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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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의 아버지는 반차를 내고 학교로 오셨다. 교문 앞에서는 미리 만나기로 약속했던 오여사가 두터운 갈색 코트를 입고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업이 끝날 시간에 약속을 정했던 터라, 교문 앞은 여러 대의 학원 차들이 서 있었다. 논술학원, 수학학원, 체육관, 발레 학원 등등 다양한 명패를 붙인 학원차들을 보며, 아버지는 새삼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의 교육을 모두 오여사에게 맡겨두었던 터라, 초등학생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뉴스나 오여사의 이야기에서 귀동냥으로 듣는 게 다였던 터였다.
“상훈이는 저 차 타요.”
아버지가 학원 차들을 구경하는 것을 본 오여사가 검지로 가운데 선 승합차 하나를 가리켰다.
“상훈이도 지금 저걸 타야 되는데···.”
오여사의 중얼거림을 흘려들으며 아버지는 몸을 돌렸다.
“갑시다.”
교실에서 보기로 했기에 두 사람은 운동장 가장자리의 보도를 걸어 본관으로 향했다. 운동장에서는 소수의 아이들이 공을 차며 뛰어다니고 있었고, 몇 몇 아이들은 가방을 둘러메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떤 아이들은 아버지를 향해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의 인사를 어떻게 받아야 하나 하다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하게 받아주었다.
“학교에서는 어른들한테 무조건 인사하도록 교육받아서 그럴 거예요.”
이미 경험이 있던 오여사가 어색해하는 아버지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교내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은 모두 윗분들이니까 알든 모르든 인사를 한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다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고 순진한 아이들만 그랬다.
“교육을 잘 받았구먼.”
“우리 상훈이도 인사 잘한다고 소문났거든요?”
4학년 교실이 있는 복도로 들어갔을 무렵, 몇몇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또 몇몇 아이들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이번에는 오여사가 먼저 나서서 인사를 받아주었다.
“상훈이네 반 아이들이에요. 쟤는 상훈이 반에서 부반장 맡은 유영이라고 하고요.”
“어, 그렇구나. 반갑구나.”
오여사가 학부모회 활동을 하면서 자주 학급에 얼굴을 보였던 까닭에 알아보고 인사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모습이나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오여사의 태도가 꽤 익숙해보였다.
“안녕하세요.”
“어머, 그래. 반갑네? 여보, 얘가 단유라고 1학기 때 반장했던 상훈이 친구예요.”
익숙하게 들은 이름이었다. 아마 유일하게 기억하는 상훈이 친구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집에서, 오여사나 상훈이 입에서 자주 거론되던 이름이었으니까.
“듣던 대로 잘 생겼구나.”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익숙하게 인사를 받고 대답하는 단유의 모습이 꽤나 의젓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키도 상훈이보다 커 보이는데다가 운동도 잘 하는지 몸의 체격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소년의 얼굴이었다. 평소에 잘생겼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긴 했지만, 실물로 보니 뭔가 아역배우나 모델 활동하는 연예인들이 이런 얼굴이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아이들은 인사를 받아도 어색한데, 들은 이야기가 워낙 많아서 그런지 단유는 꽤 친근한 느낌도 들었다.
“니가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며?”
“그냥 좋아서 책을 자주 보다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잘하는 과목만 잘하고, 다른 과목은 별로예요.”
겸손인지, 겸양인지 모르겠지만 말하는 모양새도 아이답지 않다. 아이답지 않다고 해서 기분 나쁘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상훈이도 이 아이처럼 의젓하게 행동하고 말주변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래, 이제 집에 가니?”
“···예.”
한 템포 늦게 나온 대답에 아버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아차, 하는 마음에 사과를 할까 생각했다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서 있는 단유를 보며 대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열심히 공부해서···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딱히 덕담을 할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인사치례로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더니 그 다음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 잠깐이지만 ‘훌륭한 사람’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썩 좋지 않았다.
“여보.”
오여사가 아버지의 팔을 잡아끌었다. 시간을 지체하지 말란 뜻이었다. 대충 인사를 마무리하고 그렇게 지나가려는데, 단유가 뒤에서 화답했다.
“상훈이는 좋은 아이예요.”
무슨 소린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오여사도 이 아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걸음을 멈췄다.
