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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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볕이 내려쬐던 어느 더운 여름의 오후. 바쁜 사람들의 흠뻑 젖은 등이 그늘 아래서 말라가던 시간. 검은색 국산 소형차가 2차선 국도에서 보육원으로 들어오는 샛길로 들어오고 있었다. 입구에 선 푸른 주목나무 두 그루를 지나 보육원으로 들어선 자동차는 아이들이 뛰어 노는 운동장을 지나 보육원 본관 옆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낮은 하이힐에 하얀색 마 재질의 재킷과 작은 손가방을 한 손에 들고 내려선 이는 허리를 톡톡 두드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되게 덥네.”
암갈색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걸음을 옮길 때, 여자 앞으로 한 여자 아이가 달려왔다. 단발의 어린 여자 아이는 총총거리며 달려오다, 여자를 발견하곤 잠시 멈칫하는 듯 하더니 이내 여자의 뒤로 돌아갔다.
“공지선! 너 거기 서! 당장 가져 와!”
여름햇살에 그을린 얼굴을 한 사내아이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뛰어왔다. 그러자 여자의 뒤에 선 여자아이, 지선이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꺼야.”
사내아이는 발을 쿵 굴리며 외쳤다.
“니 꺼 아냐. 내 꺼 할 차례였어!”
“아냐, 오빠가 나 줬어.”
“니가 뺏은 거잖아!”
뭔가 물물거래가 있었던 듯한데,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진 여자가 고개를 살짝 내려 지선을 보았다. 작고 여린 손가락 사이에 잡혀 있는 것은 하얀 나비였다. 얇고 찢어지기 쉬운 나비의 날개는 거친 뜀박질에도 용케 버텼나보다.
“내놔. 니 꺼 있잖아!”
과연 지선의 다른 손에도 점박이 나비가 한 마리 더 잡혀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사내아이, 명수는 젊잖게 설득할 마음은 없었는지 계속 윽박질렀지만 지선은 평상심은 유지했다.
“명수야, 그거 그냥 줘. 내가 한 마리 더 잡아줄게.”
또 다른 목소리의 출현에 여자가 고개를 들어보니, 아이치고는 이목구비가 꽤 뚜렷해서 잘 생겼네,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올 법한 외모의 소년이 명수 뒤로 나타났다.
“점박이는 쟤 하나 밖에 없었잖아. 없으면 어떻게 해?”
오후 내내 본관 뒤뜰을 뛰어다니면서 잡은 나비가 고작 2마리였다. 게다가 2번째 잡힌 나비는 커다란 점이 날개의 가운데 찍혀 있었다. 소위 희귀템이라고 불릴 나비였던 것이다.
“내가 다른 거 잡아줄게. 그건 지선이한테 양보해.”
“에휴, 난 너무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명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음 약한 애가 그렇게 윽박지르면서 죽자고 달렸냐, 라는 생각이 여자의 머릿속에 잠시 떠올랐다.
잘생긴 소년은 웃으면서 명수를 달래고는 지선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서로를 살피다가 소년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는 사람이야?”
명수가 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그래도 어른한테 먼저 인사하는 거랬어.”
그제야 명수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린 아이들에게, 그것도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받는 경험이 생소했던 여자는 얼떨떨해하면서 답을 했다.
“지선아, 가자.”
소년이 부르자, 그제야 여자 뒤에서 슬며시 몸을 드러내는 지선이었다.
“다음 거는 명수 오빠 거니까 욕심내기 없기다? 욕심내면 다른 두 마리도 모두 도망갈 거야.”
“단유오빠가 잡고 있으면 되지.”
욕심내지 않겠다고는 안한다. 역시 지선이 답달까? 티 나게 욕심내진 않지만, 소유욕이 남다른 아이였다.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고, 남의 것도 무조건 내 것, 이라고 생각하니까. 부디 보육원 밖에서는 너무 티내지 말았으면, 하는 조그마한(?) 소망을 품어보는 단유였다.
“니가 단유니?”
여자의 물음에 단유를 비롯한 아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네. 그런데요?”
단유가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해 하는 눈빛으로 여자를 마주보았다. 여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반갑다. 오늘부터 니 과외해 줄 선생님이다.”
과외? 그거 먹는 거야? 라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지선과 명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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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내가 그걸 왜 해?”
“좀 해줘라. 돈 많이 챙겨준다니까?”
