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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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의 과외를 맡은 첫 날, 하은은 플리츠 스타일의 몬드리안을 떠올리게 만드는 원피스에 하얀 레이온 소재의 재킷을 걸치고 나타났다. 화장을 연하게 했지만, 워낙 도드라지게 붉은 입술과 진한 눈썹 덕에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또각거리는 걸음으로 보육원 본관에 들어선 하은은 보육교사를 만나 인사를 나눈 후, 곧장 단유의 방으로 갔다.
방에는 단유와 명수가 각자의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만약 명수가 어떤 아인지를 알았다면, 하은은 이 상황을 굉장히 수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은은 그저 단유와 함께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라는 정도의 인식이었기에 딱히 명수를 제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 구나, 라는 생각을 했을 따름이었다.
“안녕하세요.”
단유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 안녕.”
어제도 경험했던 부분인데, 역시 아직은 낯이 설어서 그런지 단유의 인사를 자연스럽게 받기 어려웠다. 자신이 다른 나이 든 어른들에게 인사할 때는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어른들도 마치 식사 후 물 한 컵 받아들 듯 자연스럽게 받아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에게 인사 받는 것도, 인사하는 것도 어색했다.
‘차차 익숙해지겠지.’
하은은 들고 온 가죽 가방을 어디 둘까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단유가 침대 위를 손가락질 했다.
“저기 위에 잠시 두셔도 될 거예요. 전 의자 하나 빌려올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단유는 방을 나섰다. 단유가 나간 뒤, 하은은 잠시 단유의 침대 위에 걸터앉아 가방을 올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다―어제도 구경했고, 오늘도 오자마자 구경했지만, 여전히 시선 둘 데가 없어서 계속 구경만 하고 있는 중―명수와 눈이 마주쳤다. 방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책을 보고 있던 명수는 대놓고 하은을 바라보았다.
“왜? 뭐 할 말 있니?”
명수가 가방을 슬쩍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혹시 먹을 거 안 가지고 오셨어요?”
먹을 거?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 건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그 전에 오던 누나는 꼭 빵이나 과자 사가지고 왔었단 말이에요. 단유랑 저랑 나눠먹으라고요. 누나, 설마 단유만 주려고 숨긴 건 아니죠?”
“···없는데?”
“진짜요?”
“응.”
명수는 부스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던 책을 접어 단유의 책상에 올려놓은 뒤, 의자를 책상 아래로 밀어 넣었다.
“어디 가?”
마침 의자를 들고 온 단유가 명수를 보며 물었다. 명수가 단유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영문을 몰라 하는 단유에게 명수가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저 누나 빈털터리야.”
그리고 하은에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 있었어요?”
단유의 물음에 괜히 얼굴이 붉어진 하은이었다. 고작 빵 때문에 이런 취급이라니.
“변유철, 도재민! 공 차러가자!”
복도 너머에서 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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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궁금한 게 뭐야?”
하은은 단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벽에 붙은 선풍기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페이지가 넘어가서 하은은 검지로 페이지를 눌러야 했다. 지금 펼친 책은 중등 수학. 하지만 몇 페이지 넘기다보니 물려받은 것이라 그런지 문제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색색 깔로 범벅이 된 페이지가 많았다.
“이를테면 과목 중에서 꼭 공부하고 싶다, 싶은 거.”
“굳이 꼽자면···.”
어느 하나를 딱히 꼽기 힘들었다. 이전 같으면 물리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잠시 접어두고 싶은 과목이 물리였으니까. 오히려 다른 과목을 통해서 전반적인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의문이 들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되요?”
“뭔데?”
“제가 물리를 좋아해요. 그런데 재훈이 형이란 분이 저한테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른 과목도 공부해야 한다고 했어요.”
“뭐··· 그래, 그래서?”
“다른 과목이 물리라는 과목과 어떤 관련이 있기에 균형이 안 맞는다는 건지 궁금해서요. 예를 들어서 사회 과목이랑 물리라는 과목은 전혀 다르잖아요. 그런데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사회 과목을 배운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그건 물리와 사회를 같은 평형계에 놓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에 맞게 다양한 지식과 상식을 갖춰야 한다는 점에서 균형을 맞추라고 이야기한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니가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문제를 푼다고 해도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의 국어 실력이 있다면 문제가 있겠지? 마찬가지로 대학교 수준의 물리를 배운다고 해도, 사회나 기타 다른 과목에 대해 전혀 상식이 없다면 학문적인 분야에서도 문제가 생기겠지만, 전반적인 삶의 질이란 부분에서 문제가 될 거 같네.”
