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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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던 루치드는 여전히 짙은 안개에 싸인 늪과 짙은 녹빛의 수초들이 자신들을 아우르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시간이 지체되고 있음을 떠올렸다. 지금은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그만 가요.”
지금쯤이면 아무리 못해도 싸움이 결판났을 것이다. 한쪽이 모두 죽었거나, 혹은 한쪽이 도망을 치거나. 둘 다 루치드와 라보네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무 바닥 위에 주저앉아있던 라보네가 끙끙거리며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붙잡고 잠시 멈춰있던 라보네가 호흡을 가다듬고는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루치드로서도 딱히 그녀를 도울 방법은 없었다. 그저 열심히 달리는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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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태어나 이렇게 오랫동안 달린 적이 없었다. 다시 한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지금 쉰다면 그대로 끝이다.
“힘내요.”
옆에서 달리는 꼬마는 정말 잘 달렸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달리기만 해온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꼬마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물론 자신보다는 편해 보였다. 자신은 죽기 바로 직전이니까.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똑같다면···.’
라보네는 속도를 늦추더니 이윽고 멈춰버렸다. 앞서 달리던 루치드도 이를 알아채고는 달리기를 멈췄다.
“나, 이제는, 못 뛰겠어.”
루치드가 봐도 무리였다. 라보네의 입술이 파랗게 질릴 정도였으니까. 눈 아래를 가렸던 면사도 땀에 절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루치드는 라보네의 뒤를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더 크게 들려오는 뜀박질 소리였다. 아직 저들의 정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절걱거리는 갑주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아마도 복면인들 무리가 아닐까 짐작해볼 따름이었다.
“괜찮아요. 쉬세요. 이만큼이면 최선을 다한 거예요.”
루치드가 라보네에게 다가왔다. 라보네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짚은 자세로 호흡을 급하게 들이쉬고 있었다. 루치드는 라보네를 지나쳐 점점 다가오는 소리들과 마주 섰다. 그리고 이제 이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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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칼을 쥔 손끝에 힘이 빠져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장시간 칼을 휘두르는 것도 힘든 판국에 사생 결단의 각오로 칼과 칼이 맞부딪히기를 여러 번 하니, 더욱 악력의 소모가 빨랐다.
“대장!”
아무리 근위대장이라고 해도, 이런 싸움의 한 복판에서 잠시 한눈팔다간 거기서 끝이다. 명패는 싸움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다만 명패가 쌓아온 신뢰는 도움이 된다.
“윽!”
뒤에서 날아드는 칼을 막아낸 부하가 부지불식간에 지른 비명에 근위대장이 정신을 차렸다. 앞발을 내질러 눈앞의 적을 밀어낸 후, 뒷발을 중심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부하를 향해 두 번째 공격을 가하는 복면 일당의 허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불행히도 이들은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공격을 가하던 순간이었음에도 방심하지 않았는지, 공격방향을 억지로 틀어 허리로 향하는 칼을 제쳐낸 후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여유까지 보였다.
“괜찮냐?”
“예··· 괜찮습니다.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은 부하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였다. 목을 부여잡고 땅에 쓰러지는 이들, 가슴에 칼을 박고 늪으로 밀려 쓰러지는 이들, 텅 비어버린 어깨를 붙잡고 오열하다 목을 잃은 이들까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급급한 상황에서도 근위대장은 부하들의 죽음을 한 눈으로 담아야 했다.
“좋다. 그럼 싸워라. 너도 이제 몸이 풀리지 않았느냐.”
딴에는 농담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부하는 히죽 웃으며 부들거리는 팔을 들어 올렸다.
“예, 이제 예전 실력이 나오려나 봅니다.”
당장 둘러봐도 갑주를 입고 선 이가 10명이 되지 않았다. 물론 상대도 줄긴 줄었다. 둘러보니 대략 5명 또는 6명?
“우선 이 앞의 놈들부터 처리하고 가보자.”
“하압!”
부하는 우렁찬 함성과 함께 칼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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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안 보이는군.”
“꽤 멀리 도망갔나 본데요?”
