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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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의 조기 졸업 선언은 그냥 되는 대로 내뱉은 말만은 아니었다. 평소보다 더 수업에 집중했고, 도서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쉬는 시간에도 책을 붙들고 늘어졌다. 눈 밑으로 검은 그늘이 짙어짐에도 신경 쓰지 않았고, 머리카락이 점점 푸석해진다는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쟤 안 씻은 거 같지?”
“머리가 떡인데?”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할 정도가 되어, 하은은 명지를 붙들고 이야기했다. 다가가서 보니 명지는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엉망으로 흘러내린 머릿결과 퍼석해진 두 뺨은 창백했다.
“너 잠은 자니?”
“바빠.”
명지는 보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형광펜을 신경질적으로 그어대며 한 글자라도 더 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명지는 시간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모든 걸 서둘렀고, 매달렸다. 평소라면 저녁 시간대의 특강 시간에 명지는 ‘음악과 수학’이란 강의를 찾아들었을 테지만, 지금은 오로지 졸업을 위한 공부를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조기 졸업을 위해 필요한 자격 중 하나는 필요 학점을 이수하는 것. 그게 되지 않는다면 조기 졸업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학점은 되니?”
하은이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명지의 시선은 형광색으로 줄이 쳐진 해답지의 풀이를 보고, 손은 빈 노트 위를 열심히 내달리며 각종 공식들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괜찮아.”
점점 문답이 어려워졌고, 종래에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명지가 대화를 거부한 탓도 있었고, 하은이 제풀에 지친 탓도 있었다. 명지는 더욱 공부에 열을 올렸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아이들이 명지에게 품었던 판타지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심지어는 선생님들마저 명지를 걱정하며 조금 더 건강에 유의하길 바랐지만, 명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전 아무 문제없어요.”
그리고 기이하게도 명지의 성적은 점점 떨어졌다. 아이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선생님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영재라고 해도, 결국 사람이었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고, 건강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결국 집중력이 저하되고 암기나 계산 능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유형이 비단 명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수많은 선배들이 그런 착오를 했고, 종국에는 영재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전학을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명지는 오로지 수업과 책에 집중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눈에서 총기가 사라지고 집중력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명지의 부모는 오히려 열심히 하는 애한테 공부하지 말라는 거냐며, 일부러 전화를 걸어준 선생님을 타박했다. 공부에 ‘적당히’가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한다는 말에 기뻐했다.
몇 번의 시험들이 있었고 명지는 성적표를 받고 구겨서 가방에 욱여넣었다.
“난 할 거야. 난 할 수 있어.”
명지는 다시 책을 펼쳐 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하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친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학기 마지막 시험이 다가왔다. 무학년 졸업학점제를 선택한 영재학교의 특성상, 이번 시험에서 받는 점수에 따라 조기 졸업도 가능할 것이다. 다만 그간 떨어진 점수 때문에 이번에 평점을 맞추려면 꽤 좋은 점수를 얻어야 했다.
하은은 언제나 그렇듯,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무리하지 않고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험을 치렀다. 반면 명지는 시험시간에 쓰러졌다.
“명지야!”
그러나 곧 몸을 추스른 명지는 선생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제발요, 선생님. 꼭 시험 보게 해주세요. 예?”
반의 아이들은 명지를 괴물 보듯 쳐다보았다. 그녀의 기이한 의지와 집착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모습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명지는 조기졸업에 실패했다. 사실 시험도 시험이지만, 마지막에 제출해야 했던 졸업논문이 통과하지 못했다. 「심대한 이론적 과장과 오류가 빈번히 관찰되어」 논문심사가 거절된 것이다.
이후 명지는 반쯤 넋을 놓았다.
“명지야, 이제 천천히 해. 굳이 여기서 조기졸업 하지 않아도 되잖아.”
보다 못한 하은이 명지에게 다가가 이야기했다. 명지가 멍한 눈으로 하은을 올려다보았다.
“너, 1등 했더라.”
하은은 반 1등을 차지했다.
“전교 1등도 아닌데 뭘.”
뱉어놓고 아차, 싶었다. 평소같이 농담처럼 말한 것이었는데 명지의 눈빛이 변한 것이다.
