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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141화 (141/956)

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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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은 부끄럼을 무릅쓰고 제일 먼저 손을 든 덕에 원하는 짝과 앉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용기백배하여 후발주자들이 손을 들었고, 원하는 짝을 쟁취하기 위한 눈치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손을 든 사람들은 모두 여자아이들이었다.

“우리 반 남자애들은 용기가 없어.”

점심시간. 남자가 용기 있게 먼저 다가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여자애들이 푸념을 할 때, 남자아이들은 공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 오늘은 우리 팀이랑 하자.”

“안 돼, 오늘은 우리랑 해야지.”

남자들은 그들만의 리그가 있었다.

한편, 언제나 그렇듯이 단유는 느긋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도서관으로 갔다.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단유가 1학년이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한 자리를 지키는 도서관 사서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방학 전까지는 올림머리를 하고 계시더니, 지금은 짧게 커트를 하고 컬이 약간 들어간 볼륨펌을 하고 계셨다.

“너 키 많이 컸구나? 점점 멋있어지네?”

“고맙습니다.”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많겠어? 그치?”

마침 자판기 커피를 두 잔 뽑아서 들고 오시던 선생님 덕분에 단유는 자연스럽게 사서선생님에게 벗어났다.

“선생님, 여기요.”

“고마워요, 한 선생님.”

단유는 한 선생님에게도 인사를 하고는 서재로 갔다.

“쟤가 그렇게 똑똑하다면서요?”

한 선생님은 작년에 이 학교로 온, 올해 2년째를 맞이한 선생님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애일걸요? 예전에는 방송에도 나갔어. 똑똑한 아이라고 소문이 나서 말이에요.”

“어머, 그래요?”

한 선생님은 사서 선생님 옆에 의자를 하나두고 나란히 앉았다.

“근데 보육원 애라서 그런가 친구가 없나 봐요. 맨날 여기 오네. 솔직히 저 나이 때 애들 중에 이 시간에 도서관 오는 애가 없잖아? 그런데 저 애는 항상 점심시간에 오거든? 책을 좋아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하루도 안 빠지고 여길 오겠어? 얼굴은 반반한데 아무래도 보육원 애라서 그런가, 조금 어두운 면도 있어요.”

사서 선생님은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반장이었다는데요?”

한 선생님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사서 선생님의 말을 받았다.

“반장이라고 애들이 좋아한다는 법은 없지. 오히려 공부를 잘하니까 애들이 반장하라고 뽑았겠지. 그런 말 있잖아요? 수재들만 모인 회사가 멍청한 일을 저지른다고. 똑똑한 사람들도 한 조직 안에 모아두면 집단우둔의 상태로 빠지는 경향이 보인대요. 애들도 마찬가지라고요. 개별적으로 물으면 저 사람이 싫어. 그런데 다 같이 모아서 뜻을 모으라하면 잘못된 선택도 잘못이라고 인식을 못한다고 하잖아요.”

한 선생님은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집단 우둔화를 막기 위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던가? 아무튼 학교라는 곳에서 선생님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도 그런 거예요. 아이들이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고, 개개인의 개성을 살릴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한 거죠. 집단생활에서 개인의 개성을 살릴 수 있도록 교육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어려운 일이예요? 그래서 교사란 직업이 힘든 거죠.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그저 철밥통인 것처럼만 보고 방학 챙겨먹는 꿀직장이라고 뒷담화를 한다니까.”

짧게 혀를 차는 사서선생님이었다. 한 선생님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처음에 이 학교로 왔을 때, 우연히 마주친 후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주셔서 고맙게 생각하고 가까워졌는데 가끔 이렇게 자기 오류에 빠져서 뭐가 틀렸는지도 모르고 떠드는 경우가 잦았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점점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다른 선생님들이 도서관에 잘 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구나.’

뒤늦게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라며 한 선생님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빨리 나가야겠다.

****

“혜린아,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수업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중이던 혜린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유림이 굳은 얼굴을 하고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

이야기라면 오늘 하루 종일 차고 넘칠 만큼 한 것 같은데. 혜린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당초 무대에서 떨어진 이후부터, 눈을 뜨기 사이까지 정신을 잃었던 상태니 기억나는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때, 알몸 상태로 단유와 마주쳤다는 이야기는 결코 꺼낼 수도 없는 소재였으니 넘어가더라도 영혼이니, 천사니 하는 것은 아는 바가 없었다.

