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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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는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니 명수가 물었다.
“저녁 먹었어?”
그러고 보니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았다.
“너 또 맛있는 거 먹고 왔지?”
지난번, 주영이 단유를 데리고 외출을 했다가 돌아올 때, 저녁시간이 지난 시간이어서 외부에서 저녁을 먹인 후 보육원으로 돌려보냈었다. 그리고 그 때 일을 들은 명수가 그 사실을 기억해내고 물은 것이다.
“아니, 안 먹었어.”
“진짜? 아, 아쉽네.”
“혜린이 일어났어.”
“그래? 잘 됐네.”
날씨 좋더라, 고 지나가듯 툭 던진 말에 맑았지, 라고 별 뜻 없이 받아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짤막한 대화였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던 단유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포근했던 하루였지만, 단유에게는 겨울바람과 싸우고, 구타를 당했다가, 죽을 위기를 겪은 뒤, 눅눅한 늪지 한가운데를 쉴 틈없이 달려야만 했던 그런 하루였다. 그리고 거기가 끝인 줄 알았더니, 끝이 아니었던 하루이기도 했다.
단유는 침대에 누웠다. 익숙한 침대에 누웠더니 이제야 자기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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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네를 레카에 데려다 주던 중, 루치드는 언제나 그랬듯이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만약 아카넬을 혜린이에게 먹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가정이 필요했다. 하나는 루치드가 아카넬을 가지고 지구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 다른 하나는 혜린이를 이 곳으로 데리고 오는 문제. 둘 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한 문제였지만, 어쩐지 지금은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가 ‘공간’에 대한 포르마가 아나그노리시, ‘인식’이 되면서부터임은 말할 것도 없겠다.
사실 루치드로서도 이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디아포’, 즉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공간’에 대한 포르마가 만들어졌을 때, 루치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복면인들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보내기도 했었던 것이고, 라보네를 데리고 레카까지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녹스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이곳으로 올 때와는 비교도 못할 만큼 빠르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작을 만나서 ‘평화적으로’ 아카넬을 요구해서 얻어 볼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빈촌으로 돌아가서 다음 실험을 속행하리라.
그렇게 마음먹은 루치드는 이후 이틀 동안, 녹스로 돌아가 자작을 만나고, 아카넬 한 알―생각보다 컸다. 마치 작은 포도 한 알 정도의 크기였다―을 구해서 빈촌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안 되는 걸까?’
단유는 주영과 함께 중환자실로 돌아갔고, 면회시간에 혜린의 옆에 갈 수 있었다. 단유는 혜린을 붙잡았다.
‘될까?’
단유는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그리고 힘껏 의지를 다해 소리쳤다.
‘가자!’
잠시 후, 루치드는 빈촌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손을 맞잡은 채 바닥에 누워있는 혜린이 있었다. 이상한 것은 혜린의 몸이 알몸이었다는 것. 루치드는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옷가지 중 잡히는 것 아무것이나 가지고 와서 혜린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아카넬을 집어 들었다.
검지와 엄지로 으깨어 즙을 내고, 그 즙이 혜린의 입속으로 들어가게끔 해주었다. 아카넬을 모두 먹인 후, 루치드는 기다렸다. 혹시 추울까 봐 다른 어른들의 옷도 가져와서 덮어주었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었다가, 다시 아침이 밝아왔다. 루치드는 혜린의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아침을 알리는 산새소리가 들릴 무렵, 혜린이 눈을 떴다.
“괜찮아?”
루치드가 물었다. 게슴츠레 눈을 뜬 혜린이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반장?”
루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이 들어?”
혜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너 옷 입어야 돼.”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혜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옷가지들로 몸을 가렸다. 얼굴이 붉어졌다.
“나 잠깐 밖에 있을 테니까, 아무거나 걸치고 나와.”
