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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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 동안 단유는 본인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간 홀로 공부하느라 애썼던 것에 비하면 짧은 시간에 중등 수학을 마스터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특히 단유가 힘들어했던 부분이 통계와 이차함수 부분이었는데, 하은은 단유의 수준에 맞게 적절한 포인트를 지적해주면서 학습을 도와주었다.
일방적인 가르침보다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여 단유가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주안을 둔 과외였다. 덕분에 단유는 획일적인 교습에서 벗어나 스스로 궁리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었고, 이러한 학습방식으로 다른 과목에도 도움이 되었다.
“명수야. 얼른 준비해.”
“먼저 내려가지 마. 기다려 거기.”
명수가 옷을 마저 갈아입고, 가방을 둘러맬 때까지 단유는 방 입구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명수가 단유의 어깨를 툭 치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명수야, 첫 날부터 왜 이리 굼떠! 동생들 보기 부끄럽지 않니?”
“내가 부끄러워?”
재민과 유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선이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명수의 어깨를 탁 치고는 아이들을 선도해서 안전하게 차에 오르도록 도왔다. 지선이 작은 다리로 쫓아와 단유의 손을 붙잡았다. 단유는 지선의 손을 잡고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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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상 가을이라지만, 아직 더운 여름의 기운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대부분 짧은 반팔 티셔츠를 입었고, 더러는 반바지를 입고 등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단유가 반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소년의 눈에 띄는 것은 얼굴색들이었다. 얼굴이 아주 거무죽죽하게 변한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하얗게 변한 아이들도 있었다. 여름방학만큼 아이들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게 또 있을까 싶었다.
“반장? 키 커진 거 아냐?”
한 아이가 단유를 보더니 인사를 했다. 또 커졌나 싶지만, 재어 보질 않아서 잘 모르겠다. 단유는 어색하지 않게 가볍게 손 인사로 대신하며 자리로 갔다.
창가 쪽은 역시나 아침 햇살이 길게 들어와 코팅된 책상 면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단유는 그런 빛깔과 질감이 좋았다. 마치 집 앞의 너럭바위를 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녕?”
단유가 책상 위를 짚어보고 있을 때, 유림이 옆으로 왔다.
“어, 너 키 커졌다?”
유림 역시 단유 옆에 서더니, 단유의 키에 놀랐다.
“난 모르겠는데.”
“너 커졌어. 예전에는 내가 너보다 키 컸는데, 이제 비슷하잖아.”
방학 전까지는 단유가 유림보다 5~6㎝ 정도 작았었는데, 이제는 거의 눈이 같은 높이에 있었다.
“다행이다.”
유림은 작게 중얼거리며 가방을 정리했다. 단유는 뭐가 다행일까, 물어보려했지만 곧 다른 목소리가 끼어드는 바람에 말을 잇질 못했다.
“안녕, 반장.”
유림과 단유의 시선이 모두 앞으로 돌아갔다. 책상 앞에 서 있던 사람은 혜린이었다. 유림이 벌떡 일어섰다.
“혜린아! 괜찮아?”
사담을 나누다가 혜린이 소리 없이 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했던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괜찮아? 아픈 데 없어? 우리 걱정 많이 했어.”
“고마워. 이제 다 나았어.”
혜린이 아이들의 인사를 받는 사이, 단유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지고 온 책을 폈다. 그 모습을 혜린이 슬쩍 보았지만, 워낙 많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터라,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유림은 눈물을 흘릴 기세로 혜린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내가, 너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 많이 했는데.”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울컥 감정이 차오르니 여자 아이들은 금세 눈꼬리를 찍어 눌렀다. 그리고 그 감정을 따라가지 못하는 남자아이들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천천히 자리를 이탈했다. 단유마저도 어색한 분위기에 일어서서 자리를 피해야 하나, 아니면 자기 자리니까 고개나 숙이고 있을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올 때까지 유림과 혜린을 필두로 여자 아이들이 뭉쳐서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여자 아이들이 뭉치면 나오는 흔한 레퍼토리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생에 단 한 번 경험할까 말까한 일을 겪은 혜린은 거의 슈퍼스타급이었다. 본인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죽었다가 3일 뒤 부활하신 분 못지않은 거룩하고 신성한 존재처럼 다루어졌다.
“아무 기억도 안나?”
“···별로 나는 건 없었어.”
