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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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綠陰)이 짙어가는 뒷산 위로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한창일 때, 하은은 쇼팽의 녹턴(Nocturne) 제2번 Eb장조 Op.9번 곡이 재생 중인 자동차를 끌고 보육원으로 들어섰다.
‘역시 출근길에는 클래식이야.’
대학 졸업 후, 딱히 할 게 없어서 빈둥대던 그녀는 절친인 주영의 부탁으로 과외를 맡을 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사실 주영이 부탁하지 않았다면, 하은은 적당한 회사에 취직해서 적당히 능력을 보이면서 적당히 세월을 보내다가 적당한 상대를 만나 적당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그럭저럭 아이 낳고 생활하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인생관에 비해 하은은 꽤 특별한 유년시절을 보내긴 했다. 다만 하은이 그 시절의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너 혹시 영재원이라고 아니?”
단유는 수학문제를 풀다 말고 하은의 물음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아니요.”
“너 정도면 영재원에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은데.”
하은은 옆머리를 긁으며 단유의 문제 풀이를 바라보았다. 한국의 영재교육은 현재 수학과 과학 분야에 다소 쏠림 현상을 보이고는 있다. 거의 5분의 4는 이쪽 분야 영재로 선발되어 교육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단유 정도라면 충분히 입학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굳이 나한테 과외를 받는 것보다는 영재원 같은 곳에 가서 공부하는 게 너한테 더 좋을 거 같아서 말이야. 아, 그런데 보육원 애들도 영재원 들어갈 수 있나?”
하은은 곰곰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예전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면, 그 중에서 보육원에 다니던 친구는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혹 있었더라도 어린 나이의 하은에게 친구들이 보육원에 사는지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다 문득 단유가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느끼고는 손짓을 했다.
“신경 쓰지 마. 그것보다는 이 문제는 그렇게 접근하면 안 돼.”
하은은 단유가 풀던 식의 중간부분을 지적하며 말했다.
“임의의 양의 정수를 m과 n으로 정했기 때문에 여기서 이런 식을 쓰게 되면 정수가 아니게 되잖아.”
모든 답을 알려주진 않지만, 문제가 되는 부분을 간략하게 짚어주고 바르게 인도할 수 있게 돕는 방법이 하은의 교습방식이었다. 때문에 단유는 자기 힘으로 문제를 풀었고 시의적절한 순간에 도움을 얻을 수 있어서 혼자 할 때보다 훨씬 빠르고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오늘 주영이가 온다고 했었나?”
“그래, 지금 왔다.”
하은의 중얼거림에 답한 것은 캐주얼 정장 차림의 주영이었다. 검은 색 소가죽 토트백을 든 주영이 또각거리며 다가와 단유의 인사를 받았다. 단유에게 과외를 맡긴 후 처음으로 셋이 함께 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요즘 일이 많아서 통 시간 내기가 힘들었어.”
“뭐, 그거야 니 사정인거고.”
주영이 눈을 흘기며 하은을 바라보았다.
“어휴, 저 정 없는 거 봐.”
“야, 나 정도면 정이 철철 넘쳐서 국을 끓여도 되겠네. 솔직히 정 없기로는 니네 선배가 더 하다.”
“야,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괜히 얼굴을 붉히며 단유의 눈치를 보는 주영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단유야, 선생님 어때?”
“당연히 좋지, 뭘 물어?”
“내가 너한테 물었니? 단유한테 물었지.”
“좋아요. 잘 가르쳐 주시고요.”
단유는 담담하게 자신의 소감을 이야기했다.
“쟤가 약간 푼수끼는 있는데, 그래도 머리 하나는 좋은 애니까 잘 배우도록 해.”
“선생님한테 푼수가 뭐니? 푼수가. 너야말로 학교에서···.”
괜히 또 트집 잡으면서 말문을 틔려는 모양새에 주영은 황급히 막아섰다.
“됐고. 끝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갈래? 단유 너도.”
“저도요?”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여주고 싶어서 그래.”
“···죄송한데, 명수도 같이 가면 안 되나요?”
먹는 이야기가 나오자 단유는 명수가 생각났다. 명수를 두고 혼자 맛있는 걸 먹을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나중에 명수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의 후환이 두려웠던 것도 한 몫을 했다.
“뭐, 굳이 안 될 것도 없지.”
“명수라면, 너랑 같은 방 쓰는 애?”
“네.”
“근데, 첫날에는 같이 공부하는 것 같더니 일주일동안 한 번도 얼굴을 못 봤네. 일부러 자리를 피하는 거니?”
