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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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단유가 학교에 왔을 때 혜린이 먼저 와 있었다.
“안녕?”
수줍게 웃으며 인사하는 혜린에게 단유도 짧게 인사를 하고는 옆 자리에 앉았다. 혜린이 힐끔 눈치를 봤지만, 단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안녕?”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혜린이 돌아보니 유림이 단유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보라색 레이스가 달린, 귀여움을 한껏 강조한 스커트와 하늘하늘한 소재의 아우터를 걸친 유림의 옷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혜린이 저도 모르게 힘을 주고 주먹을 쥘 때, 단유는 역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받아준 뒤, 다시 책을 꺼내고 중간쯤을 펼쳤다.
“잠깐 이야기 좀 할래?”
유림의 제안에 단유가 고개를 들었다.
“나?”
“응.”
오히려 반응은 혜린에게서 나왔다. 동공이 심하게 떨리더니, 벌떡 일어섰다.
“나랑 먼저 이야기해.”
혜린은 유림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교실에 등교하던 아이들이나, 이미 와있던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교실 뒤의 현장을 쳐다보았다. 잠시나마 당황했던 유림은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곧 태도를 바꿨다.
“그래, 나가자.”
먼저 몸을 돌리고 씩씩하게 나가는 유림과 그를 뒤따르는 혜린. 이 쯤 되니 단유도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제 그만 둔 싸움을 계속 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작년의 기억에서 유림이 만만치 않은 여장부(?)임을 확인했던 단유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차원에서 이 사태에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책을 덮고 일어선 소년이 뒤를 따르는 줄 모르는 두 여자아이는 학교 본관 뒤편으로 향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학교 뒤는 늘 축축한 느낌이 가득했는데, 특히나 9월 이후부터는 선선한 가을 아침의 습한 기운 때문에 질척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왜 하필 여기야?”
혜린이 툴툴대자 유림이 고개를 홱 돌리며 뾰족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럼 운동장 한 가운데서 할래?”
“뭘 해?”
“왜 모른 척이야? 그럼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닐래? 삼각관계라고?”
혜린은 얼굴을 붉히며 멈춰 섰다. 유림은 혜린을 노려보다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왜? 신발 더러워질까봐?”
혜린은 어제와 같이 분홍색 아동용 구두를 신고 있었다. 꽤 고급스러워보이는 터라 살짝 부럽기까지 했던 디자인의 신발이었다.
“좋아, 그냥 여기서 이야기해.”
유림이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었다. 혜린보다 키가 큰 유림이 내려다보면 웬만한 아이들은 기가 죽기 마련인데, 혜린은 겁 없이 유림을 노려보았다.
한 학기를 지내면서 서로를 잘 알게 된 두 사람이었다. 다른 반이었을 때는 그저 키 크고 운동 잘하며 싸움도 곧잘 하는 아이로만 알았던 유림이, 사실은 꽤 공부도 잘하고 직설적이지만 아무한테나 시비 거는 유형의 아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찬가지로 얌전해보이고 친한 몇몇 아이들과만 지내는 소심한 성격인줄로만 알았던 혜린이, 사실은 꽤 독한 면도 있고 고집스러운 면도 있으며 깡(?)도 있는 아이라는 것을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알게 된 유림이었다.
게다가 어제도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어지간해서는 다들 피하기 마련인데도 혜린은 꽤나 당당하게 자신과 마주했었다.
“어제도 말했지만, 내가 먼저 좋아했어. 그러니 포기해 줬으면 좋겠어.”
혜린은 허리께에 두 손을 올리고는 어깨를 폈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어제 나도 말했지만,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두 감정의 대립은 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는 이상, 이대로 평행선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잠시간의 침묵을 깬 것은 혜린이었다.
“니가 좋아하면 다른 사람은 좋아하면 안 되는 거야?”
“당연하지.”
“왜?”
“내가 먼저 좋아했으니까.”
혜린은 어제 밤새 고민하며 준비했던 무기를 꺼냈다.