“내가 어떤 책에서 봤는데, 천사를 따라가서 천국을 구경해도 다시 돌아오면 기억이 나질 않는대.”
단유는 도대체 기억도 나질 않는다면서 천사는 어떻게 기억하고 이야기를 썼을까, 궁금했다.
“우리 이모도 예전에 한 번 죽을 뻔 했는데, 그 때 어떤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와서 자기 손을 잡으려고 했대. 근데 이모가 그 손을 잡으면 영원히 떠나야 할 것 같아서 손을 감췄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이 계속 쫓아오면서 ‘손 내놔, 니 손 내놔’ 이랬대. 그래서 우리 이모가 막 도망쳤대. 그러다가 그 사람이 ‘다음에는 안 봐준다’ 그러고는 사라졌대. 그 후에 우리 이모가 깨어난 거야.”
그건 미담이 아니라 공포소설 급인데.
“혜린아, 넌 영혼이 막 빠져나가서 니 몸 보고 그런 건 없었어?”
“아니···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왜 드라마 보면, 영혼이 쓱 빠져나가서 내 몸이 침대에 누워 있는 거 보다가 쑥 사라지잖아? 선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영혼설까지 나왔으니 다음엔 뭐가 나오려나? 그런 생각의 와중에 우연히 단유는 자길 훔쳐보던 혜린과 눈이 마주쳤다. 혜린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단유도 괜히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단유로서는 딱히 혜린이 문제가 아니라,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에, 합리적이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억지로 들으며 버텨야 하는 이 상황 자체가 난감할 뿐이었지만, 그런 반응을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야, 선생님 들어오시겠다. 일단 나중에 이야기해.”
유림이 서둘러 아이들을 각자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아이들은 혜린에게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유림아.”
“응, 너도 나중에 이야기하자. 선생님 곧 들어오실 시간이야.”
부반장으로서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는 유림이었다. 혜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반장.”
유림이 작은 목소리로 단유를 불렀다.
“왜?”
단유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유림을 돌아보다, 흠칫했다. 어쩐지 조금 전 등교 때의 표정이 아니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단유가 속으로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유림이 지긋이 단유를 응시하다 한숨을 토해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은 할 기분이 아니야.”
‘아니, 내가 말하자고 했나? 자기가 말 걸어놓고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유림의 행동에 의아해하는 단유였다. 그 사이 유림은 혜린의 뒷모습을 관찰했다. 하얀색 긴팔 티셔츠를 안에 입고 그 위로 짙은 파란색의 하얗고 작은 도트무늬가 있는 스쿨룩 원피스를 걸쳐 입고 있었다. 분홍색 단화까지 신고 나온 걸 보면, 분명 각오가 선 것이 분명했다.
‘이 남자, 어떻게 지켜야 하지?’
유림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 꿈에도 모르는 단유는 그저 종이 울리길 바랐다. 첫 시간은 HR시간. 단유가 1학기 반장직을 그만할 수 있게 되는, 공식적인 임기종료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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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전에도 계속 복잡했지만, 단유의 얼굴을 보고 나니 더욱 복잡하고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자길 바라보니, 도대체 자신의 기억 속 그 모습과 장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에 대해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아이들의 환영인사 때문에 첫 시도는 무산되었다. 그런데 등교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단유의 담담한 표정을 바라보자니 과연 이 말을 꺼내도 되는 것일까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괜히 이야기했다가 미쳤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다가 아까 어떤 친구가 ‘영혼’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복잡한 속이 더욱 얽히고설키는 기분이었다.
‘영혼이 천국엘 갔다가 온 걸까? 그러면 거기 단유는 왜 있었던 거지?’
혹시 저승사자가 단유를 닮았던 걸까, 라는 엉뚱한 생각에까지 미치는 자신의 상상력 때문에 더더욱 단유에게 말 걸기가 두려워진 혜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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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반장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2학기 반장으로는 상훈이가 뽑혔다.
“저를 반장으로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단유 학생 덕분에 생긴 우리 반의 ‘고맙습니다’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리고 더욱 우리 반을 위해 힘쓰고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로 한 건 없지만, 그래도 반장직에서 내려오니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하는 일 없는 일이라도 직책을 맡고 있으면 어깨가 굉장히 무겁고 부담스럽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딱히 반을 위해 무언가 최선을 다했다는 기분은 솔직히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1학기 동안 반장으로서 최선을 다해주었다며 박수를 쳐 줄때는 뿌듯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다시 이런 일을 맡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이런 일을 맡으면 그 때는 좀 더 최선을 다해야겠구나.’