루치드는 집 밖으로 나갔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오늘은 무척 맑은 날씨였다. 여전히 차가운 겨울바람이 골목을 쓸고 지나가지만, 청명한 하늘과 작은 신발모양의 새하얀 구름이 떠 있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잠시 후, 혜린이 붉은 얼굴을 하고 집밖을 나왔다.
“반장, 우리 왜 여기 있는 거야?”
혜린이 고심 끝에 만들어 낸 질문이었다. 하지만 루치드는 하얗게 웃으며 혜린에게 다가갔다.
“여긴 꿈속이야.”
“응?”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오히려 혜린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넌 꿈을 꾼 거야. 많이 아팠거든. 그러니까 너무 오래 꿈꾸면 안 돼.”
루치드는 혜린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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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유도 짧은 시간 많은 고민을 했다. 그곳의 시간이 비록 여기에 비해 길다지만, 그곳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아무래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길어지는 만큼 불균형도 심해진다고 하니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처음부터 시나리오는 잠깐 실험해보고 실험이 통한다면 바로 돌아오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혜린을 데리고 가는 것에는 성공을 했다. 이후 혜린이 일어나지 않고 있을 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카넬의 효능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제윅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효능이 아주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성주가 기를 쓰고 매년마다 아카넬을 모았을 것이다.
게다가 혜린이 죽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의학적으로는 죽었다, 고 판단했지만 역시 단유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상이었다. 때문에 일단 되던 안 되던 해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카넬의 약효는 혜린에게 통했다.
두 번째 고민은 역시 시간이었다. 최대한 빨리 왔다가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혜린의 손을 붙잡은 채로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고, 혜린도 이곳에 오래 머무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혜린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어떡하나 싶었지만, 일어나는 순간에는 곧바로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혜린이 일어났을 때,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생각을 못했다. 오히려 혜린이 몸을 일으킬 때는, 혹시 당황해할까봐 일부러 집 밖으로 나갔다. 찬바람을 맞은 후에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혜린이 나오면 곧장 돌아가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만 ‘꿈’이라고 말한 것은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하자면 임기응변식의 대응이었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름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되었다고 자평했다.
그 이후, 사람들은 혜린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기뻐서 소리 지르고 놀라고 울었다.
단유는 몸을 돌렸다. 다음에 다시 볼 때는 아마도 교실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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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인걸까?”
하지만 아무리 꿈이라도 너무 현실감 넘치던 광경이었다. 낡은 나무집과 판자바닥. 생전 처음 보는 질감의 옷들과 낡은 집기들. 게다가 문을 열고 나갔을 때,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시골에서나 볼법한 집들과 시골에서도 보기 힘들 것 같은 나무집들이 주위를 채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문을 열었을 때, 들이닥친 그 차가운 바람의 느낌은 도저히 꿈이라고 여길 수 없었다.
“꿈이라면 왜 반장이 거기 있었지?”
아침햇살을 맞으며 밝게 빛나던 반장의 얼굴. 하얀 미소와 검은 눈동자, 빛이 나는 두 뺨과 짙은 눈썹. 평소에도 잘 생겼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그 순간에 혜린의 가슴에 둥, 하는 울림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때 난···.”
왜 하필 알몸으로 그 애 앞에 누워 있었을까. 그 생각이 떠오르자 혜린은 얼굴을 붉히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다 봤겠지?”
아니, 꿈이니까 괜찮은 걸까?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그저 혼자 발을 동동거릴 뿐이다. 만약 꿈이라면 부끄러움에 몸부림 칠 꿈이고, 아니더라도··· 아니라면 더 큰 문제다!
“힝···.”
눈물이 핑 돌았다. 기적의 주인공, 살아 돌아온 혜린의 첫 소감은 부끄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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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4학년 1학기가 지나가고 방학이 찾아왔다. 언제나와 같이 방학이 되면, 보육원은 거의 매일 사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반찬의 질이 올라가고, 특식이 많아지며, 운동장은 붐비고, 날은 점점 더워졌다. 명수는 애들과 함께 공을 차고, 나이 많은 형들이나 누나들은 외출을 나가고, 어린 아이들은 보육교사의 손을 붙잡고 보육원을 한 바퀴 돌며 운동을 했다.
