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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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가 혜린의 고백을 거절한 이후, 단유는 혜린이 서먹하게 대할 거라고 짐작했다. 유림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혜린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같았다. 사실 평소에도 특별히 친근하게 대한다거나 말을 많이 붙인다거나 하는 행동은 없었기에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단유가 느끼기엔 큰 차이가 없었다.
“단유야, 이것 좀 가르쳐 줘.”
혜린이 수학 책에 나온 문제 하나를 물어보았다. 단유는 별 어려움 없이 알아듣기 쉽게 가르쳐주었고, 혜린은 특별한 반응 없이 단조로운 톤으로 고맙다며 짧은 인사만 남겼다. 유림과는 4학년 1학기가 시작하고 나서도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어색함이 줄었던 것에 비하면, 혹시 고백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유림이 보기에도 혜린은 딱히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혹시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적당히 견제를 가할 생각이었던 유림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혜린의 모습에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혜린은 달랐다. 비록 단유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쉽게 꺾을 수 없었다. 예전에도 다른 남자아이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단유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감정을 느꼈다. 좋으니까 좋다, 라는 모호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색과 형태가 선명한 감정이 만들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혜린은 자기 방식대로, 자기 마음이 가는대로 단유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안녕?”
우선 단유보다 항상 일찍 등교를 했다. 보육원 차를 타고 오는 단유는 늘 일정한 시간에 등교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일찍 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등교를 하면 가장 먼저, 물티슈로 책상을 닦았다. 자신의 책상을 닦으면서 동시에 단유의 책상도 함께 닦았다. 그리고 공부할 책들을 서랍에 정리하고 읽을 만한 책을 한 권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기다렸다. 그리고 단유가 오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 안녕.”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게 인사를 받던 단유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았다. 가끔은 은은한 미소를 띨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남몰래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써야 했다. 단유가 책상을 정리하고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읽을 책을 펼쳐 들면, 자신도 준비한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은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조용히,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책을 봤다.
단유가 보육원에 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혜린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단유가 입는 옷들이 모두 물려받은 옷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단유의 옷들은 보통 유행을 많이 벗어난 옷들인 경우가 많았다.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가 그려진 옷도 있었고, 소매가 헤진 옷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단유는 그런 패션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혜린이 시간을 두고 관찰했더니 주로 입는 옷의 패턴이 있었다. 주로 흰색 계통 위주로 옷을 입되 주기적으로 같은 옷을 입는 패턴이 있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그날 입은 옷을 빨래를 맡긴 후 다시 찾아 입는 기간이 일정하다보니, 주기적으로 같은 옷을 입는 것이었지만 그 이유가 중요하진 않았다.
“얘, 그거 입기는 날이 너무 춥지 않니?”
“괜찮아, 엄마.”
단유가 하얀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올 때면, 혜린도 하얀 카디건을 걸치고 왔다. 노란색 인형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올 때면, 밝은 노란색 계열의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었다. 단유는 거의 청바지를 입었고, 그래서 혜린도 아침마다 예쁜 청바지들을 골라 입고 등교했다. 그렇게 남몰래 커플룩 분위기를 내보는 혜린이었다.
“단유야, 종쳤어.”
단유는 거의 대부분 완벽한 모범생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가끔씩 부족한 부분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혜린이 조심스럽게 그 부분들을 채워 주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고 있을 때면 어깨를 톡톡 두르려 주위를 환기시켜 주었다.
또 창문이 열려 머리가 날릴 때면, 조용히 일어나 창문을 닫아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단유의 헝클어진 머리도 다듬어주고 싶지만,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도록 손을 눌러야 했다. 책을 읽고 있을 때, 교실 뒤편에서 눈치 없이 떠드는 아이가 있을 때는 몰래 일어나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미안, 시끄러워서 그래. 부탁해.”
아이들은 최근 들어 공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혜린의 말에 딱히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이 자리를 피하면, 혜린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책에 집중하고만 있는 단유였다.
