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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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니가 들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
“왜?”
의문을 표한 것은 하은이었다.
“어른들의 사정이랄까? 애들이 들어서 좋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무슨 어른 타령이니? 꼭 저렇게 말해놓고 들으면 별거 아니더라. 괜히 어른인 척하려고 저래.”
하은이 주영을 손가락질하며 흉을 보는 시늉을 하니, 단유도 웃음이 나왔다.
“정하은!”
짐짓 화낸 척하는 주영의 모습을 본척만척하며 자신의 고기를 듬성듬성 썰어서는 비워져 가는 명수의 접시 위에 턱 하고 올려주었다.
“고맙습니다.”
명수는 짧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너도 너 어릴 적 생각을 해봐라. 너 어릴 때 어른들 더러운 꼴 안 봤니? 다 봤잖아? 그래서 뭐가 변했어? 안 변해. 그냥 좀 더 일찍 세상을 안다는 것뿐이지. 그리고 요즘 아이들, 되게 똑똑해. 모른 척하는 건지, 순진한 척하는 건지 몰라도 알 건 다 아는 애들이라고. 뉴스를 봐라. 애들도 정치를 알더라.”
주영은 하은의 삐딱한 태도에 발끈하며 말했다.
“그거랑은 다른 문제지. 그리고 말이야 바로 하랬다. 어른들의 더러운 모습, 사회의 더러운 모습 가려주고 깨끗하고 좋은 모습만 보는 게 뭐 어때? 그럴수록 더 맑고 깨끗하게 자랄 수 있지 않겠어? 자기 일에 더욱 집중하고 자기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더 보기 좋지 않아?”
주영의 이상론에도 흔들림 없이 하은은 평안한 어조로 태연하게 고기를 썰며 대답했다.
“너 무슨 태교 하니? 맑고 깨끗하게? 무슨 공익광고냐? 오히려 어릴 때 사회를 바로 보고 나쁜 점, 좋은 점 구분하고 고칠 점, 지킬 점 구분해서 사회를 좀 더 좋게 바꿔 나가도록 해야지. 그래야 사회가 발전하지.”
“그게 애들 몫은 아니지. 그건 어른들 몫인 거고, 어른들이 잘해서 발전된 사회를 물려줘야 하는 거지.”
“그런 사회가 뚝딱 만들어지니? 우리 세대가 못하면 다음 세대가 하고, 다음 세대에서 마무리되지 않으면 그다음 세대가 해야 하는 게 이 사회의 발전이란 거야.”
단유는 남은 고기의 반을 뚝 썰어서 명수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입 주변이 스테이크 소스로 범벅이 된 명수가 씨익 웃었다. 단유는 물컵을 밀어 마시라고 권했다.
“정치라는 게 더럽다고 눈 돌리면 이 세상이 어찌 되니? 대리인 뽑아놓고 내 책임은 끝, 하는 게 이 사회의 민주주의야? 단지 내 의사를 대신해서 발언권을 준 게 국회의원들이고 난 그들이 잘 활동하는지, 내 뜻과 다른 말은 하지 않는지 지속적으로 지켜봐야 하는 게 우리 일반 사람들의 몫이다, 이거야. 하물며 어린아이들이라도 어른들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고 생각할 권리가 있는 법이야. 이 세상이 어른들의 세상인 것만은 아니고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인데, 당연히 알아야지. 대신 어른들은 어떤 행동이 바른 행동인지, 바른 가치관인지를 지도하고 따르도록 해주면 되는 거야. 눈과 귀를 가리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그러자 주영이 다소 격앙된 어조로 받아쳤다.
“하지만 교육이라는 게 항상 바른 것만 보여줄 수 없고, 게다가 가치관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사회의 어두운 면, 더러운 면이 보일 때 그 아이들에게 어떤 가치관이 만들어질지 어떻게 알아? 만약 비뚤어진 가치관이 형성되면 그걸 수정하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은 사회적 자산이 소요될지 생각해봤어? 지금도 이 사회에 수많은 청소년 범죄자들이 소년원을 들락날락하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래?”
“······.”
하은이 입을 다물었다. 주영은 아차, 하며 슬며시 시선을 내렸다. 속으로는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침묵을 지키고 얼렁뚱땅 넘겨야 하나를 고민하며 사태 수습책을 강구했다. 괜히 뒷말 나올 이야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응?”
“그래서 단유가 영재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뭔데?”
하은이 침착한 목소리로 화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주영은 화제가 바뀌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이번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음에 난색을 보였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초등학교에서 영재교육원에 가려면, 학교장의 추천이 필요해.”
“우리 때도 그랬나?”