“너 나만큼 공부했어? 노력했어? 안했잖아. 그런데 왜 니가 1등인거야? 너무 이상한 거 아냐?”
“무슨 소리야?”
멍하던 눈빛에 살짝 검은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명지는 고개를 돌렸다.
“꺼져. 너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명지야?”
“······.”
하은은 자리로 돌아갔다. 어쩐지 자기가 실수로 내뱉은 말 때문에 명지에게 상처를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너무나 단호한 명지의 태도 때문에 당장 사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하나, 싶어서 바라보니 명지는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 이후로 명지와 대화할 여유가 나지 않았다. 곧 방학이 되었고 명지는 더 이상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계절 학기나 재수강을 위해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말이다.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명지는 오지 않았다.
“명지 있잖아, 2반에 걔.”
“왜? 무슨 일 있어?”
“방학 때 소년원에 들어갔대.”
“어? 왜?”
“나도 들은 이야긴데, 불량배들이랑 놀다가 무슨 죄를 지었나봐. 경찰에게 잡혔는데, 죄질이 불량하다고 소년원에 갔다던데?”
식당에서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에 하은은 서둘러 선생님께 달려갔다.
“니가 신경 쓸 일 아냐.”
“제 친구 일이예요.”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넌 교실로 가.”
나중에 알았지만, 선생님은 명지에 대한 일을 학생들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아이들이 알아봐야 심리적 동요만 일으킬 것이고, 결국 학습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 일이란 게 어디 한 두 사람이 침묵한다고 될 일이었던가. 결국 어디선가 샌 소문은 식당을 중심으로 해서 아이들 사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도둑질?”
“빈 집을 털었대?”
“임신이라고?”
영재들의 아이돌이었던 명지가 불량배와 어울리다가 임신까지 하고 소년원에 갔다? 도저히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고, 하은은 선생님께 달려갔다.
“알려주시지 않으시면, 지금 당장 학교를 나가서 명지를 찾아보겠어요.”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아?”
“소년원에 있다니까,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나오겠죠. 다른 지방 소년원으로 갔을 리는 없을 거고 가까운 소년원부터 검색해서 찾아가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이들에게 알리기도 싫지만, 공부 잘하는 학생을 또 잃고 싶지는 않았다. 선생은 협박 같지 않은 협박에 굴하고 말았다.
“선생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명지가 지난 학기 성적에 꽤 많이 실망했었나 보더라. 그래서 탈선한 거야.”
“탈선이라고요?”
선생님의 표현이 다소 순화적인 표현이긴 했지만, 명지의 현 상황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여겼다.
“···폭주족들과 밤에 거리를 돌아다녔대. 그게 몇 번 이어지다가 술도 하고 그랬나봐. 그러다가 폭주족의 한 아이가 차량 절도를 시도했고, 같이 도망가다가 걸렸대. 폭주족은 명지가 교사(敎唆)했다고 증언했고 명지가 인정했어.”
“···말도 안 돼.”
“명지를 본 선생님 말로는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었다고 하더구나. 학교를 다니기 싫었대. 아무리 노력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다른 친구들은 쉽게 공부하는데 자기는 그게 안 된다고.”
하은은 말문이 막혔다. 어쩐지 마지막 말이 자길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자기가 뱉은 말이 그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후 하은은 영재학교를 별 탈 없이 졸업했다. 고등학교도 졸업했고 대학교도 졸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명지에 대한 생각도 조금 변했다.
아마도 명지는 스스로의 굴레에 빠져서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신문에 흔히 나오는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그리고 사춘기 소녀의 예민한 감성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 결과만 두고 보면 사회면의 2단 기사에도 못 오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하은은 명지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친구였다면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더 많은 대화와 소통으로 친구를 안아줬어야 하는데. 마지막의 무신경했던 대화는 별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끝끝내 머리에 남아서 낡은 테이프 재생하듯이 틈틈이 떠올라 하은을 괴롭혔다.
오피스텔에 돌아온 하은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독일 에일 맥주 한 캔을 꺼냈다. 탄산이 많이 들어간 맥주는 배가 불러서 많이 못 마시지만 향이 진한 이 맥주는 한 캔 마시고 잠들기 딱 좋았다.