****
유난히 추운 겨울에도 한순간 기온이 올라가며 어제까지의 추위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따뜻해지는 날이 있었다. 그 날이 오늘이었다. 덕분에 평소 추위를 많이 타던 지선이 모처럼 인상을 쓰지 않고 등교를 하던 날이었다.
“단유야. 안녕?”
어느 때와 변함없이 같은 표정으로 아침 인사를 하는 혜린을 보며, 단유는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었다. 책상을 정리하고 수업 준비를 하는데, 혜린이 말을 걸었다.
“단유야.”
단유가 혜린을 돌아보자, 혜린이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물었다.
“우리 친구지?”
“응.”
“앞으로도 계속?”
“응.”
별 일 없다면, 앞으로도 친구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마워.”
단유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혜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볼이 상기된 소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책에 시선을 돌리고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단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시선을 돌리다, 앞쪽에 앉은 상훈을 보게 되었다. 오늘도 상훈은 책상에 엎드려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어제는 상훈을 걱정하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그 소년을 건들지 않았다. 상훈이 대화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 접근하지 않은 것이겠지.
단유도 시선을 돌리고 책을 보았다. 그리고 상훈에 대한 일은 잊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는.
점심시간,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혜린과 마주앉아 느릿한 거북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단유 옆에 누군가 다가왔다. 누군가 싶어 옆을 보니 상훈이 식사를 마친 후 급식실을 빠져나가지 않고 단유에게 온 것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해.”
보아하니, 상훈은 혜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마도 혜린이 듣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단유는 굳이 일부러 다가온 상훈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식사를 마무리했다. 뒤따라 나오려는 혜린에게 양해를 구한 뒤, 단유와 상훈은 학교 뒤뜰로 향했다.
“여기면 다른 사람은 못 들을 거야.”
한 때, 명수가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해 난리를 피우기도 했었던 고목 옆 으슥한 곳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이었다.
상훈이 주위를 살피다 머리를 긁적였다. 이 정도로 비밀스럽게 나눌 이야기 정도는 아니었는데.
“단유 너처럼 공부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응?”
상훈은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질문이 가진 의미를 설명했다.
“어제 선생님이 그러셨어. 사람이란 항상 잘하고 똑똑할 수 없다고. 그래서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한다고. 그런데 넌 실수도 안하고 잘못도 안하잖아. 선생님한테 혼난 적도 없고. 시험을 못 친 적도 없고. 아이들은 모두 니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걸 알고, 부모님들도 다 알걸? 그런데 어떻게 공부하면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뭔가 쓸데없는 부연설명이 들어간 것 같지만 요지는 이해했다. 어떻게 공부 하냐고?
“···일단 니가 이야기하는 말의 가정 자체가 무척 잘못됐지만, 일단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책 읽는 거야. 난 너희들처럼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는 거 알잖아? 그냥 책을 많이 읽는 것뿐이야. 책을 읽고 이해하고 또 다른 책을 읽는 게 내가 하는 전부야.”
“그것만 해도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그 정도라면 상훈도 늘 하는 일이었다. 밤 10시까지 책을 읽는데?
“혹시 TV 안 봐?”
“응.”
상훈의 어머니, 오여사는 TV 보지 말고 공부하란 말을 제일 많이 하셨다. 그래도 재미있는 프로가 나오면 눈이 가고 귀가 열려서, 엄마 몰래 볼 때도 있었다. 주말에도 그렇고. 그런데 역시 공부 잘하려면 TV를 보지 말아야 하나보다.
“컴퓨터도 안하고?”
“응.”
역시. 엄마가 하지 마라던 것을 안 하면 이렇게 공부 잘하게 되나보다. 상훈이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단유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게 공부랑 상관있나?”
“응?”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하는 게 공부에 도움이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는 모르겠어. 애초에 난 그런 거에 관심이 없었고, 재미가 없어서 말이야.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공부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너도 알다시피 난 수학이랑 과학은 잘해. 하지만 다른 과목들을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니야. 내가 생각하기에 그 차이점은 재미라고 생각해. 내가 잘하는 과목은 재미가 있어서 계속 했던 과목들이고 다른 건 별로 재미를 못 느끼는 과목들이거든.”
