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3)
-------------- 142/952 --------------
“나 갈래.”
유림이 먼저 몸을 돌렸다. 내려놓았던 가방을 툭툭 털어낸 뒤 둘러매고 한 걸음 떼던 찰나.
“단유야.”
혜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고개가 부러져라 돌린 유림은 혜린의 태도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나···.”
“강혜린!”
유림은 혜린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후다닥 달려와 혜린의 손목을 붙잡은 유림은 날카로운 눈으로 혜린을 노려보았다. 괜히 입이 바싹 마름을 느끼던 혜린은 유림과 그 뒤에 서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단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자.”
유림은 짧게 한 마디 뱉고는 억지로 혜린을 끌고 갔다. 단유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하며 혜린을 이끌었다. 혜린은 유림의 힘에 못 버티고 끌려가야만 했다.
그렇게 두 여자아이가 알 수 없는 신경전을 벌어다 바람같이 사라지자 단유만 괜히 뻘쭘해지는 기분이었다. 두 아이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을 때에야 발을 뗀 단유는 곧 교문 앞에서 기다리던 명수와 만났다.
“너 때문에 싸운 거 아냐?”
“나?”
“너 방학 전에 고백 받은 거 있어?”
단유는 기억을 되짚어보지만, 방학 전에 고백 받은 적이 없다. 유림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있지만, 그건 3학년 겨울방학 전의 일이였다. 그리고 그 때 대답도 확실하게 했던 상태였다.
즉, 유림이 고백했다는 상대는 단유가 아닌 다른 남자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 남자아이를 혜린이도 좋아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구나. 그래도 고백을 받은 적은 있었던 거네?”
“작년 일이야.”
“역시 여자들이란. 마음이 갈대야.”
명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침 지선이 저 멀리서 눈치를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쟤도 조금 있으면 너랑 같이 있기 싫다고 도망 다닐걸?”
단유가 지선을 바라보았다. 명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지선을 보니 웃음이 났다. 지선이가 누굴 좋아하던 그게 무슨 상관일까. 그저 지선이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선아. 이리 와. 곧 차 올 거야.”
지선이 통통거리는 걸음으로 단유에게 달려왔다.
****
“유림이 너, 오늘 학원 늦었다며! 왜 늦었어?”
3학년 때 성적이 떨어진 이후부터 유림의 엄마는 초밀착 특별 단속 모드로 돌변하여 유림의 성적관리를 하는 중이었다. 이유 없는 변화는 아니었기에, 유림도 별 말없이 어머니의 변화를 받아들이긴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괜히 서운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학교에서 조금 늦었어.”
“너 이제 부반장도 아니라며? 학교 마치면 빨리 학원 갔어야지.”
유림은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질 것이 두려워, 화제를 돌렸다.
“엄마, 나 물어볼 거 있어.”
어머니는 유림이 일부러 화제를 돌리려는 것을 눈치 챘다. 뻣뻣한 표정과 더듬는 말투를 보면 모를 수 없었지만, 일단 들어보자는 심산으로 되물었다.
“뭔데?”
“저기···.”
유림은 뭘 물을까 하다,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에 무심코 말을 뱉었다.
“친구가 어떤 남자애를 좋아하는데, 그 남자애를 좋아하는 또 다른 애가 있는 거야. 그런데 서로 한 친구는 자기가 먼저 남자애를 좋아했다고 그러고, 다른 친구는 아직 사귀는 게 아니니까 자기가 좋아해도 된다는 거야. 그런데 친구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요것 봐라?’
이 익숙한 레퍼토리는 일일 드라마 단골 스토리인데? 엄마는 눈치를 챘다.
“서유림 너!”
“네?”
뜨끔한 유림이 어깨를 움츠릴 때, 엄마가 일갈했다.
“엄마가 너 성적 올라갈 때까지, 드라마 보지 말랬지? 너 언제 본거야? 지금은 니가 그런 드라마 볼 때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어? 그런 건 나중에 나이 더 들고 봐도 된다고 했어, 안했어? 응?”
“···아니야, 엄마. 안 봤어.”
“아니긴 뭐가 아니니? 너 그래가지고 뭐가 되려고 그래? 그깟 드라마 때문에 쓸데없는 데 신경이나 쓰면, 공부는 언제 하려고 그래? 엄마가 나 좋자고 그래? 너 잘되라고 학원도 보내주고, 숙제도 봐주는데. 엄마 마음을 그렇게 몰라?”
“아닌데.”
“한 동안 얌전하게 학원 다니고 공부도 하고 해서 엄마가 너 믿고 잠깐 풀어줬더니, 그 새를 못 참고 드라마를 봐? 내가 아주 TV 못 보게 없애버릴까? 토요일에도 TV 못 보게? 그럴까?”
“아냐, 정말 안 봤어.”
얼굴이 달아오른 엄마와 다른 이유로 달아오른 유림이 거실에서 대치를 벌일 때, 아빠가 안방에서 나오시면서 한 말씀 하셨다.