도리어 친구들이 이토록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하루였다.

“저기 가서 이야기해.”

유림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정글짐이 있는 운동장 구석의 외진 곳이었다. 사고 이후 학원도 가지 않는 혜린은 급할 일이 없었기에 순순히 유림을 따라갔다.

빨간 가죽의 가방을 둘러맨 유림이 정글짐 근처에 자리 잡고는 가방을 벗어 옆에 내려놓았다. 혜린은 유림이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기세에 기가 눌려 침만 꿀꺽 삼켰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유림은 3학년 당시 최강자로 군림하던 ‘혜진’과 맞장을 뜨던(?) 이였다. 무려 대장군(?)에 버금가던 이와 마주하자니 기가 눌릴 수밖에.

“너, 왜 단유랑 짝 하고 싶다고 했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에 혜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냥.”

“그냥이 어딨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너, 단유 좋아하니?”

‘아, 무섭다.’

사고가 났던 이야기를 듣던 때보다 더 무서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혜린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온 귀환자(?)답게 평정을 찾기 위해 애쓰며 유림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런 건 아냐.”

“그런 게 아니란 말은 단유를 안 좋아한다는 말이야?”

“······.”

이쯤 되니, 대충 유림의 말은 이해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 대화의 끝에는 ‘포기해’ 따위의 말이 나올 것이다. 혜린 역시 엄마랑 함께 드라마로 인생을 배워 온 여자였다. 보통 이런 장면에서 두 사람의 캐릭터는 선과 악으로 나뉘던데, 자신은 선일까?

“아직, 단유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그래도 싫어하는 건 아냐.”

“무슨 말이야!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딱 부러지게 설명해 봐. 아니면 단유한테 관심 끊어.”

이 봐. 딱 예상하던 대화야.

“단유가 너 좋아해?”

“응?”

유림은 의외의 반격에 치명상을 입었다.

“니가 단유를 좋아하는 건 알겠어. 그런데 단유가 너 좋아해? 둘이 사귀는 사이야?”

“······.”

무딘 인상의 혜린이 의외로 날카로운 창을 가지고 있었다. 유림은 미처 방어를 예상 못했던 자신의 실수를 남몰래 탓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단유는 나 싫어하지 않아. 나도 그렇고. 여기 니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그건 니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뭐라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나일 줄이야. 유림은 울컥했다. 그리고 혜린 역시 울컥했다.

“나도 단유를 좋아할 자격이 있어. 단유도 나 싫어하지 않을 테니까. 단유가 누굴 좋아할지를 니가 고르는 게 아니잖아? 왜 니 맘대로 좋아하라 마라야?”

“와, 얘 말하는 거 봐? 너 드라마 좀 봤나보다?”

“너도 마찬가지거든? 너 지금 하는 행동 좀 봐.”

둘은 팔짱을 끼고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면서 운동장의 모래가 두 사람의 발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너 고백했어?”

혜린이 다시 창을 겨눴다. 이번에도 유림은 방어를 못하고 깊은 치명상을 입었다.

“난 할 거야.”

“뭐? 너 아까는 좋아하는 거 아니라며!”

“지금 생각해보니까 좋아하는 거 맞아. 그러니까 고백할거야. 내가 지금 짝이니까 내가 먼저 할 권리가 있어.”

유림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하는 걸 자존심으로 억눌렀다. 자기가 짝일 때 선수를 쳤어야 했는데. 한 번 거절당했다고 미루다가 엉뚱한 애한테 뺏길 처지가 되었다. 이래서 비련의 여주인공들이 마음을 모질게 먹나 보다.

“악독한 년.”

“뭐? 너 말 다했어?”

유림의 독기 서린 말에 혜린은 둔기로 맞은 듯 어질어질한 기분이었다. 생전 ‘악독’이란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난 이미 고백했고, 대답을 기다리는 중이야. 그러니까 끼어들지 마.”

사실 왜곡. 하지만 혜린이 알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혜린이 피식 웃으며 유림을 째려보았다.

“웃기고 있네. 너 거짓말 하는 거 다 티나.”