“그래도 넌 성적이 좋잖아.”
“재미가 없다고 해도, 교과서는 계속 읽으니까. 그리고 내 경험에, 수업 때 배운 내용들은 대부분 시험에 나왔어. 말하자면, 수업만 잘 들어도 시험 치는 데 어려움은 없었어.”
어디서 돌 맞을 소리지만, 단유는 전혀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상훈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만약 단유의 이야기대로라면, 상훈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성적을 얻을 방법이 없었다.
“그건 나도 다 하는 거야. 나도 수업 잘 듣고, 책 많이 읽는단 말이야.”
분명 단유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있을 것 같았다. 자신만의 비법 같은 것.
“상훈아.”
“······.”
“그런데 난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실수도 안하고 잘못도 안하는 게 아냐. 나도 실수 많이 해. 잘못도 많이 하고.”
상훈이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단유가 거짓말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유의 깊은 눈은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단유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는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랬으니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겪고, 누군가를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도 만들었었지.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그리고 내가 보기엔 너야말로 실수나 잘못을 하지 않는 걸? 객관적으로 보면 너도 공부 잘하잖아? 선생님도 자주 칭찬하고. 아이들한테 친절하게 대하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잖아. 그런데 왜 니가 그런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
상훈은 울컥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 시험 치던 날···컨닝하려고 했었어.”
“컨닝 했어?”
“아니. 안했어.”
“안했으면 됐어. 안했는데 뭐가 문제야?”
“그래도 나쁜 마음먹었다고. 난 착하지 않아. 친절하지도 않고. 공부도 너보다 못해서 엄마한테 혼나. 계속 학원 다니는 데도 1등도 못한다고.”
울먹거리는 상훈의 물기 젖은 목소릴 듣던 단유는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상훈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선생님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대답하면 된다고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나쁜 마음을 먹었던 거잖아. 만약 나중에도 공부를 계속 못하면, 진짜로 나쁜 짓을 할 수도 있잖아.”
“그래서, 공부를 잘하면 나쁜 짓을 안 한다고 생각 한 거야?”
“그래! 공부만 잘하면, 엄마도 화 안 낼 거고, 아빠한테도 칭찬받을 거고, 선생님도 뭐라고 안하실거야. 아이들도 더 좋은 친구로 생각할 거야.”
단유는 잠깐 지난 일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훈의 고민과는 궤가 다르지만, 단유 역시 나쁜 마음을 먹었던 적이 있었고, 그 때의 마음을 지금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상훈의 입장이었다면, 단유의 위치에 선 아이는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로 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순간 섬뜩한 상상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단유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려다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 뭔가 위화감이 든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눈앞에 선 상훈과 자신은 너무나 달랐다. 생각이나 행동이 다른 것도 있지만, 사고방식이 너무 달랐다.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상훈처럼 이렇게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대화를 시도할 수 있을까?
동인형과 마주섰던 산 정상에서, 미치광이 제윅 앞에서, 리아빈 나뭇길 위에서 맞닥뜨린 복면인 앞에서, 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신을 감추고 대적했다.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런 싸움의 여파일까?
그런 면에서 보면 상훈은 정말 착하고 순진하기만 한 아이였다.
“상훈아. 난 부모님이 안 계셔.”
상훈이 순간 잊고 있었다는 듯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렸다.
“하지만,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부모님들은 내가 무얼 해도 좋아하셨어. 실수를 해도 날 좋아 하셨고, 잘못을 해도 용서하셨어. 너희 부모님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해. 단지 순간의 실수나 잘못 때문에 너를 싫어하지는 않을 거 같아.”
“그래도! 난 엄마나 아빠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엄마는 내 성적표를 보면 실망한단 말이야. 학원에 늦게 가도 늦지 않았다고 거짓말 하면 화낸다고. 아빠는 거짓말 하는 걸 되게 싫어하시고.”
상훈이 절박함을 담아 하소연했다.
“그러니까, 너만 알고 있는 비법 좀 알려줘. 있잖아. 그냥 수업만 듣는다고 그렇게 안 되잖아. 나도 그렇게 하는데 안 된단 말이야.”
단유는 담담한 표정을 상훈의 눈을 응시했다. 그 절박함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