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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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들을!”
근위대장은 말에 박차를 가하여 속도를 높였다. 거칠게 투레질을 한 말이 더욱 힘을 내기 시작했다.
가까워지는 말발굽소리에 라보네가 뒤를 흘깃 보았다.
“앞에!”
루치드가 비명을 질렀다. 놀란 라보네가 앞을 보고는 서둘러 고삐를 틀었다. 늪을 향해 달리던 말이 급히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리아빈의 길은 고저차는 적지만 좌우로 급격히 방향을 틀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조심하지 않으면 늪을 향해 들이받아야 했는데, 덕분에 근위대도 속도를 높이지 못해 이 아슬아슬한 경주가 지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근위대장은 달랐다. 화려한 마장술로 쫓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바로 라보네의 갈색 말 뒤를 바짝 달라붙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섬뜩한 기운을 뿜으며 드러났다.
“감히 대공국의 자작을 모욕하고 협박하고 살아나리라 생각했던 것이냐!”
루치드는 잠깐 이 상황에서 저런 외침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체포에 불응하고 근위대원을 죽음으로 몰아간 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라보네는 저 근위대장도 늪에 빠져 죽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었다.
“어차피 네 놈들 모두 참형에 처할 것들, 온전한 몸으로 추포하려 한 나의 배려가 네놈들에게 가히 과하였구나!”
근위대장은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는 칼을 높이 추켜올렸다. 그리고 그의 말이 라보네의 오른쪽으로 붙었다. 라보네는 말을 오른쪽으로 틀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았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야 했던 근위대장. 왼쪽을 노리면 왼쪽을 틀어막으니 서로 막고 막히는 경주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뒤에서 쫓아온 다른 근위대원이 틈을 노렸다.
근위대장을 막는 사이, 비어진 공간으로 치고 들어온 근위대원은 칼을 뽑아들었다. 루치드의 눈이 커졌다. 막아야 하는데!
“죽어라!”
근위대원이 칼을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칼이 루치드의 왼팔을 가르기 직전!
―챙!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근위대원의 칼이 뒤로 튕겨나갔다. 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날아든 단도 역시 불꽃을 튀긴 뒤, 늪으로 빠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어안이 벙벙한데, 달려가는 방향에서 늪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무리들이 있었다.
“뭐냐! 너희들은!”
근위대원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곧 근위대원은 바닥을 굴렀다. 낙마한 대원의 목에서는 단도가 박혀있었다. 근위대장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위기는 근위대장만의 것이 아니었다. 길을 막고 선 이들 때문에 라보네 역시 더 이상 말을 달릴 수 없었다. 급히 말고삐를 잡고 제동을 걸었다. 그 틈에 근위대장이 라보네의 옆으로 달리며 동시에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칼은 라보네를 향하지 않았다.
―챙!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든 단도가 다시 금속음을 내며 바깥으로 튕겨졌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몇 개의 단도가 위 아래로 던져지니, 애써 칼을 휘둘러 피해보려 했지만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말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면서 앞발을 드니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뛰어내려야만 했다.
라보네가 바로 몇 발짝 앞에 있는데도, 길을 막아선 이들 때문에 더 가까이 갈 수가 없었던 근위대장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누구 길래 녹스 근위대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냐?”
감히 대성(大城) 근위대의 일을 방해하는 이가 있다니! 근위대장이 이를 가는 사이, 길을 막고 있던 여러 사람들 중 한 사람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당신들에게는 해를 끼치고 싶지 않소. 우리는 여기 이 여자만 데리고 가면 되오.”
“너희들의 정체부터 밝혀라!”
“······.”
무도한 무리들은 끝끝내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 뒤따라온 근위대 7명이 차례로 하마(下馬)하여 근위대장 곁에 섰다.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너희 역시 준엄한 칼날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기묘한 대치상황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라보네와 루치드는 말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가운데서 눈치만 봤다.
“누군지 알겠어?”
라보네가 작은 목소리로 루치드에게 물었지만, 당연히 알 턱이 없는 루치드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모르겠지만, 하나는 분명해 보이네요.”
“뭐?”
“저 사람들도 우릴 가만히 두질 않을 것이라는 거요.”