“만약 니가 단유를 먼저 좋아했다는 걸 인정해도, 단유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건 너의 짝사랑일 뿐이잖아. 그게 다른 사람이 단유를 좋아하면 안 될 이유는 되지 않아.”
혜린의 말은 길을 잘 들인 총구에서 쏘아진 총알처럼 날아가 유림의 가슴 가장 안쪽까지 파고 들었다.
“그리고 단유가 싫어하는데 좋아하는 것도 문제야. 왜 싫다는데 질척거리니?”
혜린은 쌍권총을 차고 있었나보다. 유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단유는 싫어하지 않아!”
빽 소리를 질러보지만, 혜린이 여유 만만한 목소리로 다시 총구를 겨눴다.
“단유가 너 좋대?”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어!”
의외의 대답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단유가 저 말 그대로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혜린은 판단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혜린의 총구를 빗나가게 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단유가 너 좋대?”
“그럼 너는? 단유가 넌 좋다고 그랬어?”
혜린이 씩 웃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래서 물어보려고. 단유가 나 좋다고 하는지 안하는지. 너도 궁금하잖아?”
유림은 머리에 큰 총알을 때려 맞은 기분이 들었다.
“웃기지마.”
“왜? 단유한테 내가 좋은지 안 좋은지 물어보자고. 물어보고 나 싫다고 하면 너도 좋은 거잖아? 안 그래?”
묘한 자신감에 불타오르는 혜린의 태도에 불안감만 커지는 유림이었다. 도대체 뭐가 있는 거지?
“뭘 물어봐?”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싸움을 말리려고 따라왔던 단유의 존재를 이제야 깨달은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혜린은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상태였다.
“물어볼 게 있어.”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뭘?”
“묻지 마!”
당황하고 침착함을 잃어버린 유림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무슨 일이야?”
싸우기는커녕 이상하게 유림이 밀리는 분위기? 라고 느낀 단유가 되물었다.
“묻지 마! 너도 말하지 마! 너 경고했다! 말하면 너 가만 안 둬!”
표독스럽게 변해버린 유림이었다. 고리눈을 뜨고 어금니를 깨문 유림이 어울리지 않게 협박을 하니, 혜린은 아무렇지 않게 유림의 옆으로 돌아 나갔다.
“단유야. 나 너 좋아해.”
“응?”
“강혜린!”
혜린이 단유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 너 좋아해.”
“왜?”
“넌 날 살렸으니까.”
단유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소리야? 김단유, 얘가 무슨 이야기 하는 거니?”
오히려 유림이 뜬금없는 소리에 의문을 표시했다. 혜린이 죽다 살아난 이야기는 주위 어른들의 입을 통해 들은 바가 있었지만, 거기에 단유가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단유는 혜린과 시선을 마주한 채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몰랐고, 유림이 듣는 이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어려웠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낸다고 해도 그 때 그 이야기가 입에 오를 것 같아서 괜히 조심스러워지는 단유였다.
“왜 둘 다 아무 말 안 해?”
불안해진 것은 유림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는 모양새가 어쩐지 둘만의 비밀을 가지고 교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유림은 어느 쪽을 붙잡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혜린아.”
어렵사리 입을 연 것은 단유였다.
“응. 말해.”
“만약에 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거야?”
혜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단유는 재차 물었다.
“만약에 내가 널 좋아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좋아하면?”
“응.”
“그, 그럼 사귀는 거지.”
유림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그런 반응에 개의치 않고 단유는 말을 이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건데?”
단유는 나름 이성적으로 이 사태를 해결하고 싶었다. 혜린과 함께 갔었던 저 쪽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이 곳에서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혜린이 어떤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입을 열거나 닫을 건지를 물었다. 그런 의도였다.
다만 단유가 생각한 것보다 여자는 감성적이었다는 것.
“너 나 싫어해?”
“···아니.”
“그럼 나 좋아해?”
“···아니.”