“거, 애 좀 그만 잡아. 애가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면 그러겠어.”
“당신도 그만 좀 싸고 돌아요. 지금도 이런데, 나중에는 얼마나 심하겠어요? 나쁜 습관은 일찍 잡아야 한다니까, 애 아빠가 더 길을 들이고 그래요?”
아버지는 크흠, 헛기침을 한 후 거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리모컨을 들어 올리니, 어머니가 소리쳤다.
“서유림, 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얼른 방으로 돌아가!”
유림은 아무 말도 못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채널을 돌리며 볼 만한 프로그램을 물색하는 모습을 보던 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질책했다.
“당신도 TV꺼요. 공부분위기를 만들어줘도 모자랄 판에 거실에서 TV보고 있으면 애가 집중을 하겠어요? 당장 꺼요, 얼른.”
아버지는 눈치를 보다 TV를 끄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애를 위해서라는데 뭐라고 변명할까. 아버지는 넓은 등을 보이시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
“엄마, 나 궁금한 게 있어요.”
“응? 뭐?”
혜린은 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침대 위에 던져 놓고 어머니를 찾았다. 식탁에서 과일을 깎던 어머니는 혜린에게 시선을 던졌다.
“친구가 어떤 남자애를 좋아한대. 그런데 그 남자애를 좋아하는 또 다른 애가 있었나봐. 그런데 그 애가 예전에 남자애한테 먼저 고백을 했다는 거야. 그러면 친구가 고백한 남자애는 좋아하면 안 되는 거야?”
어머닌 실소를 터뜨렸다. 여자들이란. 결국 나이가 많던 적던, 하는 행동은 다 거기서 거기였나 보다.
“그 여자 애 둘이 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응.”
“그런데 여자 둘은 친구고?”
“응.”
“삼각관계네?”
“응.”
어머니는 과일 접시 위에 포크를 하나 얹어서 혜린이 앞으로 밀었다.
“그런데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애를 좋아해도 되냐고?”
“응.”
어머니는 사과 한 조각을 맨손으로 집어 아삭 깨물었다. 사과즙이 입안에서 새콤한 향을 터뜨리며 퍼져나갔다.
“안되지.”
“안 돼?”
울상이 된 혜린을 보며, 어머니 피식 웃었다.
“그 남자애를 누가 좋아했던, 사람 마음 가는 걸 막으면 안 된다는 거지.”
“엉?”
어머니는 포크로 다른 사과 한 조각을 집어 혜린에게 건넸다.
“내가 너한테 아빠한테 가지 말라고 하면, 너 아빠한테 안갈 거야?”
“음···.”
갑자기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어머니. 난데없는 질문에 혜린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빠한테 가고는 싶은데, 엄마가 가지 말라고 하면 또 가기 어렵다.
“이 때는 아빠한테 가고 안 가고를 엄마가 결정하는 게 옳지 않은 거야. 너한테도 소중한 아빠인데, 엄마가 가라마라 하는 게 맞겠니? 결국 니 마음이 중요한 건데 말이야.”
“그래도 엄마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거야.”
굳이 대답하기 어려운 예를 들긴 했지만, 또 딸이 이렇게 말해주니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그래도 엄마랑 아빠 만나는 건 니 선택인거야. 비록 엄마랑 아빠가 다투고 헤어져 살지만, 니가 아빠랑 다툰 건 아니잖아. 게다가 너의 하나뿐인 아빤데. 아빠 싫어하는 거 아니잖아.”
“응.”
“그런데 비슷해. 니가 어떤 남자애를 좋아할 때, 그 남자애가 다른 여자애랑 사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 여자애가 일방적으로 좋아했던 거라면, 뭐 어때? 니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사귈 수도 있지.”
“그치? 어··· 근데 나 아닌데?”
혜린이 방긋 웃다가 금세 당황한 얼굴로 이야기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니 귀엽기만 했다. 어머니는 과연 그럴까? 라는 표정으로 혜린을 바라보자, 혜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 아니면 말고.”
“치,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르긴 뭘 모르니 이 녀석아. 어머니는 꿀밤 대신 한 차례 더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로 귀엽고 소중한 딸의 마음을 지켜주었다.
****
“아, 이제 선생님 안 오니까 심심하다.”
명수가 침대에 드러누우며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했다. 단유는 애초에 같이 수업도 듣지 않던 명수가 하은을 그리워하는 듯하니 우습기만 했다.
“배가 고픈 건 아니고?”
“그런 것도 있고.”
레스토랑을 함께 다녀온 이후, 하은은 보육원에 올 때 가방에 먹을거리를 하나씩 들고 왔다. 주영의 귀띔도 있었지만, 레스토랑에서 보여준 명수의 먹성에 깊이 감명을 받은 탓이었다. 어느 날은 크림 빵, 어느 날은 작은 외산 비스킷 등을 가지고 와서 선물로 명수에게 주었다. 단유 걸 챙겨줄 때도 있었지만, 단유가 늘 명수에게 넘겨준다는 걸 안 이후로는 명수 꺼만 챙겨주었다.