“암만 그래도, 거기까지 가는 건 시간낭비 같은데?”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나와서 아이스커피를 시켜놓고 사담을 늘어놓기 좋은 어느 날. 보통 여자 둘이 카페에서 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 으레 친구이야기, 남자이야기, 남자친구이야기를 하곤 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조금 주제가 다양해지긴 했다. 친구가 들고 온 가방이야기, 남자가 사준 가방이야기, 남자친구가 사준 가방이야기 정도?
그러나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오랜 친구 주영이 가방 이야기 대신 남자 이야기로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그냥 남자 이야기도 아니고 어린 남자 이야기로 말이다.
“애가 얼마나 똑똑한 지 말도 못해.”
“천잰가 보지.”
“천재는 아니고, 영재 정도라나 봐.”
“누가?”
“재훈 선배가.”
여자는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넌 언제까지 재훈 선배, 재훈 선배 할 거니?”
“왜?”
“그 놈의 ‘선배’ 딱지는 이제 뗄 때도 되지 않았어?”
“우리 그런 관계 아니야.”
“나 참.”
여자는 팔짱을 끼고 미결사건의 범인을 추적중인 수사관의 눈빛으로 주영을 노려보았다.
“고등학교 때나 선배였지, 그게 언제 적이냐? 게다가 지금은 직장 상사라며? 그럼 선배딱지는 떼야 하는 거 아냐?”
“오버하지 마라. 그냥 입에 붙어서 그렇게 부를 뿐이고, 재훈 선배도 그렇게 부른다고 뭐라 하지 않았어.”
“나 참. 니가 아직도 이팔청춘의 꽃다운 고딩이라도 되냐? 무슨 순정파라고 선배, 선배 거리니?”
주영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손부채질을 했다.
“아이고 덥네. 야,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고 우선 일부터 이야기하자.”
“수상스럽네? 왜 말을 돌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렇지.”
“그럼 뭐가 중요한데?”
주영은 다시 단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자신이 무심결에 꺼낸 제안 때문에 과외교사를 찾고 있음을 알렸다. 사실 재훈에게도 이 이야기를 꺼냈다. 재훈은 니가 알아서 해, 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서 주영은 꽤 잘나가는 스타강사를 과외교사로 초빙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벽에 부딪혔다.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어떤 스타강사도 인평시까지 내려가서 보육원에서 사는 초딩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서울에서 인평시까지 왕복에 걸리는 시간과 과외교습을 하는 시간을 합치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에 학원 등에서 아이를 가르칠 때 받는 수입을 생각하면 스타강사라는 이들이 무리해서 그 과외를 맡을 이유가 없었다. 물론 돈을 무한정으로 퍼다 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주영에게는 그럴 돈이 없었다. 물론 재훈이 돈을 내는 것이긴 하겠지만, 그렇게 많은 돈을 지출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영은 자신이 아는 이들 중, 똑똑하고 시간이 남아 돌면서 적당한 돈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을 구하려 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바로 눈앞에서 자길 놀리며 더위를 식히는 친구, 하은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가르치라고?”
“그건 걔랑 이야기해보면 알 거야. 그래도 초등학생이니까 그리 어렵진 않을 거야. 야, 솔직히 너 요즘 시간이 너무 남아 돌아서 주체를 못하고 있잖아? 이럴 때 그냥 용돈벌이도 하고, 드라이브도 할 겸해서 다녀봐.”
“주영아, 이 언니가 아무리 시간이 많기로서니 시골까지 과외 하러 다녀야겠니? 돈이 아무리 좋아도, 시간과는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우리의 젊음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너도 계속 그렇게 선배만 찾다보면 아무것도 못하고 훅 늙는다.”
“이게 어디서 악담이니? 너는 안 늙어?”
“그러니까 이렇게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있잖니?”
하은은 선글라스를 낀 후 아이스커피를 들어 빨대를 살짝 물었다. 주위에 앉아 있던 사내들의 도둑 시선이 그녈 훔치듯 지나갔다. 그러나 주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름 값과 적당한 과외비를 적당히 제시하여 적당히 승낙할 수 있게 적당히 입에 기름칠하고 하은을 꼬셨다.
그리고 한 마디.
“걔가 또 엄청 잘 생겼어. 어쩌면 커서 모델이 될 지도 몰라.”
“초딩이 잘 생겨봐야 거기서 거기지. 그리고 야! 너 방금 위험한 발언이었어.”
