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6)
-------------- 132/952 --------------
라보네가 루치드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지난 과거의 기억들이 지나가며 루치드는 온 몸을 떨어야 했다.
“제발···.”
루치드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또다시 밀려드는 무력감에 눈을 돌린 것이었다.
피칠갑을 한 네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저들은 저렇게 달려와 또 한 생명을 끊어낼 것이다. 예전의 그 놈들처럼.
루치드는 눈을 부릅떴다.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만해!”
루치드의 외침이 늪지대를 울렸다. 흐느적거리던 수초들과 늪지 한가운데 서 있던 우람한 고목들이 울림에 반응했다. 절박함과 절망감이 섞인 외침에 잔잔한 안개가 밀려날 정도였다. 퍼석거리던 나무판이 울었고, 먹구름 낀 듯 어두웠던 하늘도 울림에 반응하듯 살짝 떠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달려들던 사내들도 그 울림에 반응했다. 좌절과 슬픔, 분노의 울림이 그들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몸이 살짝 떨렸다.
루치드를 중심으로 울림이 퍼졌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울림이었지만, 모두가 보았고 모두가 들었다.
****
한동안 루치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온갖 감정이 들불처럼 타올라서 온 몸을 감싸더니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진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이성을 되찾았을 때, 루치드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그 광경이 놀라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물리적으로도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네 사람이 그들을 향해 뛰어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늪에서부터 피어오르던 눅눅한 안개가 길 위로 기어오르던 중에 멈춰 있었다. 한 복면인이 거칠게 바닥을 짓누른 탓에 튀어 오른 나무 조각이 공중에 멈춰 있었다. 복면인이 두른 복면도 공중에 휘날리던 모습 그대로 멈춰 있었다.
“······.”
눈앞에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루치드 본인도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 발가락, 혀, 심지어는 눈동자까지도 움직일 수 없었다. 오로지 생각만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때와 같았다. 에르케넨으로 들어가기 직전, 절벽에서 뛰어 내릴 때 경험했던 그 때처럼. 모든 것이 멈추고 오직 생각만 가능한 순간.
루치드는 이 현상이 왜 갑자기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기 힘들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지만, 놀란 것은 그저 생각에 불과했다. 여전히 몸도, 눈도 돌릴 수 없었다.
“괜찮아. 굳이 보려고 애쓰지 마. 그동안 편법으로 실컷 봐 놓고선, 뭘 또 보겠다고 그러니.”
라보네의 목소리일까? 싶었지만, 라보네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여성의 목소리 같으면서도 미성의 아이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참 신기한 아이로군. 내 일찍이 너 같은 녀석은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나도 한 참을 살았고, 또 한 참을 살겠지만 너 같은 녀석은 두 번 다시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루치드는 침을 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침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몸이니, 그저 머릿속으로만 느끼는 갈증이었다. 누구지?
“누군지 알면서 묻네? 일부러 그러는 거야? 멍청한 척하기?”
누군지 안다고? 루치드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편법으로 실컷 봤다’는 것. 이 문장이 지칭하는 것은 오직 라보네의 얼굴 밖에 없었다. 라보네의 얼굴은 ‘신의 축복’. 그렇다면?
“녀석. 굳이 그렇게 세세히 따지지 않더라도 말이야. 이 상황에서 너한테 말을 걸 이가 또 누가 있을까?”
그렇다면 당신이 이 시간을 멈춘 것인가요?
“아니. 멈춘 건 너. 난 단지 끼어들었을 뿐.”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지요?
“한 번 해본 거라며?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려울까?”
모르겠는데요?
“괜찮아. 몰라도 할 수 있을 거야. 너라면. 못하면? 할 수 없고. 그건 네 사정이고, 나도 이 참에 하나 물어보자. 계속 궁금해서 말이야.”
뭔데요?
“너 마법사지?”
···글쎄요? 진심으로 루치드는 자신이 마법사라고 부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데 마법사라고 할 수 있을까?
