾸준히 야식을 통해 영양분을 섭취하고 있었다.

“의사들은 뭐하나 몰라.”

“의사들은 자기 일하는 거고. 너는 니 일 해야지?”

“저는 잘 하고 있어요.”

“오늘 약속 아니었나?”

“인평 시에 폭설주의보가 내렸어요. 가는 길이 다 막혀서 오도 가도 못한다는 이야기, 뉴스 안 보셨어요?”

주영이 병실 한 벽에 달린 TV를 가리켰다.

“아침 드라마 보느라고 못 봤네?”

능청을 떠는 재훈을 흘겨보던 주영은 머그잔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서류 한 철을 꺼내 재훈에게 건넸다.

“부지 매입 완료되었고요, 여기는 설계사 후보들이요. B설계사가 좋다고 소문은 났는데, 일단 한 번씩 검토해보세요.”

“너무 늑장 부리는 거 아냐? 이제 가져다주면 어떡하지?”

느릿느릿 흥얼거리듯 핀잔을 주는 재훈의 손에 내려치듯 서류를 건넨 주영이 다소 높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늑장이라니요? 제가 지금 재단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여기에 선배 일까지 해주면서 몸이 남아나는 줄 알아요?”

“그게 다 라인을 잘 탄 덕 아니겠어?”

“아우, 정말. 진짜 이런 식이면 저 갈아타요?”

“그러든가?”

능글맞게 웃는 재훈을 째려보던 주영이 제풀에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단유는 일주일 뒤에 보면 될 거 같은데, 이제 어떡하실 거예요?”

“뭘?”

“병원 나가면, 이제 활동에 제약은 없어지는데 단유에 대해서도 뭐 달라지는 게 있나 해서요.”

“없어. 단유는 일단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이대로 지내는 게 좋아.”

“그래요?”

“왜냐고 안 물어?”

“이유가 있겠죠.”

“이거, 이 팀장. 게을러졌어?”

“물으면 제대로 가르쳐나 주시고 그러시죠?”

“물어보나 마나라는 거야? 왜 해보지도 않고 그래?”

“제가 지금 선배랑 밀당이라도 해서 남는 게 뭐 있다고 그래요?”

“밀당이라니?”

금시초문이라는 얼굴.

“그럼요, 단유가 왜 계속 그 쪽에 있어야 하는데요?”

“비밀이야.”

“선배!”

“야, 나 아직 환자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주영은 고개를 홱 돌렸다.

“단유는 말이야. 중학교 되면 보육원에서 데리고 나올 거야.”

“걔를요? 어떻게요?”

“입양.”

“입양이요?”

주영의 눈이 커졌다.

****

혜린은 소파에 앉아서 과자를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핑크색 계열에 캐릭터가 그려진 극세사 폴리에스터 재질의 잠옷을 위아래로 입은 소녀는 두 볼이 다람쥐처럼 부풀어있었다.

“혜린아?”

혜린은 대답도 안하고 계속 과자를 입 안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오늘은 날이 어쩔 수 없잖니?”

어머니가 너그러운 목소리로 혜린을 달래보려 했지만, 여간 뿔이 난 게 아니었다.

오늘은 원래 생일파티 때 입을 옷을 사려고 백화점을 가기로 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날이 날이니 어머니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또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이든 모레든 날씨가 풀리면 가서 사면 될 일이었다.

“옷 못 사러가서 그러니?”

혜린은 불퉁한 표정으로 TV를 보다가 툭 한 마디를 뱉었다.

“아니야.”

“그럼, 왜 그래?”

“···전화가 안 와.”

“전화? 무슨 전화?”

“단유한테 전화번호 알려줬는데 전화가 안 와.”

나 참.

“이 아침에 단유가 전화를 왜 해?”

“몰라. 그냥 기분 나빠.”

혜린 나름에는 눈이 내리는 날, 단유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눈이 많이 오는데 괜찮아?’ 라든가 ‘거기도 눈이 많이 내려?’ 라든가 ‘눈 오는데 우리 만날까?’ 같은 전화를 해 주길 상상하고 있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의 눈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다···.”

풋사랑에 빠진 초등학교 4학년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을 어떨까?

“이그, 내 딸만 아니면 진짜 한 대 쥐어 팼다.”

어머니는 혀를 차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날도 추운데 꿀물이라도 하나 타서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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