“비슷했어. 그런데 문제는 학교장의 추천장에 제한이 있다는 거지. 한 학교당 몇 명 이런 식으로.”
“그게 말이 돼? 학교에 몇 명의 애들이 있는 줄 알고, 추천 수를 제한해?”
“그렇더라고. 아무튼 제한되어 있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
‘경쟁’이라 표현함은 학교장의 자의적 추천이 아니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학부모들이 끼는 거구나. 그래서··· 어른들의 사정이란 거고.”
“그렇지.”
우리 아이가 영재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은 부지기수다. 그런데 진짜 영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따라서 영재만 가려서 영재교육원에 보내는 시스템이라면 추천수의 제한이 그리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영재교육원이 마치 무슨 과학고, 무슨 대학교와 같이 간판이라는 것이다. 어느 영재교육원을 나왔다, 라고 이력서 란에 한 줄 넣기 위해 학부모들은 교장으로부터 추천장을 받으려고 줄을 선다. 자기 아이가 영재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런 아이들을 위한 사교육이 존재하니까.
즉, 사교육을 통해 배양된 아이를 영재교육원에 넣기 위해 학부모들 간의 추천장 쟁탈전이 벌어지는 시국이란 이야기.
이 와중에 부모도 없는 보육원의 영재쯤은 뒷자리로 밀리는 게 당연할 정도였다.
“선배 말로는 중학교 정도만 돼도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가는 게 더 나을 거라고 말하니까, 그때 들어가자는 거지. 지금은 자칫하면 분란밖에 안 만들어지니.”
영재교육원에 억지로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면 남은 초등학교 생활에 어려움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재훈이었다.
“그리고 요즘은 선행학습 없이는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입학시험으로 나온다고 하더라. 그래서 진짜 영재라도 풀기가 쉽지 않다네. 그래서 요즘 영재교육원은 유명한 수학 전문 프랜차이즈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주로 들어간대.”
하은은 물을 입안 가득 들이붓고는 열을 식히려 애썼다. 딱히 열 받는 내용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 사회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곳이니까.
“우와, 배부르다.”
잠시 테이블에 침묵이 내려앉은 틈에 명수가 포크와 칼을 내려놓았다. 명수 외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 고기를 나눠 준 덕분에 거의 2인분을 혼자 먹은 명수였다.
“다 먹었어?”
단유가 묻자, 명수가 씩 웃었다.
“응. 진짜 배불러. 아무것도 못 먹겠어.”
“윤정이 누나한테 말하면 아이스크림도 갖다 주던데.”
“누나!”
명수가 손을 번쩍 들고 마침 주방 안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윤정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레스토랑 안의 손님들이 모두 명수를 바라보았다.
윤정이 붉어진 얼굴로 주방을 나왔다. 앞치마로 손을 닦으며 다가와 명수를 다그쳤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창피하게.”
명수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아이스크림도 줘요?”
잠시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윤정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명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단유, 너는?”
“저도 주세요.”
“다른 분들도 드릴까요?”
하은이 대신 대답했다.
“부탁드릴게요.”
윤정은 명수를 흘겨보며 볼을 살짝 꼬집고는 자리를 떠났다.
****
단유와 명수를 보육원에 데려다준 후, 하은은 자기 차를 끌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잠시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춘 사이에 쇼팽의 시디를 꺼낸 후, 다른 시디를 집어넣었다. 이윽고 EDM계열의 음악이 흘러나오며 차량 스피커가 둥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분이 쉬이 풀리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긴 여름 낮이 지나고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저 멀리 산의 음영이 음울한 자태로 누워있었다.
“엉덩이 하나, 가슴 둘, 다리는 셋. 바람인가?”
엉뚱한 소리나 중얼거리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연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단어가 하은을 괴롭혔다.
신호가 바뀌고, 하은은 차를 출발시켰다. rpm이 잠깐 치솟다가 서서히 내려왔다.
‘정속주행 해야지, 빠르면 사고 나지.’
기분이 우울하다고 액셀을 꾹 지르밟았다간 사고 나기 딱 좋은 각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해야 했어.’
하은은 피하려 했지만 자연히 떠오르고 마는 옛일을 회상했다.
****
중학생이던 하은은 일반 중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전국 상위 0.1%에 든다고 소문이 난 하은은 영재학교로 등교했다. 영재 학교 내에서도 하은은 소문난 천재였다. 다만 하은은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그것처럼 자각하지는 못했다.
영재학교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쉴 틈 없는 수업과 실험, 과제와 리포트로 아이들을 휘둘렀고, 아이들은 녹초가 되기 직전까지 매달렸다. 아무리 실험과 수업에 흥미를 느끼고, 뛰어난 천재성을 발휘한다 해도 그 무리들 내에서는 그저 평범한 정도.