대답은 하지 않고 갑작스레 치고 들어오는 직설에 단유는 당황하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이 문답이 끝난 뒤, 다시 자신의 질문을 할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하면서.
다만 단유는 여자가 감성적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럼 왜 날 살려 준거야?”
단유는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자신이 살려줬다고 시인하는 것도 힘들고, 그렇다고 살려준 게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혜린이 너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때, 단유를 도운 이가 있었으니 유림이었다. 유림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는 순간, 이 사태를 끝내기로 했다.
“강혜린. 그만 해. 단유가 너 안 좋아한 대잖아.”
분명히 단유는 좋아하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림은 혜림에게 반격할 기회를 얻은 셈이었으니까.
“아직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 니가 그랬지? 질척거리지 말라고.”
유림은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며, 앞으로 한 발 다가갔다. 하얀 운동화에 젖은 진흙이 튀어 올랐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정도 쯤이야.
“뭐래? 누가 질척거려?”
“니가 그러고 있잖아? 단유는 분명히 너 안 좋아한다고 말했어. 그러니까···그만 꺼져.”
단유는 머리를 짚었다. 이 두 사람은 이성적으로 대화를 할 마음이 없는 게 분명해 보였다. 다들 말꼬리를 잡거나, 감정적인 대응으로 서로의 감정을 서로 자극하는 중이었다. 이래서는 원하는 대화를 할 가능성이 없었다.
게다가···.
“야, 니들 종쳤어.”
3층에서 내려다보던 명수가 소리쳤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을까? 세 사람이 명수를 올려다보자, 명수가 씨익 웃으며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오오!”
단유는 눈썹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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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그 날 하루, 수업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옆에 앉은 혜린이 계속 샐쭉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척 하는 것도 힘들었고, 쉬는 시간마다 앞뒤를 왔다갔다하며 눈에 띄게 노려보는 유림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다보니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가진 비밀의 노출 때문이었다. 애초에 좋은 의도로 선택했던 일이었던지라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다보니 저쪽 세상에서 눈을 떴던 혜린이 과연 그 일을 똑바로 기억하고 있는지, 있다면 그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긁어 부스럼 만든다는 말이 이런 상황을 일컫는 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었다.
‘좀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어야 하나?’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늘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럼에도 가끔씩 이 곳의 것이 아닌 힘을 발휘한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동인의 경우가 그랬고, 영어선생님과의 경우가 그랬다. 명수에게 불꽃놀이를 보여준 적도 있지만, 이 부분은 그렇게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명수였다면 더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아무튼 좋은 의도로 행했던 행동이 이런 식으로 되갚아질 줄 몰랐던 탓에 단유는 머리가 아파왔다. 만약 이런 경우가 앞으로도 또 생길 것이라 본다면, 단유는 섣불리 힘을 쓰기 힘들 것이고, 쓰지도 말아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차후의 문제였고, 지금은 혜린의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여전히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모호함뿐이었다. 다만 이전의 일도 있고 해서, 책으로 찾아본 바에 따르면 남녀의 만남은 감정적 교류를 기반으로 했다. 처음 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지만, 혜린과는 다른 경우라고 생각했다. 사고가 있기 이전에도 제대로 이야기 한 적이 본인의 기억에는 없었다. 사고 이후에도 딱히 제대로 얼굴 본 적이 없었고, 개학 첫 날 짝이 되고 말았는데 무슨 좋아하는 감정이 생긴단 말인가.
‘여자는 어렵구나.’
결론은 여자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유림이 그랬고, 혜린이 그랬다. 돌이켜보면, 자기가 늘 어렵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였던 것 같다. 자원봉사를 오던 누나도 그렇고, 녹스의 약초상에서 일할 때 귀찮게 굴던 아이도 그렇고, 불과 얼마 전 자신을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할 뻔도 했던 신의 축복이었던 여자도 그렇다.
‘여자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 볼까?’
단유는 새로 공부해야 할 과목이 늘었다는 사실이 별로 기쁘지 않았다. 어쩐지 마음고생만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