“그래 봐야 여자와 꼬마다.”
사실 처음 뒤를 쫓을 때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말한 것처럼 여자와 꼬마였으니까. 아무리 싸움에 지친 몸이라도 그간 전장에서 구른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이제 수적으로 2배 이상인 근위대와 부딪히고도 살아남은 이들이니 실력으로는 당당히 앞에 설 만한 자격을 가진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와 꼬마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쨌든 길은 하나니까.
“말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 너무 긴 시간 벌어진 싸움 통에 놀란 말들이 모두 그냥 도망갔을 것이다. 도망가다가 잘못하여 늪에 발을 담그면, 그대로 끝. 특히 앞머리가 무거운 말들은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지기 일쑤였다.
복면인은 잠깐 고개를 돌려 따라오는 이들을 보았다. 10명이 가서 4명이 돌아오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근위대를 이겼다는 공적은 자랑할 만하지만, 그럼에도 반 이상이 죽어버린 탓에 앞으로의 활동에 지장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대장, 그런데 말입니다. 그 꼬마가···.”
“쉿.”
복면인은 말을 막았다. 아카넬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좋았다. 지금 당장은 그랬다. 처절한 싸움에서 살아남았다는 기쁨도 있지만, 동료를 잃었다는 아픔도 함께한 지금, ‘아카넬’에 대한 이야기는 좋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생각해볼 여지는 있었다. ‘아카넬’이 있다면, 그게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이용하여 용살대의 세를 불릴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자면 반드시 그 꼬마나 여자가 ‘아카넬’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기 조각으로 만들어 늪에 던져주마.’
이 모든 싸움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길 바라며 복면인은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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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소리?”
라보네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라보네가 주춤거릴 때, 루치드가 옆에 서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돌아보는 라보네에게 루치드는 담담하게 말했다.
“차분하게 행동하시면 돼요. 절대 당황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늪 안개를 뚫고 나타난 사람은 총 4명. 가죽으로 된 재킷과 바지에는 온통 핏자국이어서 얼핏 보면 붉은 가죽이라 착각할 법한 모양새였다.
“여기까지 오다니, 꽤 열심이었나 보군.”
복면인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루치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 4명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같이 갈까?”
루치드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는 듯, 복면인들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근위대는요?”
루치드가 물었다.
“그네들이야 그들의 소원대로, 명예를 지키게끔 도와주었지.”
어찌나 열렬히 애원하던지.
“잠깐만요.”
앞서 걷던 복면인이 슬쩍 손을 올렸다. 그러자 뒤따르던 이들이 모두 제자리에 서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왜? 아까처럼 입방정 떨어보시게?”
비아냥대는 복면인에게 루치드는 되도록 침착하게 보이게끔 노력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아카넬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건 아쉽네. 그런데 상관없어. 앞으로 천천히 알아보자고. 아직 갈 길이 머니까 시간은 많아.”
“왜 저희를 데리고 가려는 거죠?”
“정확히 말하자면, 우린 저 여자가 필요한 거야. 저 여자를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 말이야.”
“그렇다면 굳이 그 자리에서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이 길이 하나라면 늪이 끝나는 위치에서 기다리셔도 되는 일 아니었나요?”
“그랬다면, 너희들은 근위대에게 잡혔겠지?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루치드는 주먹을 꽉 쥐고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능글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복면인의 태도는 분명 자신들이 우위에 있음을 알고 여유를 부리는 것이겠지. 분명 저들은 호의적이지 않으며, 라보네는 분명 그다지 좋은 대접을 받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것은 도망뿐이다. 단지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것. 그렇지만 루치드도 그들을 기다리며 멍청하게 시간만 보냈던 것은 아니었다.
“누나.”
이제껏 바싹 굳은 자세로 상황을 주시하던 라보네가 루치드의 물음에 화들짝 놀랐다.
“누나.”
다시 한번 부르자, 머뭇거리던 라보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앞으로 나섰다.
“호오, 여자를 희생시키고 대신 자신은 도망가겠다는 건가?”