TV를 켜고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한 입 들이켰다. 뉴스를 보다보니 외교문제로 여야가 시끄럽다는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다시 맥주를 한 입 들이켜고 보니 이제 남 여 개그맨 둘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또 한 입 들이켜고 보니, 맥락을 전혀 알 수 없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일찍 잠들기 위해 마신 술인데,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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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면적이 0이라고요?”
단유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은의 갈색 머리카락이 창을 넘어 들어온 햇살에 눈부시게 출렁거렸다.
“선분이나 곡선은 평면상에서 면적이 0이야. 그런데 선분을 잇게 되면 원이 되지. 그럼 원의 면적은 0. 이건 사실 ‘원’의 정의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하학적 원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원의 면적을 구하라고 하면 이렇게 경계가 지어진 부분과 경계 안쪽의 영역을 모두 원이라고 인식하는 기하적 표현을 전제로 하는 거거든. 그런데 만약 처음의 설명처럼 선분의 연계로 형성된 도형으로서 원을 인식한다면 면적은 0이라고 할 수도 있는 거지.”
“요지는 정확하게 정의를 내려야 한다는 거군요.”
“아니, 다르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야. 우리는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대상을 보고 있지만, 사람은 모두 다른 환경,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언어의 교통(交通)에 문제를 겪는 일이 없다더라도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표현해. 대전제가 다른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 내가 ‘원’을 이야기할 때, 그 원과 니가 생각하는 원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듯이 말이야. 크기든, 형태든 혹은 위치든. 어떤 사람은 평면에 누워있는 원을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수직으로 서 있는 원을 생각할 수도 있지. 비스듬히 누운 원의 형태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겠네요.”
“수학과 같은 학문에서는 그런 일이 거의 드물다지만, 그래도 항상 그런 부분을 고려해야 해. 단순한 사칙연산의 수준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영재원에서 내는 문제들이나 고등 수학에서 내는 문제들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법이 필요해.”
하은은 펜을 돌리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유는 그녀를 흘끔 쳐다보았다. 평소라면 좀 더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저 입이 오늘은 왠지 굳게 닫혀 있었다. 물론 평소와도 같이 수다가 쏟아져 나오는 것보단 지금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걱정이 먼저 드는 게 보통이었다.
“선생님.”
“응?”
창밖으로 실낱같은 오리구름을 구경하던 하은은 조건반사처럼 단유의 부름에 반응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없는데?”
하은은 단유를 보다 다시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런 선생님을 쳐다보던 단유는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별 말씀이 없으시네요.”
하은은 단유를 바라보다 입 꼬리를 올렸다.
“그 말은 내가 평소에 말이 많았다는 이야기네.”
“네.”
“어머, 너 너무 직설적이네. 그리고 아무리 선생님이 말씀이 좀 많았기로서니 제자로서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건 조금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니? 우리 때는 선생님 그림자만 봐도 허릴 숙이고 10m 밖으로 피해 다녔어.”
하은이 박수를 치며 익살스럽게 웃었다.
“선생님, 오늘 뭔가 참는 듯한 모습이셔 서요. 할 말이 있는데도 안하시고 계신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혹시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건가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하은은 입을 꾹 닫고 단유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 대단히 민감하고 예민하다. 그리고 상대의 반응에 덤덤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끊임없이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처음 보육원 밖에서 만났을 때도, 함께 식당에 갔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책을 읽고는 있지만 계속 주변을 신경 쓴다. 티를 안내서 다른 사람은 모를지 모르겠지만, 하은의 눈에는 단유의 모습에서 누군가와 겹치는 환상이 보였다. 너무 예민하고, 여렸던 친구. 오히려 그 때문에 더더욱 문을 닫아걸고 안으로 침잠해야 했던 아이. 그리고 알면서도 다가가지 못했던 자신의 죄. 그리고 마침내 그 아이가 받아들여야만 했던 성적표는 과연 그 아이만의 잘못이었을까.
“단유야.”
“예.”
“문제는 다 풀었니?”
“···사실은 잘 안 풀려요.”
하은은 은은한 미소로 답했다.
“같이 풀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