마치 준비되었다는 듯이 곧바로 납득할만한 답이 하은에게서 나왔다. 단유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하은이 말을 계속 이었다.
“가끔 그런 친구들이 있어. 수학을 잘해. 정말 잘해. 그래서 상상도 못할 만큼 잘해서, 과학고 갔다가 서울대 수학과 가는 친구도 있긴 했어. 그런데 얘가, 수학을 그렇게 잘하는 얘가 은행에서 자기 통장 하나를 제대로 만들 줄 몰라. 이게 말이 되니?”
“삶의 질이란 게 그런 걸 말하는 거였군요.”
생각해보면 다른 무엇보다 단유에게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또 아무리 국어를 잘한다 쳐도, 영어를 지지리 못해. 음, 뭐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잘하면 좋잖아? 적어도 기초 회화 정도는 할 줄 알아야지. 요즘 세상이 그런 시대니까.”
“······.”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패스. 단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또 물리나 수학이나 생물이나 아무튼 한 과목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서 박사 수준이라고 해도, 도덕이나 기타 다른 부분에 문제가 있다면? 인성 쓰레기? 혹은 예의 없는 천재? 무례한 판사? 소시오패스? 이런 소리 들을 수도 있지.”
“예. 알겠어요.”
“그리고···.”
“잠시 만요.”
“응?”
“이해했어요. 균형이란 거···. 저기 다른 거 질문해도 될까요?”
단유를 빤히 바라보더니, 손톱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 말했다.
“해봐.”
“매일 같은 과목을 공부하나요, 아니면 다른 과목을 공부하나요?”
“흠. 그러고 보니 우리가 오리엔테이션을 안했구나. 사실 말이야, 내가 주영이한테 듣기로는 이 과외의 진행을 너랑 상담한 뒤에 알아서 결정하라고 들었거든. 그런데 우리가 이야기를 많이 해보지 않았단 말이지. 말 나온 김에 내 생각을 먼저 밝히자면, 난 니가 원하는 과목들을 모두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래도 선생님의 역량이나 과외라는 특수한 수업 형태를 고려해서, 니가 필요로 하는 것만 골라서 공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애.”
“네···.”
“특히 나 같은 경우에는 어릴 때 수학을 잘했어. 너처럼 수학을 좋아했지. 물리는 솔직히 내 관심사항은 아니었는데,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좋아지게 된 케이스랄까? 괜히 관심이 많이 가더라고. 수학을 응용하는 부분도 많았고 말이야.”
“네···.”
“물론 생물이나 화학도 싫어하진 않았지. 내가 자랑하는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럽긴 한데, 내가 생물을 또 좋아했어. 신기했거든. 세포라든가, 성장이라든가, DNA라든가 뭐 이런 거. 또 「빅뱅인가 창조인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걸 읽고 종교주의자들의 신념이란 게 대단하구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벽을 깰 수 있는 이론을 찾아낸다면 꽤 재미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잠깐 했었어. 그래서 친구랑 동아리도 만들었고. 연구 동아리. 이름이 ‘쿵짝동아리’였어. 왜 쿵짝인줄 알아? 신이 쿵, 했더니 우주가 짝, 하고 생겼다고 해서 쿵짝이라고 했지. 괜찮지? 어릴 때는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까 조금 부끄럽기도 해.”
“저기요.”
“또 한 때는 종교에 심취했던 적도 있었지. 물론 사이비 종교 같은 건 아니고, 종교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말이야. 세계의 여러 종교를 비교해보고 거기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말이야.”
“선생님.”
“응?”
단유는 간신히 하은을 말리고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지고 정신이 없어지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꽤 길다면 긴 학교생활을 해오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형의 선생님이었다. 무엇보다 질문에 대한 답이 주구장창 나오는 선생님은 눈앞의 하은 선생님뿐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질문 한마디에 땀을 흘리며 단답식으로 대답하기 일쑤였으니까.