“마법 쓸 줄 알잖아?”
···예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못해요.
“그래? 뭐, 니가 그렇게 말하면 할 수 없지. 다만 그게 궁금했어. 넌 다른 마법사랑 조금 다른 거 같아서 말이야.”
어떻게요?
“이 세상 사람이 아닌데도 마법을 쓰잖아?”
루치드는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을 받았다.
****
“잘 지내.”
목소리는 짧은 목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예의바른 신(神)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장난스러운 면도 있지만, 진지하게 문답을 주고받았다.
“어차피 얼마 후면, 나와의 대화는 잊을 거야. 그래도 나와 대화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일걸? 소중히 생각하고 고맙게 받아들여.”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사라진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전히 루치드는 멈춘 세상에서 생각을 계속 했다. 언제 이게 풀릴까? 지난번에는 어떻게 풀렸었지?
아니 그보다 방금 전의 대화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먼저 점검해보았다.
‘가장 익숙한 것’
힌트는 그게 다였다. 하지만 제윅의 경우에서도, 핀체노의 경우에서도 그랬듯이 그들은 가장 익숙한 대상을 아나그노리시하여 마법을 시전 했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익숙한, 지금 당장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이 무엇일까?
그런데 기묘하게도 매우 익숙한 것을 떠올리자, 아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이 세상 사람이든 아니든, 이 곳과 저 곳을 오가며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왜 매우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루치드는 지금 느끼는 감각에 집중했다.
****
나무판자 위로 올라오던 안개가 꿈틀대더니 천천히 길 위를 덮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여러 마리의 뱀들이 사냥감을 노리듯 조심스럽게 기어오르기 시작한 늪안개는, 곧 성난 발길질에 걷어차이고 흩어졌다.
“죽여 버리겠다!”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달려오던 네 사람이 칼날을 앞으로 겨누고 달려들었다. 이윽고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두 사람에게 다다른 복면인이 칼을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사나운 소리가 들리려는 찰나, 복면인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사람들도 한 명씩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
가장 뒤에서 달리던 복면인이 급히 제동을 걸어 뜀박질을 멈추었다. 두 걸음 앞에 꼬마와 여자가 있는데, 다가갈 수 없었다. 앞서 달리던 세 사람은 어디로 간 거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꼬마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
사내가 당황하는 사이, 주변이 빠르게 변했다. 곧 자신이 떨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어디서? 어떻게?’
방금 전까지 리아빈의 나뭇길 위에 서 있었는데, 어느 순간 떨어지고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억지로 몸을 틀어 바라보니 이윽고 그의 눈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으아악!”
사내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타이밍에 주변에서도 비명이 들려왔지만, 너무 놀란 사내는 그것을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
목이 찢어질 정도로 비명을 질렀지만, 그 순간은 짧았고 이내 비명은 사라졌다. 대신 암녹색 늪에 빠지며 난 소리가 비명을 집어삼켰다. 연이어 세 번 더 비명소리를 꿀꺽 삼켰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이 사태를 벌인 루치드도 알지 못했다.
****
루치드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저기 어디쯤인가일 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계속 보고 있을 호기심도, 여유도 없었다.
다만 가벼운 흥분은 몸에 남았다. 다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뜻밖에도 꽤 쓸 만한 마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이 마법에 대해서는 루치드 본인도 원리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게다가 이 마법이 가능하게 된 것에는 분명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인데, 누구의 도움이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런 찜찜함이 있었지만, 급한 것은 자기 무릎을 베고 신음을 흘리는 라보네였기에 의문점을 푸는 것은 뒤로 미뤘다.
“괜찮아요?”
창백한 얼굴의 라보네는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어서, 도망가.”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루치드는 잠시 칼을 뽑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일단 움직일 때마다 차가운 날이 어깨를 찌를 텐데 그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변변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루치드는 한숨을 쉬고 로브를 벗었다. 예전 같으면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마법을 썼겠지만, 지금은 그게 어렵다. 하지만 차라리 추운 게 낫겠지.