자기도 훅하고 넘어왔던 주제에, 뒤늦게 아닌 척 하고 있어. 주영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신비하고 영리하고 잘생긴 소년에 대한 환상과 그 환상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설득했다.
결과적으로 하은은 주영의 제안을 승낙했다.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라도 마지막에 낸 카드가 하은의 마음을 움직였다.
“오피스텔 2달 이용권! 걔 방학 끝날 때까지 쓸 수 있게 해줄게.”
기름 값, 과외비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오피스텔까지 준다면 못해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그럼 가보지 뭐. 애들 방학기간만 하면 된다고?”
“응. 애들도 아니고 애. 단 한명 뿐이야.”
정말 비효율적이고 비상식적인 과외였지만, 주영의 선배라는 재훈이라는 사람이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음을 알기에 이번에도 그런 기행(奇行)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걔 이름은 뭔데?”
주영은 등을 뒤로 젖히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걸 이제 묻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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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단유구나. 난 정하은. 오늘부터 너 과외 선생님이야.”
단유는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그러길 잠시, 하은의 입에 걸린 미소가 살짝 굳어지려는 때에 단유가 입을 열었다.
“무슨 과외요?”
하은은 입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등을 돌리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야, 이주영. 이거 무슨 일이야?”
―뭐가 뜬금없이?
“지금 니가 말한 보육원에 와서 단유라는 애를 만났는데, 얘가 나 보고 무슨 과외냐고 묻는다?”
―···아.
“아?”
―미안. 걔한테는 아직 이야기 못했네.
“뭐?”
―걔가 아직 핸드폰이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연락을 못했어.
하은은 짝다리를 짚고는 한 손을 허리춤에 턱하니 걸치고는 빽 소리쳤다.
“야! 이주영!”
―···미안.
“너, 미안하면 다니?”
―단유, 앞에 있으면 바꿔 줄래? 내가 사정을 이야기할게.
씩씩거리던 하은이 고갤 돌려 여전히 자신을 관찰하는 단유에게 폰을 넘겼다.
“받아봐.”
단유는 공손하게 전화기를 받아들고는 주영과 통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공손하게 전화기를 건넸다.
―잘 부탁해, 하은아.
“너, 이 기집애. 나중에 두고 보자.”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놀려 통화를 끊은 하은이 단유를 내려다보자, 단유가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 들었습니다. 김단유라고 합니다.”
갑자기 꼬마아이가 어른이 되면 이런 느낌일까? 말투가 사뭇 다르니 오히려 어색해진 하은이었다.
“너 왜 갑자기 말투가 그래?”
“처음이라서 예의바르게 인사드린 거예요. 이상했다면 사과드릴게요.”
하은은 어쩐지 만만치 않은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과외는 어디서 하는 거죠?”
“어?”
하은은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래봐야 보육원 본관건물 외에는 나무와 산들 뿐이었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또 왜?
“나 과외 어디서 해?”
―···아.
“아?”
―보육교사 선생님들한테 이야기하는 거 깜빡했다.
“깜빡?”
―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요즘 재단 일 때문에 좀 바쁘니? 좀 정신이 없었어. 미안해. 내가 얼른 처리할게.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초딩과외는 잘도 챙겼네?”
하은의 비꼼에도 주영은 별 다른 변명 한마디 못했다. 괜히 했다간 오뉴월 서리 맛을 제대로 볼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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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냥 인사 나눈 정도로 만족하고, 내일부터는 너네 방에서 하도록 하자. 보육원 선생님 말로는 6시 전에 끝났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4시부터 6시까지 2시간. 오케이?”
“예. 알겠어요.”
하은은 방을 둘러보면서 공부하기에 썩 나쁜 환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청소를 열심히 해서 그런지 딱히 냄새도 나지 않고, 책 말고는 다른 놀 거리도 부족해 보이는 방이었기 때문에 과외할 때 집중은 잘 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책상 위에 눈이 갔다.
“이 책은 누가 보는 거니?”
“제가요.”
“······.”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들었는데, 중등 물리, 고등 물리, 중등 수학과 같은 교과서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구멍에서 발견한 과학」 같은 제목의 서적들이 눈에 띄었다.
“이거 두 개는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고 있는 거고요. 이 책은 졸업한 형이 물려준 거예요.”
“···그렇구나.”
하은은 살짝 웃음을 지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방을 나오면서 하은은 잠깐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 여름은 꽤 더울 것 같네.’
그 방에는 에어컨이 없었으니까 더 더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