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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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 거야?”
라보네는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양쪽의 눈치를 봤다. 두 진영의 가운데에 선 두 사람이 신호만 주면 그 즉시 충돌이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어느 쪽이든 안전하진 않을 것 같네요.”
루치드도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일단 본인이 원한대로 판은 뒤집혔다. 복면인이 원하는 답, 근위대가 원하는 답, 그리고 루치드네가 원하는 답. 그 세 가지는 결국 상충할 수밖에 없었다. 아카넬이라는 변수를 던져서 각자의 등식에 오류를 만들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루치드가 원하는 답을 구하기 위한 새로운 등식을 성립시킬 차례. 우선은 루치드가 주도하는 판을 만드는 것이 첫 번째.
하지만 여기에 또 다른 변수가 있으니 이 전장에서 루치드만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네놈들!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늪귀신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수적우세를 차지한 근위대장이 한층 힘이 붙은 목소리로 호령했다. 복면인의 수장격인 남자는 대답대신 손에 쥔 칼을 높이 들었다. 하지만 항전의 의미는 아니었다. 누가 봐도 불리한 형국에서 무리하게 싸움을 벌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자신들이 비록 윗분들이 곤란해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해결사들이었다지만, 충심을 드러내는 조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정체를 드러내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생업(生業)의 특성상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여자만 있으면 되오.”
말 그대로 여자만 있으면 된다. 여자가 아카넬을 품고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리고 그럴 확률이 높다고 여겼다. 건방지고 철없는 꼬마에게 그런 귀한 보물을 맡길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를 우리에게 양보하면, 이대로 조용히 물러나겠소.”
일단 협상을 해봐야 했다.
“웃기는 소리! 그 여자도 저 꼬마랑 한 패거리다! 공국의 자작을 모욕하였으며 신의를 저버린 불한당이란 말이다!”
애초에 두 사람을 잡아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만 여자가 귀족이라는 점, 그리고 자작에게 직접적인 협박을 가한 상대는 꼬마라는 점 때문에 복면인의 제안은 들어줄 법도 했다. ‘아카넬’이라는 이름이 거론되기 전이었다면 말이다.
이제는 다른 어떤 이유로도 저 여자가 중요해졌다. 때문에 근위대로서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
“셋을 셀 동안 물러서지 않으면, 이대로 모두 죽을 줄 알아라!”
근위대장은 다시 한 번 경고를 했다. 유리한 상황에서 시간을 끌며 저들에게 기회를 줄 필요가 없었다.
“하나!”
물론 자진하거나 항복을 한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둘!”
루치드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이 사태를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평화적이든 비(非) 평화적이든 제 1목표는 탈출이다.
“셋!”
복면인들은 무릎을 굽히고 칼을 세웠다. 근위대원 역시 칼을 비스듬히 눕히고 앞선 발에 힘을 주웠다.
“잠시 만요!”
루치드가 소리쳤다. 그리고 일순간 높아지던 긴장감은 맥이 끊겼다. 복면인들이나 근위대나 모두 아무 말도 못하고, 루치드를 쳐다보았다. 분노와 호기심이 공존했고, 긴장과 안도가 함께했다.
“꼬마, 뭐하는 짓이냐!”
근위대장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니 루치드는 한순간이나마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단련된 군인의 살기는 다른 범죄자들의 그것들과는 사뭇 달랐다.
“굳이 싸울 필요는 없지 않아요? 여러분들께서 싸우시면 분명히 죽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라요. 그러기보다는 서로 이야기를 통해 각자가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합리적으로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대원칙은 탈출이지만, 안전하게 탈출하기 위해선 서로 대화를 통해 틈을 만들거나 혹은 평화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두 편이 모두 머뭇거렸던 것은 아무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일 테니까.
그 때, 근위대장이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펴기 시작했다. 뒤에 뒀던 발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바르게 들고 정자세로 섰다. 칼을 든 손을 내리고 칼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차렷 자세가 된 근위대장이 얼굴을 굳히고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자작께서 왜 너를 잡으라 하셨는지 알겠구나.”