미술시간에는 붓이나 물감을 가운데에 올려두고 넌지시 이야기했다.
“이거 써.”
“고마워.”
단유는 혜린에게 넓은 붓을 건네받으며 고마워했다. 단유가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혜린은 준비물이 필요할 때 좀 더 넉넉하게 챙겼다. 한 자루만 챙겨도 충분할 붓을 3자루 씩 챙긴다던지, 찰흙을 챙길 때도 한 덩이 더 챙겨온다던지 하는 식으로 준비했다. 또 필통에도 늘 색연필이나 샤프를 두 개 이상씩 챙겨놓고 다녔다.
어느 날은 단유가 평소와 같이 등교를 하는데, 머리에 적갈색 낙엽이 붙어 있었다. 슬며시 손을 내밀어, 낙엽을 떼어내니 단유가 머쓱해하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혜린은 슬쩍 미소를 지은 뒤, 손에 들린 낙엽을 바라보았다.
“예쁘네.”
혜린은 낙엽을 쓰레기통이 아닌 사물함에 모셔놓았다.
점심시간이면 학교 급식실에서 식사를 했다. 다른 남자아이들이 급하게 점심을 챙겨먹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가기 바쁠 때, 단유는 늘 그렇듯 천천히 식사를 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단유의 앞자리는 혜린이 차지했다.
“얼레, 둘이 같이 밥 먹는 거야?”
“너희 둘이, 좋아하는 거야?”
“오오!”
처음에는 다른 아이들이 서로 마주보고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놀리기도 했지만, 단유나 혜린이 그런 놀림에 반응할 아이들은 아니었다. 그랬더니 점점 놀림은 줄어들었고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반응이 나왔다. 어차피 교실에서도 짝이니까, 하는 반응이었다. 그런 반응이 나온 또 다른 이유는, 두 사람이 식사를 하는 동안 전혀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자애들처럼 수다를 떨지도 않았고, 서로 눈을 마주보며 사랑의 속삭임을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둘은 그저 나란히 마주앉아 천천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로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식사를 했다. 그러니 보기 재미있지도 않았고, 반응도 없으니 아이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다만 유림만이 껄끄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러나 가끔 혜린은 아무도 모르게 살짝 시선을 올려 단유를 바라보았다. 하얀 피부의 단유가 느릿느릿 턱을 움직이며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즐거워했다. 그런 모습을 즐기느라 혜린은 소년의 페이스에 맞춰 밥을 떠먹고 반찬을 집었다. 소년과 함께 오물거리고 소년과 함께 물을 마셨다. 그러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부끄러우면서도 기뻤다.
혜린은 늘 마음이 따뜻했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을 때가 많았고, 그러다보니 표정이 밝아졌다. 사고 이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걱정이 많았던 어머니의 입장에서 밝아진 딸의 표정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좋니?”
학교에서나 아무도 모르게, 얌전하게 행동할 뿐이었지 집에만 오면 그야말로 비글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다음날 준비물을 챙기는 것부터 해서, 내일 수업시간에 해야 할 숙제와 단유에게 물어보아야 할 단원과제들까지 챙기느라 분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렇다보니 눈치 채지 못하려야 못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응. 좋아.”
배시시 웃는 딸이 귀엽고 앙큼했다.
“뭐가 그렇게 좋아? 걔는 너 안 좋아한대며?”
괘씸하게도 말이다. 그렇게 잘해주는 데도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들은 적 없다니. 그러나 속없는 딸은 그래도 좋단다.
“괜찮아. 좋아한다고 안하고 3초 이상 내 눈을 바라보지도 않지만, 그래도 좋아. 난 걔한테 좋아한다고 말도 했고, 1분 이상 바라보고 있을 수 있으니까.”
요는 내가 좋으니까 다 좋다는 거다. 이 어린 딸의 감정이 어찌 이리 애틋할까 싶어 괜히 마음이 쓰이지만, 이것도 한 때라 생각하니 그냥 두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어머니였다.