그래야 최선을 다했다며 웃음과 박수로 보답하는 친구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새로 뽑힌 반장은 앞으로 우리 반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하도록 하고, 전임 반장처럼 우리 반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단유, 열심히 했고. 니가 반장이어서 선생님이 굉장히 고마웠다. 자 다들, 박수.”
선생님의 인사와 다시 이어진 박수에 단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유림도 부반장직으로 내려놓고 일반(?) 학생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공부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니까, 잘 된 거야.”
자신에 대한 위로인지, 아니면 단유를 위한 위로인지는 잘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 그리고 오늘은 자리를 바꿀게요. 새롭게 시작하는 만큼, 새로운 짝과 함께 새출발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아이도 있고, 부끄러워(?)하는 아이도 있고, 귀찮아하는 아이도 있었다. 단유는 아무렇지도 않은 아이였고, 유림은 짜증이 나는 아이였다.
“굳이 바꿔야 하나요?”
라고 묻고 싶은 걸 억지로 눌러 참았다. 괜한 놀림감이 되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1학기동안 여러분들은 서로에 대해 많이 알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선생님이 생각해보니까, 서로 원하는 짝들끼리 앉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죠?”
“네!”
선생님은 빙긋 웃으셨다.
“그래서 여러분들한테 선택권을 드릴게요. 나는 이 사람과 같이 앉고 싶다,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고 발표하세요. 그러면 그 사람과 앉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릴 거예요. 단 상대가 거부하면 같이 못 앉아요. 알겠죠?”
“네?”
새로운 방식의 공개 처형인가, 라는 생각을 유림이 잠깐 해보았다. 어떻게 자기 입으로 ‘누구랑 같이 앉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많은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저요!”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탁이, 말해봐. 누구랑 앉고 싶어?”
“저는 얘요.”
가리킨 것은 원래 짝이었다. 아이들이 ‘우우’거리며 야유를 보낼 때, 선생님이 방긋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원래 짝은 안돼요. 반드시 새로운 짝을 선택할 것. 또, 반드시 이성의 짝이어야 할 것!”
“예?”
아이들이 놀래서 소리쳤다.
“안돼요, 선생님. 안돼요.”
“아이, 어떡해.”
선생님은 웃으면서 검지를 들었다.
“자, 조용. 1분, 아니 2분 동안 신청 받아요. 2분 동안 앉고 싶은 사람 있으면 손들고 말하기, 나머지는 번호 순으로 앉기. 시작!”
마음을 정리할 틈도 주지 않고 졸속으로 강행해버리는 선생님의 태도에 성난 아이들의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렸다. 2분이란 제한 시간은 아이들의 마음을 태풍처럼 흔들어 댔다.
‘어떡하지.’
특히 유림은 방법이 없었다. 반드시 헤어져야 할 운명. 헤어져야 할 상대. 우리 이제 안녕인가요.
그렇게 단유를 슬쩍 바라보는데, 단유는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조금은 감정을 실은 눈빛으로 바라봐 주면 안 되나?’
심술이 난 유림이 단유의 팔을 찰싹 때렸다.
“아!”
작은 감탄사를 내며 단유가 고개를 돌렸다가, 유림의 시선에 머쓱해하며 시선을 돌렸다.
“저요, 선생님.”
혜린이 손을 들었다. 유림은 불안했다. 단유는 멍했다.
“그래. 혜린이. 혜린이는 누구랑 앉고 싶어?”
“반, 아니 단유요.”
“오오!”
아이들은 하나같이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놀리듯 감탄했고, 혜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유림은 불안이 사실이 되자 괜히 화가 났다. 그리고 단유는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었다.
“좋아?”
유림이 작은 소리로 단유에게 물었다. 왜 굳이 그렇게 작게 말하냐고 묻지는 않았다. 다만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작게 대답했다.
“좋고 말고가 어딨어. 그냥 같이 앉는 건데.”
그냥 같이 앉는 게 아니고, 무려 ‘같이’ 앉는 거다.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모르는 이 무뚝뚝한 남자애가 미워졌다. 유림은 한 번 더 단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