조금 전까지 늪안개를 몰아낼 정도로 크게 호령하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음산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어린 놈. 넌 감히 그 가벼운 혀를 놀려 우리를 장난감처럼 다루려 하였구나.”
루치드의 눈이 커졌다.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근위대장의 기세에 밀려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녹스의 근위대다. 수없이 많은 나날을 단련하며 몬스터와 강도와 비적들로부터 녹스를 지키기 위해 싸워왔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다.”
처음부터 근위대로 뽑히지 않았다. 경비대원으로 경력을 쌓던 중 출중한 실력을 보인 자들에 한해 엄격한 기준 아래 선별된 이들이 바로 근위대.
“우리가 수십 년간 쌓아온 명예와 신념을 한낱 종이쪼가리 다루듯 이야기하고, 목숨이 아까워 벌벌 떠는 겁쟁이로 취급하는구나.”
근위대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뒤에 선 근위대원들의 자세도 변하기 시작했다. 차렷 자세로 반듯하게 서기 시작한 근위대원들의 기세는 조금 전까지 근위대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근위대.”
“예!”
낮은 호명에도 하나처럼 복창하는 근위대.
“우리의 명예와 신념이 저 꼬마 놈의 혀에 휘둘렸다는 게 부끄럽다.”
근위대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두려움? 공포? 오직 적개심과 분노만이 자리하는 눈빛들이었다. 루치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책임지겠다. 너희들은 눈앞의 적들을 모두 죽여라. 베고 쓰러뜨려라. 저 아이, 저 여자 모두 죽여라. 우리의 명예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라. 내가 책임지겠다.”
자작은 아이와 여자를 산채로 잡아오라고 했지만, 그런 건 이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에 대한 책임은 근위대장이 진다. 근위대는 오로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싸우기만 하면 된다.
“죽음 앞에 두려움을 보이는 사람 있는가?”
“없습니다!”
“저들과 싸우는 것이 두려운 사람 있는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싸우겠는가?”
“예!”
근위대장이 칼을 치켜 올렸다.
“죽여라.”
―와!
거센 기합과 함께 근위대가 돌격을 시작했다. 복면인은 서둘러 명을 내렸다.
“막아라! 아이와 여자를 보호하라!”
용살대 역시 뛰쳐나갔다. 복면인은 굳이 아이와 여자를 살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근위대가 죽이려 한다면, 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보네야 자신들이 기습을 감행한 목적이자 목표이니 당연한 것이고, 저 아이도 말하는 본새는 건방지고 철이 없지만, 아카넬을 잘 아는 아이였다. 그에 대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을 듯하니, 우선 살려두고 볼 일이었다. 죽이더라도 자신들이 죽여야지, 근위대의 손에 뺏기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용살대 역시 기합과 함께 달려가 근위대와 칼을 맞댔다. 이내 서로간의 죽고 죽이는 혈투가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용살대의 한 명이 루치드와 라보네를 데리고 용살대 뒷길로 인도했다.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둘을 보호할 속셈이기도 했고, 여차하면 인질로 삼아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인질이 될지 안 될지는 또 모르는 거니까.
“죽어!”
싸움에 대응한 또 다른 이유는 용살대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었다. 저들이 몬스터나 비적과 싸웠던 경험이라며 말한 것들은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반면 용살대는 최근까지도 현장에서 실력을 쌓으며 살아남은 최상의 실력자라는 믿음이 복면인에게 있었다.
“윽!”
용살대원의 칼이 비스듬히 올려쳐지며 근위대원의 가슴을 갈랐다. 큰 동작의 틈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또 다른 근위대의 공격은 옆에서 대신 막아주는 용살대원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다. 수가 적어도 충분히 싸워볼만 하다고 생각한 복면인의 판단처럼 용살대는 적절히 합격술을 펼치면서 근위대와 호각세를 이루었다.