루치드는 어깨에 꽂힌 칼을 바닥으로 ‘이동’시켰다. 칼이 사라진 상처에서 피가 솟아났다. 루치드는 빠르게칼을 집어 들고 로브 아랫단을 길게 잘랐다. 그리고 그 천으로 라보네의 어깨를 감아서 응급조치를 취했다.
“잠시 눈감고 있어요. 금방 갈 거예요.”
루치드는 고개를 들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루치드와 라보네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뜻밖에도 루치드가 가장 자연스럽게, 익숙하게 받아들인 것은 바로 ‘공간’이었다. 다른 공간으로의 전이가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이상했다. 루치드의 기억에 ‘공간전이’는 고작해야 6번이었다. 제윅은 어렸을 때 하루 종일 바람과 함께 살았다고 했고, 핀체노의 경우는―직접 들은 바는 없지만―그가 사용했던 물의 마법을 보면 필시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경험했던 바가 틀림없었다. 반면에 고작 6번의 ‘공간전이’ 경험이 익숙하게 느껴진다?
결국 이 마법은 루치드에게 새로운 힘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쉽지 않은 숙제를 안겨준 셈이었다.
“누나, 정신 차려 봐요.”
조심스럽게 라보네를 흔들어 정신이 들게 했다. 라보네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이 없었지만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왜, 안 도망가?”
“괜찮아요. 끝났어요. 그리고 저희도 리아빈을 나왔고요.”
그 말에 눈이 커진 라보네가 억지로 고개를 틀어 보았다. 주변에 낮은 둔덕이 보였다. 그리고 저기 멀리 짙은 어둠으로 둘러싸인 미궁, ‘리아빈’의 입구가 보였다.
“어, 어떻게 나온 거야?”
“그건 나중에 설명할게요. 우선 누나, 몸부터 치료해야 돼요. 여기, 혹시··· 치료를 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라보네는 기억을 끌어올려 가장 가까운 마을을 떠올렸다.
“저 길을 따라 가다보면, 마을이 있었던 것 같아.”
루치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눈 감으세요. 그리고 잠시 쉬세요. 그러면 제가 곧 마을로 데리고 가 드릴게요.”
희미한 미소를 짓는 루치드를 보며, 라보네는 눈을 감았다.
****
라보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낯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나이 든 여성의 목소리에 라보네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렸더니, 두건을 둘러 쓴 중년 여성이 곁에 앉아 있었다.
“여, 여긴 어디죠?”
“레카에요. 아가씨 꼬박 이틀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우.”
그렇게 시간이 지났나? 그럼에도 가슴 한 편에 퍼지는 안도감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아, 혹시 저랑 같이 온 아이는요?”
“그 아이는 아가씨를 여기 데려온 뒤에 볼 일이 있다면서 떠났어요.”
“떠나요?”
라보네의 눈이 커졌다.
“예. 가기 전에 저희 마을의 촌장님을 찾아서 아가씨 가문에 연락을 취하도록 조치도 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내일이나 모레는 오지 않을까 싶어요.”
“아니, 것보다 그 아이는···.”
“아, 그리고 걔가 가기 전에 남긴 말이 있어요. 자긴 다른 급한 일이 있어서 떠나니까 굳이 찾지 않아도 된다고요.”
“아···.”
라보네는 짧은 탄식을 남기고, 고개를 돌렸다. 낡은 목재로 지은 집의 낯선 천장이 너무 낮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
“정신이 들어?”
“예. 저기··· 제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죠?”
“어, 10분? 20분? 그 정도 지났는데? 괜찮아?”
단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응급실 침대에서 내려왔다.
“아니, 잠깐. 아직 검사도 안했고 혹시 모르니깐 좀 더 누워서 쉬는 게 어때?”
주영이 황급히 단유를 말렸다.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단유는 입고 있던 옷을 탁탁 털어낸 후, 주영을 바라보았다.
“혜린이는요?”
주영은 슬픈 눈으로 단유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