“뭐, 뭐. 내가 거짓말한다는 증거가 어딨어?”

“난 알아. 너 거짓말이라는 거. 진짜였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얘기하지 그랬어?”

“쪽팔려서 그랬다, 왜! 어쩔 건데!”

유림이 팔짱을 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어쩐지 기세가 넘어간 형국이었다.

“웃기지마. 그럼 언제 했는데?”

“방학 전에 했어!”

“오늘 대답 못 들었지?”

“그, 그래.”

“그럼 너 거절당한 거야. 2달 넘게 대답 못 들었으면 거절당한 거야.”

유림은 혜린이 이렇게 사악한 애인줄 몰랐다. 어떻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매번 가슴 깊숙이 약한 곳에만 찔러 넣냐?

“이게 정말!”

유림이 주먹을 쥐고 한바탕 뒹굴 준비를 하는데,

“그만해.”

담장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그 목소리에 마법이라도 걸린 듯 움직임을 멈췄다. 한 사람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한 사람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공지선, 거기 서!”

명수가 소리를 지르며 지선을 쫓았고, 지선은 예의 덤덤한 표정으로 작은 다리를 재게 놀려 명수로부터 도망을 갔다. 발단은 명수가 자기 방학숙제라고 가지고 왔던 노트에 박제시켜 놓았던 나비를 자랑하듯이 보여줄 때였다.

“부럽지? 부럽지?”

그것은 뒤뜰의 개망초 흰 꽃 위를 날아다니던, 새까만 날개에 빨간 점들이 두드러지는 제비나비였다. 빛을 받으면 고급스러운 검은색 비단처럼 보여 명수가 무척 좋아했다.

앞서 잡았던 다른 나비들에 비해 훨씬 크고 색이 예뻐서 명수는 다른 나비를 포기하고 이 나비만 가졌었다.

지선이 작은 눈으로 명수와 나비를 담담하게 쳐다보다가, 눈보다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조그마한 손가락들이 갈고리처럼 굽혀지며 순식간에 노트 위를 긁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있던 나비가 갈가리 찢기며 비산했다.

설마 그럴 줄은 몰랐던 명수가 얼이 빠져 있다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지선을 바라볼 때, 이미 지선은 빠르게 달아나고 있었다.

“공지선! 너 잡히면 죽어!”

축구로 단련된 명수가 뒤늦게 출발했지만, 지선을 붙잡지 못할 리 없었다. 그리고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단유도 명수 뒤를 쫓아 달렸다. 지선이 학교 담을 따라 달리다 모퉁이 돌 때쯤, 명수가 바짝 따라 붙었다. 그러나 곧 뒤쫓던 단유가 명수를 붙잡았다.

“참아. 내가 다음에 다른 거 구해줄게. 그리고 지선이 아직 어리잖아. 모르고 그랬을 거야.”

“걔가 몰랐을 거라고?”

물론, 단유 역시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단유는 명수의 어깨를 다독이며 억지로 교문 쪽으로 몸을 돌려 세우는데, 담 너머에서 익숙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단유의 얼굴이 굳었다.

명수도 분위기를 느끼고, 킥킥거리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대화를 엿들었다. 그리고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려는 그 때, 단유가 소리쳤다.

“그만해.”

****

단유는 교문을 넘어 두 사람에게로 갔다. 그 때까지도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노려본다기 보다는 이 사태를 어떡하면 좋을 지에 대해 눈으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니가 어떻게 해봐.’

‘니가 먼저 말 꺼냈잖아.’

‘좋아한다며?’

‘싫다고 안한 거잖아?’

반쯤 울기 직전인 두 사람 앞에 선 단유는, 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왜 그래? 친구잖아. 친구끼리 왜 싸우고 그래.”

두 사람은 단유를 흘깃 보았다가 다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못 들었나?’

‘모르나?’

유림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디서부터 들었는데?”

단유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유림이 욕했을 때부터?”

유림의 얼굴이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변했다.

“그럼 우리가 싸운다고 생각한 거야?”

혜린이 물었다.

“응. 싸우고 있었잖아?”

“우리가 왜···싸우고 있었다고 생각해?”

“음···잘은 모르겠지만, 그냥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 때 담장 너머에서 웃음을 참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 때문에 싸운 거야.”

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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