루치드와 라보네를 호위하여 뒤로 물렸던 또 다른 용살대원은 전장의 상황을 보더니, 생각을 고쳤다. 이들이 도망가고 말고는 두 번째 문제였다. 우선은 동료들이 살아야 이 모든 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용살대가 싸움에서 지면, 이 두 사람이 죽던지 도망가던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용살대원은 칼을 뽑아들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24대 10의 싸움, 아니 지금 근위대 2명이 쓰러졌으니 22대 10의 싸움이다. 승산이 없진 않다!
루치드는 멍한 눈으로 전투를 바라보았다. 제윅의 마법에 의해 낙엽처럼 나가떨어지던 싸움의 광경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날카로운 쇠와 쇠의 부딪힘이 이어졌고, 그 소리와 불꽃이 눅눅한 안개를 태울 정도였다.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는 와중에 새된 비명과 악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와 늪지를 울렸다. 진짜 야만은 바로 눈앞의 광경이었다.
“이 때야. 지금 도망가야 돼.”
라보네가 루치드의 어깨를 짚었다. 루치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와 동공, 그 속에 감쳐진 두려움과 공포심.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이 전장의 광기에 전염되지 않은 유일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러한 광경을 자주 보아서 익숙한 것일까?
목을 베어 피가 흩뿌려지고, 날아오는 칼을 막기 위해 들었던 팔이 절단되어 바닥을 구르고, 옆에서 날아온 눈 먼 칼에 얼굴이 베어져 비명을 지르는 이 광경이 익숙해질 수 있는 광경일까? 아니 태연히 감상할 수 있는 광경일까?
“뭐해? 정신 차려!”
라보네는 루치드의 손을 붙잡고 반대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루치드는 아무 생각 없이, 이끌리는 대로 발걸음을 맞춰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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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뛰었을까? 역시 먼저 제풀에 지친 것은 라보네였다.
“더 이상 못 뛰겠어.”
너무 숨을 헐떡대는 바람에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루치드는 뒤를 돌아보고 귀를 기울였다. 숨을 몰아쉬는 라보네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쫓아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아요.”
안개가 이정도로 낮게 깔린다는 말은 기압이 낮다는 말. 기압이 낮으면 소리도 멀리 전달된다. 게다가 소리는 습도가 높을 때 크게 들린다. 그런 조건 하에서도 들리지 않는다는 말은 잠시 쉬어갈 시간은 된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라보네는 루치드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지금은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오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믿고 싶을 뿐이었다.
“얼마나 더 가야되나요?”
루치드의 물음에도 라보네는 답할 수 없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한 터라 주변을 살피며 왔던 것이 아니었고, 설령 보았다고 해도 기억할 리 없었다. 주변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한 늪지대였고, 아까와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 제대로 구분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루치드가 보기에도 딱히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려우니 뭐라고 따질 계제는 아니었다.
“정말 너 대단하구나. 아니 대단하시네요.”
루치드는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나 자작 앞에서도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어요. 솔직히 미쳤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놀랐어요. 어떻게 거기서 두 편을 싸움 붙일 생각을 했대? 난 도저히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거든.”
존대와 하대가 뒤죽박죽 섞인 말투로 말을 꺼내는 라보네는 진심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심란한 루치드였다. 루치드는 결코 둘을 싸움 붙일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까.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솔직히 무서웠다. 그들의 행동과 그들의 사고방식이.
루치드는 자신의 말이 불러온 결과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목숨보다 명예, 의리, 신념을 중요시 한다는 근위대장의 말은 일견 멋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외골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 부하의 목숨까지도 책임져야할 근위대장이 명예와 위신이라는 명분으로 목숨을 초개까지 여기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리어 루치드가 다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여겨질 만큼.
“그들이 죽고 사는 것은 그들의 운명이죠. 우린 그저 살아남았다는 것에 기뻐하면 되는 거예요.”
루치드가 넌지시 자신의 고민을 말하자, 단호하게 선을 긋는 라보네였다. 다만 루치드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을 부정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