그 말에 단유는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고요. 명수도 나름 바빠서 그래요. 걔는 저랑 달리 확실한 꿈이 있는 친구라서요.”
“어떤 꿈?”
“축구 선수요.”
축구 선수가 꿈인 명수는 1학년 둘을 데리고 운동장 스탠드 근처에서 특훈을 하고 있었다. 너무 더운 오후에는 6시 이후에나 잠깐 운동장을 쓸 수 있도록 했다. 그 외 시간에는 일사병 등의 건강 문제로 운동장에서 뛰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수는 두 꼬마―도재민, 변유철―를 데리고 그늘이 있는 스탠드로 데리고 가서 간단히 공 다루는 법을 과외시키고 있었다.
“오른발로 여길 찼다가, 빠르게 여기로 차고, 다시 다리를 넘기면서 달리면 돼. 쉽지?”
재민이 작은 발로 이리 저리 움직여보지만, 잘 되지 않았다.
“형, 안 돼.”
“안 되면 될 때까지 해.”
명수는 꽤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노력은 배신자가 아니야.”
비슷한 말인 거 같은데, 아무렴 뜻만 통하면 되지. 명수는 가슴을 펴고 다시 트래핑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명수야!”
저 멀리서 단유가 부르는 소리에 명수가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파안대소를 터뜨리는 명수의 웃음소리가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운동장을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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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먹을래?”
운전대는 주영이 잡았다. 조수석에 앉은 하은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삼계탕이 제격이지? 니들 삼계탕 좋아하니? 닭고기가 애들 성장에도 좋다고 하잖아? 쫄깃쫄깃 야들야들한 닭고기 한 점 뜯어서 소금에 살짝 찍어먹으면···. 게다가 닭육수로 우린 국물에 찹쌀밥이랑 같이 먹으면···.”
“너한테 안 물었다.”
주영이 룸미러로 뒤를 흘깃 보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하은이 주영을 힐긋 째려보았다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말해봐.”
명수가 손을 들었다.
“저요, 선생님.”
명수는 나가서 먹는다는 소리에 곧장 방으로 뛰어가 씻고 옷 갈아입고 내려왔다. 불과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방에서 뛰쳐나온 명수를 보며 과연 씻었을까, 궁금했지만 단유를 비롯해 누구도 딴지를 걸진 않았다.
“스네이크요.”
“스테이크겠지.”
단유가 정정해주었다. 스네이크를 보신용으로 먹는다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설마 명수가 그걸 알면서 말했을 리 없겠지. 하은이 웃으면서 명수를 꼬드겼다.
“명수는 고기 먹고 싶구나. 그런데 닭고기도 고긴데, 닭고기 싫어하니?”
“닭고기도 좋아요.”
“그치? 닭고기도 좋지?”
“그런데 스케이크도 좋아해요.”
“스테이크.”
단유가 다시 정정해주었다. 명수는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웃었다. 단유는 딱히 가리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했고, 콜을 외친 주영은 하은의 어깨를 툭 치는 것으로 메뉴를 정했다. 그리고 인평시내의 유명한 스테이크 레스토랑으로 차를 몰았다.
“어머, 단유야! 명수도 왔네?”
마침 주영이 간 곳은 윤정이 일하는 레스토랑이었다. 주방에서 보조일을 하던 윤정이 단유와 명수를 알아보고 홀로 나와서 반겼다.
“누나, 안녕하세요.”
단유와 명수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리고 단유가 나서 주영에게 윤정을 소개했다.
“반가워요. 단유를 후원해주고 있는 이주영이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권윤정이라고 합니다.”
윤정이 맑은 웃음으로 홀 서버를 대신해서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 때 레스토랑 지배인이 와서 이주영에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두 번째인데도 기억해주시네요.”
하은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직장빨이야.”
주영이 팔꿈치로 하은을 툭 치고는 웃으면서 지배인의 응대에 화답했다.
잠시 후, 푸짐한 샐러드와 스테이크 정찬이 나왔다. 명수가 칼질이 서툴렀던 탓에 주영이 명수의 고기를 썰어 주었다. 고기 한 점을 먹고 어깨춤을 추는 명수를 보며 주영이 피식 웃었다.
“맛있어?”
“네, 맛있어요.”
하은은 얌전하게 스테이크를 먹는 단유를 보며 물었다.
“넌 여러 번 왔었나봐?”
“아니요. 이번이 두 번째예요.”