복면인이 이 우스꽝스러운 사태에 비소를 날렸다. 실컷 입방정을 떨더니 결국은 여자를 앞에 세우는 꼴이라니. 이래서 꼬마들이란. 게다가 덜덜 떠는 저 꼴을 보니 우습지도 않다.
“어이, 벨로. 그런다고 우리가 그 애를 포기할 거 같소?”
복면인은 피식 웃으며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뒤에 선 3인이 라보네를 향해 다가왔다. 그때 루치드는 라보네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라보네의 어깨를 짚었다.
“누나.”
라보네는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손을 들어 면사의 끝을 붙잡고 당겼다.
루치드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마법 이상으로 강력한 힘이 바로 신의 힘이었다. 그런데 정작 라보네는 그 힘을 저주라 생각하는지 늘 감추려고만 했다. 그런데 굳이 이런 상황에서 감출 필요가 있을까? 신의 힘은 라보네가 가진 강한 무기인데.
라보네의 얼굴이 드러나자, 다가오던 네 사람은 순간 정지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동공은 풀리고, 입은 자연스럽게 벌어지면서 어떤 이는 그 사이로 침이 흐르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복면으로 가려진 터라 흉측할 뻔했던 그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는 게 라보네에겐 다행이었다.
이럴 때, 뭐라고 했더라?
“Mera Vera.”
루치드는 중얼거리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리고 완전히 동작이 멈췄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루치드는 라보네의 어깨를 짚은 채로 뒤로 물러섰다.
“천천히요.”
라보네는 루치드에게 의지한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여기서부터는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 알 수 없었다. 라보네가 자신의 힘을 시험해본 적이 없었기에, 저 현상이 일시적인지 아니면 반영구적인 것인지, 혹은 얼굴을 보지 않으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이렇게 뒷걸음질로 천천히 물러나는 방법을 선택했다. 대신 루치드가 길을 돌아보면서 라보네가 넘어지지 않게 도와야 했다.
“괜찮을까?”
루치드의 손으로 전해지는 떨림만으로도 라보네가 얼마나 많이 긴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일단은 해보는 수밖에 없어요.”
만약 자신이 힘이 좋다면, 저들이 움직이지 못할 때 다가가 때려눕히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자신의 힘을 자신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누군가를 때려본 적이 없던 루치드였다.
“조심하세요. 오른쪽으로 돌아야 해요.”
전진하는 방향에서 왼쪽으로 틀어지는 길이었다. 그렇게 조심해서 멀어지던 와중, 가장 뒤에 섰던 사내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뛰어요.”
라보네는 즉시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루치드가 뒤따르면서도 복면인들의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자, 굳었던 몸이 풀린 이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몸이 굳은 게 아니라 정신이 굳어버렸다고 해야 옳겠다.
“이놈들이 잔 수작을!”
복면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침을 느꼈다. 고생고생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름도 모르는 꼬마 애와 여자 하나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복면인들은 빠르게 뛰었다. 그들은 금방 뒤를 쫓았다. 그런데 문제는 라보네가 뒤를 흘깃 돌아볼 때마다 움직임이 멈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도 모르게 ‘지구’에서 유행하는 골목 놀이를 하는 셈이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 놀이가 재미없었다.
“제기랄!”
육두문자를 입에서 굴려대도 방법이 없었다. 그때 머리를 쓴 것은 다른 복면인이었다.
“대장, 차라리 상처가 나더라도 잡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너무 온전한 상태로 모셔(?)가려고만 했던 것이 문제였었다. 이대로는 놓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비도(飛刀)를 날려라.”
사내는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더니, 여자가 돌아보지 않을 때 힘차게 내던졌다. 달리면서 던진다고 해서 명중률이 떨어질 실력은 아니었다.
“아악!”
라보네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누나!”
급히 라보네를 부축해보지만 어깨에 깊숙이 박힌 단도를 빼는 것은 무서웠다.
“도망가!”
그 순간. 라보네가 소리쳤다. 루치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난 괜찮으니깐, 너라도 도망가. 어서!”
고통 속에서도 라보네는 그렇게 외쳤다. 루치드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