“선생님. 나비요.”
5살도 안된 아이들이 화단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가리키며 즐거워했다. 보육교사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저 나이때 아이들은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관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것들을 찾고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함께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소속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가진다.
“어, 단유야? 어디 가니?”
마침 화단 옆을 지나가는 단유를 보며 보육교사가 물었다. 단유가 함께 걷고 있던 지선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방학 숙제 한다고 해서 도와주고 있어요.”
“숙제?”
“곤충 채집이라는데요?”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누가 누굴 돕는 거냐고 핀잔이라도 주었을 테지만, 단유라면 저렇게 행동하는 게 오히려 그 아이답다.
“지선아, 오빠 말 잘 들어야 돼. 알았지?”
“네.”
물어 무엇 하리. 최근 지선이는 껌이라도 된 것처럼 단유에게 달라붙어서는 항상 같이 다니고 있었다. 식당을 갈 때도 같이 가고, 도서관에 가도 같이 다녔다. 명수에게 붙들려 공을 찰 때는 골대 근처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경기를 관람했다.
“여기 위험해. 스탠드에 가 있어.”
라고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곤 골대 뒤로 돌아갔다.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위험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지만, 단유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잘 때만큼은 자기 방에서 잠이 드니까, 그나마 다행이랄까.
“각시랑 어디 가냐?”
단유와 지선이 지나가는 모습을 본 명수가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식당 뒤에.”
“왜?”
“곤충채집. 지선이 방학숙제래.”
“방학한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무슨 숙제를 지금 해?”
명수에게는 방학한지 일주일이 안됐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방학이 일주일 남았을 때 하는 것이 방학숙제였다.
“곤충은 미리 잡아두는 것이 좋아. 나중에는 잡기 힘들어.”
“야, 공지선. 너 때문에 석고가 나랑 안 놀잖아.”
지선이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명수를 바라보았다. 마치 ‘뭐 어쩌라고?’ 라고 묻는 얼굴이었다. 명수는 팔짱을 끼고 지선을 바라보았다. ‘니가 뭔데?’라고 묻는 얼굴로.
“명수야, 너도 같이 가자. 나 혼자서는 못해.”
“그럴까?”
명수가 씩 웃었다.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가자! 고고!”
지선은 괜히 바닥을 한 번 찼다. 그리고 단유의 손을 붙잡고는 뒤뜰로 향했다.
평화로운 방학기간, 보육원의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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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보육원으로 주영이 찾아왔다.
“필요한 건 없니?”
라고 물었을 때,
“없어요.”
라고 대답했더니, 그 다음부터 주영이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왔다. 필요한 게 생길 때까지 오실 거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했다.
“선배가 다 나을 때까지는 내가 널 돌봐주고 싶어서 그래. 말하자면 후원자라고나 할까?”
단유는 마침 잘 됐다는 식으로 물었다.
“그럼 공부 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공부?”
주영은 난감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이곳에 잠시 들리는 것도 잠깐 틈을 내는 정도라서, 오랜 시간을 머물 수가 없었다. 두 번째는 단유 역시 선배와 같은 과, 소위 ‘괴짜’라는 것이었다. 괴짜는 괴짜만이 상대할 수 있는 법이다. 자신은 괴짜가 아니었다. 고로 단유는 자신이 상대할 수 없었다.
“내가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해.”
“괜찮아요. 가끔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게 있어서 그랬어요. 책 찾아보면서 혼자 알아봐도 되니깐 신경 쓰지 마세요.”
별 기대 없이 물었다는 것처럼 들려, 오히려 주영이 미안해졌다.
“그럼 말이야. 과외선생님 구해줄까?”
“과외선생님을요?”
단유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