“되게 익숙해 보이네.”
“석고는 못하는 게 없어요.”
명수가 끼어 들어서 자기 자랑인 양 으스댔다. 하은은 고기를 썰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석고란 별명, 참 누가 지었는지 절묘하네.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그냥 이름인 줄 알겠어. 그러고 보면 친구들 중에 너무 별명으로만 불러서 진짜 이름을 모르는 친구도 있어. 그치? 주영아?”
“난 없는데? 친구 이름을 왜 몰라?”
“난 있어. 어릴 때 친군데, 걔 별명이 파이였거든? 맨날 파이라고만 불렀더니, 진짜 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 걔는 뭐하고 살려나? 걔가 얼굴이 꽤 이쁘기도 했었거든? 그래서 같은 반 남자애들 중에 걔를 좋아하는 애도 많았는데, 걔네들도 다들 파이라고 불렀다? 웃기지 않니?”
“별명이 왜 파인데요?”
하은은 먹기 적당하게 썬 고기를 포크로 집어 입안에 쏙 넣었다. 입이 작아서 그런지 고기를 입에 넣고 볼을 우물거리며 먹는 모양새가 마치 다람쥐 같았다.
“수업시간에 자기가 파이(π)를 외워보겠다면서 줄줄이 읊어 대는 거야. 한 5분쯤? 걔 혼자서 소수점 뒷자리를 줄줄 읊었는데 거의 백 자리 이상 외웠던 거 같아. 그 뒤로 우리가 파이라고 불렀지. 사실 파이를 굳이 외울 필요 없잖아? 누가 그런 걸 외워? 필요하면 그 때 그 때 계산해서 구하면 되는데. 그리고 대부분 10자리 정도까지는 외우잖아? 그 이상은 별로 쓸 일도 없고 말이야.”
“대부분은 10자리도 안 외운다.”
주영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하은은 포크를 치켜들고 좌우로 흔들었다.
“우리 때는 외워야 했어. 가끔 성격 이상한 선생님들이 파이의 소수점 아래 8자리까지를 계산에서 써먹도록 문제를 냈거든. 그러니까 그냥 구구단 외우듯이 외운 거지. 편의상 말이야.”
단유는 얌전히 듣다가 호기심이 생겨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누나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나 봐요.”
가끔 이런 저런 이야기를 곁들일 때, 들어보면 하은의 어린 시절에는 유난히 똑똑한 친구들이 주변에 많이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얘, 영재교육원 출신이거든.”
주영이 대신 대답했다.
“영재교육원이요?”
“응. 초등학교 때는 대학교 부설 영재교육원, 중학교 때는 영재학교로 진학, 고등학교도 조기 졸업, 그리고 서울대학교.”
“한 마디로 엘리트 코스지.”
“니 입으로 그런 이야기하면 오글거리지 않니?”
“아니, 전혀. 왜? 없는 사실도 아닌데. 내가 밟은 코스가 엘리트 코스인 건 맞지. 다만 내가 엘리트가 아니라서 그렇지.”
“또, 또.”
주영은 애들 듣는 데서 이상한 이야기한다고 하은을 나무랐다. 하은 역시 별로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쯤에서 멈췄다. 하지만 단유는 ‘영재원’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해서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었다.
“아까 선생님이 저한테 영재원 안가냐고 하셨잖아요?”
“너 그런 이야기 했었어?”
“아, 그냥 쭉 보니까, 단유 정도라면 영재원에 무난히 들어갈 만한 실력인데 왜 안가나 싶어서 말이야.”
“애들 있는데서 이런 이야기하는 건 그렇지만, 단유는 다른 아이들처럼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게 좋다고 선배가 이야기했어. 그 뒤에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하은이 포크를 내려놓고 말했다.
“니네 선배가 그러자고 하면 그래야 돼? 아니 것보다, 단유가 실력이 되고 또 그 실력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려면, 이런 허접한 선생님께 과외 받는 것 보다는 시스템이 갖춰진 영재원이 더 낫지 않니?”
주영은 대답 대신 샐러드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나도 물론, 영재원에 갔던 걸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별로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긴 해. 그래도 그건 내 경우인거고, 단유라면 또 잘 적응해서 다닐지 누가 알아?”
주영은 물을 마시고 입을 헹군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엔 너랑 같은 생각이었고, 그래서 조용히 알아보긴 했어. 그런데 초등학생 영재교육원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까, 그냥 나중에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
주영은 단유를 보았다. 단유는 이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굉장히 궁금하다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