명수는 선생님이 오실 시간에 방에서 대기하다가, 하은이 오면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선물(?)을 받았다. 그러면 선물을 고이 자기 책상 서랍에 모셔놓은 뒤, 공부에 방해되지 않도록 운동장으로 뛰쳐나갔었다.
“숙제나 하자.”
점점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짧아지면서 명수가 운동장에 머무는 시간도 줄었다. 식사 후 짧은 식후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명수에게 단유는 같이 공부할 것을 권했다. 괜히 입맛을 다시던 명수도 이제는 자기 공부도 조금씩 챙겨나가는 중이었다.
사실 명수는 4학년이 되면서 많이 변했다. 단순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리더십을 갖춘 아이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축구 시합 때 아이들을 진두지휘하는 정도만이 아니라, 학급에서 체육부장이란 직책까지 갖추면서 ‘책임감’을 겸비한 리더십을 욕심내기 시작한 것이다. 공부 못하는 체육부장이란 타이틀이 싫었는지 곧잘 공부―거의 단유에게 붙어 시험 전 특별과외를 받는 형식―도 했고, 성적도 곧잘 나오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자신의 말이 아이들에게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에 자신감도 붙기 시작했다.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책을 아예 멀리했던 지난날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셈이었다.
“배고파서 공부가 될까 모르겠네.”
챙겨놨던 선물을 야식삼아 조금씩 먹었던 방학동안의 일상이 그리운 명수였다.
“숙제하는 동안에는 신경을 그리로 쓰니까, 배고플 겨를도 없지 않을까?”
단유는 그랬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모든 걸 잊을 만큼 몰입했으니까.
“넌 그렇겠지.”
명수도 그 사실을 안다. 보육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안다. 단유의 집중력은 모든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자기는 아니었다. 정말 입이 궁금해서 다른 걸 하기 싫었다. 명수는 가만히 있다, 마침 입이 심심하지 않을 거리가 생각났다.
“아, 석고야. 오늘 걔들 있잖아.”
“누구?”
“여자애들 싸우던 거.”
혜린과 유림.
“응. 왜?”
“걔네들이 좋아하는 남자애가 누구야? 넌 알 거 아냐? 너희반인데.”
“모르겠는데?”
혜린이 누굴 좋아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고, 유림은 작년엔 자길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아까의 이야기로 봐서는 또 다른 애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한 번 맞춰봐. 궁금하지 않아?”
익살맞게 실실대며 호기심을 드러내는 명수에 비해 단유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자기랑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야기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이 누굴 좋아하던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너도 참. 답답하다. 여자 애 둘이서 한 남자를 두고 다투는 게 재밌지 않으면 도대체 뭐가 재밌어?”
명수가 가슴을 툭툭 두드리면서 답답해 하지만, 오히려 단유는 그게 뭐가 재밌냐고 반문했다.
“야, 남자랑 응? 여자랑 응? 둘이서 응? 얼레리 꼴레린데? 안 재밌어?”
단유는 명수가 맨날 공만 차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이런 남녀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게다가 걔 누구지? 유림이라고 했나? 걔가 키는 좀 커도 얼굴이 예쁘잖아? 아, 같이 있던 애도 예쁘던데. 그럼 궁금하잖아? 예쁜 애들이 좋아하는 남자애가 누굴까? 안 궁금해?”
안 궁금했다. 그리고 예쁘다? 단유는 턱을 괴고 잠시 두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얼굴이 예뻐?”
“그럼 예쁘지. 넌 아니야?”
“모르겠는데.”
“왜?”
명수는 친구의 심미안을 의심했다. 어떻게 그 얼굴을 보고 안 예쁘다고 느껴?
“일단 유림이는 눈썹과 미간 사이의 비율이 조금 좋지 않아. 그리고 코가 조금 길어. 눈이 크긴 한데 얼굴 전체의 면적에 대비하면, 조금 작아야 할 거 같아. 입 꼬리가 살짝 내려가는데 각도가 좋지 않아. 2도 내지 3도 정도 올라가는 게 얼굴의 전체 균형상 보기 좋을 거야. 혜린이는 얼굴의 착색이 별로 좋지 않아. 기본적으로 얼굴의 색이 고르게 나면 좋은데 이마 색과 턱의 색이 조금 불균형이야. 눈썹이 조금 짧고 광대 아래 부분에서 턱까지 이어지는 길이가 전체에 비해 짧아. 그리고 목의 길이와 귀의 위치가···.”
“그만!”
명수가 단유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안타까운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그냥 니가 걱정돼서.”
“내가?”
단유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명수를 바라보지만, 명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책상으로 다가갔다. 노트와 책을 챙기더니 단유에게 말했다.
“그냥 숙제나 도와줘.”
단유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