“전 딱히 과목을 가리고 싶지 않고요. 그냥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게 어떨까요?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아무거나가 어디 있어? 그런 무책임한 발언은 실례야.”
무책임이라니요? 단유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무엇을 책임져야 했었던 건지 고민해야 했다.
“그런데, 또 나쁘지는 않겠네. 나도 그게 나쁘지는 않을 거 같아.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사실 난 개인적으로 모든 학문은 하나로 통한다고 생각했거든. 아무리 전혀 다른 학문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소위 만류귀종의 법칙이랄까?”
단유는 하은의 수다가 생각보다 치명적이고 파괴력이 상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잠시 고갤 들어보니, 벌써 6시에 가까워지는 시계였다. 무슨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정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가다니.
“선생님.”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던 하은이 말을 멈추고 단유를 바라보았다.
“차원이 뭔가요?”
“차원? 이차원, 삼차원 할 때 차원?”
“네.”
하은이 빙긋 웃었다. 역시 이 나이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다 그런 종류인가, 싶어서 웃음이 났다. 생각해보면, 자기도 어릴 때는 세계 7대 불가사의니, 미싱링크니,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이야기들을 좋아했었다. 비록 초등학교 4학년인 주제에 중등 수학책을 펴고 공부하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주제는 비슷한 것인가보다.
“이차원이 뭔지는 알아?”
“직선이 1차원, 평면이 2차원이라고 들었어요.”
“직선 위의 좌표를 x라고 나타낼 때, 평면상의 좌표는 직교하는 두 개의 직선을 축으로 해서 x, y의 1쌍의 좌표로 표현하지. 그리고 거기에 또 다른 축이 세워지면, x, y, z를 1쌍으로 하는 좌표가 형성되고. 즉, 하나의 공간 속에서 독립적인 좌표축의 수가 해당 공간의 차원이라고 설명하지.”
“예.”
“그리고 물리학적으로 측정되는 물리량의 관계를 나타내는 지수로서 차원이 이용돼. 일종의 단위계로서 차원을 설명할 수 있겠지.”
“어렵네요. 거기까지는 공부를 못해서 이해가 잘 안되네요.”
“그럼. 초등학교 수준에서 차원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사람이 3차원의 세계에 있는데 4차원의 세계로 갔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흥미로울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 현상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물리학적 지식이 기반이 되어야 한단다. 그런데 아직 너한테 어렵지 않을까 싶네. 그래도 니가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억해둘게. 앞으로 과외를 하는 동안 참고는 해야 될 테니까. 그래도 공부를 하는 동안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하면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가르쳐는 줄게. 너의 성적이나 공부에 도움이 될 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야.”
하나를 물으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해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단유는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나 버뮤다 삼각지대나 그런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지금 경험하는 일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일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하은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보육교사가 방문 앞에 와 있었다. 보육원에 과외교사가 와서 아이를 가르치는 일이 한 번도 없었기에 조금 걱정이 되는 마음도 있어 한 번 와봤는데 다행히도 수업분위기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긴 하지만, 선생님은 열정적이었고 단유는 순종적으로 귀를 기울여 듣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보자. 내일은 선생님이 너랑 함께 볼만한 책을 들고 와서 함께 공부하도록 하자. 알았지?”
“네.”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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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끌고 보육원 밖으로 나가는 하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분이 좋았다. 하이힐을 신은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오랜만에 실컷 입을 털(?) 기회를 얻어서 그런지 상쾌한 기분이었다.
“과외가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진작 해 볼걸 그랬네.”
신이 난 하은이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며 리듬을 만들어내고, 그 위에 콧소리를 올려 노래를 만들었다.
하은이 룰루랄라 거리는 사이, 단유는 식당으로 갔다. 가는 동안 운동장에서 젊음을 불태운 명수가 달라붙었다.
“뭐 먹었지?”
“아니. 아무것도.”
“진짜?”
“응.”
명수는 발로 땅을 한 번 툭 찼다.
“진짜 빈털터리인가?”
반쯤(?)은 진실일지도 모를, ‘빈털터리녀(女)’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오피스텔로 이동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