똑같이 바쁘고, 똑같이 힘들고, 똑같이 어려웠다. 몇몇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다시 학원으로 가야 했고, 몇몇 아이들은 혼자 숙제를 하기 위해 밤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 남아서 공부를 해야 했다.
“하은아.”
“응?”
책을 보던 하은을 부른 것은 명지라는 친구였다. 명지도 수학 쪽에 재능을 보여 영재학교에 입학한 아이였다. 다만 성격이 다소 소극적인 성향이 있어 교우 관계가 그리 좋지 못했는데, 유달리 하은에게는 친밀감을 표시했다.
하은도 또래와 비교해 평범함 이상의 외모여서 사춘기 남학생들의 가슴을 두근대게 했지만, 명지는 가히 학교 최고의 퀸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명지의 성격상 다른 남자아이들과는 거의 말을 섞지 않았고, 그래서 거의 TV 속 아이돌처럼 남자아이들의 대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로 다뤄졌다.
“배고프지 않아?”
“뭐 먹으러 갈까?”
조금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서두르면 학교 매점이 문 닫기 전에 라면 하나 정도는 사 먹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라면 어때?”
“좋아.”
배시시 웃는 명지의 팔짱을 낀 하은은 가벼운 걸음으로 매점을 갔다.
“컵라면 2개만 주세요.”
“김밥이라도 남았으면 줄 텐데 김밥이 다 떨어졌네.”
매점 아주머니의 립서비스에 하은은 말만이라도 고맙다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으, 뜨겁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는 호들갑을 떠는 명지에게 하은이 한마디 했다.
“손 떼.”
굳이 컵라면에 손을 붙이고 온도를 재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 손을 붙이고 있으면, 물이 빨리 식지 않잖아? 그러면 라면이 더 맛있게 만들어질걸?”
컵라면의 스티로폼 재질 용기의 열 손실 정도가 손의 온기로 보호될 정도인가는 차치하더라도, 굳이 화상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 컵라면의 맛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고쳐주고 싶었다.
“의미 없다.”
하은은 명지의 팔목을 찰싹 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명지가 또 예의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뗐다.
“하은아.”
“응?”
시계를 보면서 시간이 얼마나 흐르나 지켜보던 하은이 명지의 부름에 시선을 맞췄다.
“너 공부 재밌어?”
“그냥. 할 만해. 왜?”
“······.”
사실 영재학교에는 수업을 따라가는 데 힘이 부쳐 낙오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이 멍청해서도 아니었고, 공부를 안 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견디기에는 너무 빡빡한 수업 일정 때문에 그랬다.
“난 빨리 조기 졸업하고 싶어.”
포기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니 다행이랄까, 아니면 역시 영재학교에 다니는 아이답다고 해야 할까?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은이 젓가락으로 컵라면 위를 톡톡 두들겼다. 적당한 반탄력으로 나무젓가락이 튕기는 느낌이 좋았다.
“고등학교도 조기 졸업하고 대학교 가면 되지.”
“대학교도 비슷하면?”
“대학교도 조기 졸업하지, 뭐.”
시계를 흘끔 쳐다보니, 아직 1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하은아, 넌 뭐가 되고 싶어?”
“···글쎄다. 아직 정한 게 없는데.”
“난 시인이 되고 싶어.”
뜬금없이?
“왜?”
“시가 좋으니까.”
“그럼 여긴?”
“여기는 엄마가 가라고 해서. 엄마는 내가 여길 졸업만 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했어. 물론 그 말을 순진하게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명분은 나한테 있으니까, 졸업하면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명지가 뚜껑을 벗기고 젓가락으로 라면을 휘휘 저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명지의 안경을 뿌옇게 만들었다.
얼굴이 이쁜 명지는 안경을 낀다. 그래서 대부분 남학생은 명지의 민얼굴을 보지 못했다. 안경만으로도 대단한데, 벗으면 어느 정도일까, 라고 추측하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문득 하은은 웃음이 났다.
“왜 웃어?”
“아니, 누구는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 누구는 남자애들 반응이나 생각하고 있으니 꼴이 우스워서.”
“너 남자 생각했어? 남자친구 있어?”
“있겠냐?”
“그야 모르지. 너 정도라면 뭐, 있을 수도 있지. 성격 좋고, 얼굴 예쁘고···.”
“야, 야. 그만해. 우리끼리 이러는 거 아니다.”
“그치? 훗. 라면 불겠다. 먹자.”
둘은 참으로 맛있게 라면을 먹었다. 따뜻한 국물까지 남김없이 들이마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