“그래도 서운하지 않니?”
한 사람의 진심이 일방통행이라면 지치기 마련이다.
“괜찮아. 아침에 인사하면 웃을 때도 있고, 학교 끝나면 잘 가라고 먼저 인사해 줄 때도 많아.”
단유가 내일 보자고 인사를 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내일 보자는 약속도 약속이니까. 그 약속이 즐거웠고, 내일을 기다리게 해주었다.
혜린이 좋아하는 옷을 입고 왔을 때 예쁘다고 칭찬도 안 해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이 뭔지도 모르고, 자기가 좋아하는 날씨가 어떤 건지도 모르는 남자애지만, 그래도 추워하면 말없이 일어나 뒷문과 창문을 닫아주고, 복도에서 달리는 아이들에게 부딪히기 전에 앞으로 나가 방패처럼 지켜 줄 때도 있었다.
그 날 이후, 다정하게 사담을 나눈 적은 없지만, 입을 무겁게 하는 대신 서로를 편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더 커졌다고 혜린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편하게 해주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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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말하자면 4학년도 이제 마지막이라는 이야기였다. 단유에게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4학년이었다. 때문에 어느 때보다 고민도 많이 하고 생각도 많아져 더욱 조심스럽게 생활한 1년이었다.
그러다보니 저도 모르게 소심해진 면도 없잖아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질문을 하지 않거나, 수업에 덜 적극적이었던 것이라면, 이제는 스스로가 튀는 것이 두려워 더 안으로 숨어드는 포지션을 취한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덕분에 성적은 계속 상위권을 유지했고, 단유 스스로의 지식도 더 많이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더 알고 싶다.’
이전까지는 절실히 느끼지 못했던 허기짐을 느꼈다. 적당히 알고 넘어가는 수준에서 이제는 더 알고 싶다는 감정이 생겼다. 아마도 이제 재훈이 형이 말한 ‘지식욕’이란 것일 텐데, 재훈형은 이에 대해 달리 조언해 준 바가 없었다.
‘전화해볼까?’
재훈에게 직접 전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보육원 내의 전화기로 주영에게 전화를 해서 면회를 신청할 수는 있을 것이다. 주영도 2학기 개학 이후로는 찾아오는 일이 적어졌다. 아니 거의 없어졌다. 당시에는 달리 서운하다는 감정도 없었지만, 지금은 아쉬움이란 감정이 생겼다.
“김단유!”
선생님이 단유를 지적했다. 평소라면 수업시간에 넋 놓고 있을 리 없는데 요즘 들어 부쩍 이런 일이 잦아졌다.
“선생님 말에 집중안하고 뭐하니?”
웬만하면 선생님도 단유를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지적해봐야 달리 시킬 일도 없었고 문제를 풀라고 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단유가 나서봐야 다른 아이들이 괴리감만 느낄 뿐일 것이다.
일전에 혹시나 하고 과학시간에 문제를 하나 풀어 보라고 했더니, 무슨 중학교 과외문제 풀 듯이 온갖 잡지식을 꺼내놓으며 설명을 해대는 바람에 선생님이 식은땀을 흘린 적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단유는 간단하게 사죄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자, 다음은···.”
선생님은 이런 행동이 다른 아이들에게 편파적으로 보일까봐 걱정을 했지만, 의외로 아이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도 이제 단유를 거의 외계인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딱히 왕따 취급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키도 반에서 제일 큰 아이들 편에 설 정도로 커졌고, 운동도 잘하는―하지만 축구는 거의 끼지 않는―반장 출신의 단유였기에.
아이들은 어린 나이지만 그에게 다소 경외감 비슷한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단유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의 눈은 깊어만 갔고, 그와 비례해서 아이들은 단유에게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불쾌한 거리감이라기보다는 경건한 울타리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