루치드는 눅진한 공기를 뚫고 찔러오는 죽음의 기세를 느꼈다. 저들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호의를 가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에 이런 대치 상황이 벌어졌을 뿐이었다. 만약 저들과 근위대의 목적이 서로 일치한다면 이 대립은 계속 되겠지만, 만약 다른 목적이고 서로에게 침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 대치는 평화적으로 풀릴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 평화가 루치드에게도 평화롭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이 누나는 자신의 무기를 쓸 줄 모른다. 다만 지금은 그 무기를 쓰기에 적당한 타이밍이 아니니 일단 입을 닫았다. 대신 루치드 나름대로 이 사태를 돌파할 만한 방법을 강구했다.
만약 근위대뿐이라면, 혹은 앞에 무리뿐이라면 아무런 방책이 있을 리 없지만, 이런 3자 구도라면 변수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래 3차 방정식이 2차 방정식보다 복잡한 법이니까.
“3차 방정식이 해결되려면 등식이 3개가 필요해요.”
루치드의 중얼거림에 라보네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며 물었다.
“즉, 3차 방정식이 해결되지 않게 하려면 등식이 3개가 되지 않으면 되죠.”
이런 상황에서도 엉뚱함을 보이는 루치드의 태도에 라보네는 처음부터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닌가 자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라보네가 팔자 좋게 현실도피를 하는 동안, 루치드는 길을 막아선 복면인들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앞에 나섰던 복면인이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여기 왜 오신 거예요?”
복면으로 가려졌지만, 왠지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눈이었다.
“겁도 없는 꼬마구나. 너야말로 도대체 뭐 길래 여기에 있는 것이냐?”
한 가지는 알았다. 저들의 목적은 라보네라는 것.
“아저씨들이 찾는 게 저희들한테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복면인의 눈이 굳어졌다.
“무슨 소리냐?”
“저희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요?”
“웃기는 소리. 그렇게 말하면 풀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루치드의 입이 굳었다. 저들은 물건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그 물건은 큰 부피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의 사태들을 돌아보면 저 사람들이 찾는 게 달리 있지 않을 것 같다.
“저희가 옷을 모두 벗어도요?”
“뭐?”
“뭐?”
루치드의 말에 복면인은 물론, 라보네도 고개를 돌려 루치드를 보았다.
“저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저희가 입고 있는 옷 모두를 저자들에게 주면 되잖아요.”
“너 미쳤니? 내가 이 자리에서 옷을 어떻게 벗어?”
“아.”
루치드는 머리를 긁었다. 생각해보니 라보네는 옷을 벗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도 체육시간에 여자아이들이 옷을 갈아입을 때, 남자아이들은 교실에서 나가야했다. 여자아이들의 몸을 보는 행위가 관습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이해한 루치드였다.
“저기, 죄송한데 어떻게 하면 저희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죠?”
“···정말 건방진 녀석이로군. 몇 마디 받아줬다고 저렇게 위아래 없이 구는 놈은 생전 처음이다. 그리고 도대체 우리가 뭘 찾는 줄 알고 그리 말하는 것이냐?”
“아카넬이요.”
루치드가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굳었다.
“너, 아, 아카넬이 무엇인지 알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복면인이 애써 침착을 찾으려 했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애초에 명령을 받고 나올 때, 아카넬에 대한 이야기는 오직 자신만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용살대 부대장에게만 이야기를 했다. 즉, 여기 모인 10명 중 단 2명만 아는 정보였다. 그리고 거기까지만 알아야 할 내용이었다.
“아카넬은 전설에 나오는, 붉은 마법의 씨앗이라고 불리는 것이죠. 실제로는 어떤 꽃의 열매인데, 죽은 사람도 살리는 열매라고 알려져 있죠. 그걸 찾으러 오신 거 아닌가요?”
루치드는 꽤나 또렷한 발성과 발음으로 아카넬에 대해 설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오노 공국에서 나름 윗선의 일들을 처리하면서 지냈던 용살대였다. 당연히 아카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이 자리가 그 아카넬을 차지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었을 뿐이었다.
루치드는 그들의 반응을 몰래 살폈다. 분명 동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반대쪽도 살펴야 했다.
근위대 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카넬이라고?”
심지어는 근위대장마저 몰랐다. 단지 자작을 협박하고 모욕했다는 이야기만 들었기에 충정심에 대로(大怒)하여 달려온 참이었다.
“누나, 아카넬을 먹으면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했죠?”
“어? 어, 그렇지.”
라보네도 미묘하게 바뀐 분위기를 느꼈다.
“살아있는 사람이 먹으면 어떻게 돼요?”
“살아있는 사람?”
“건강한 사람이 먹으면 어떻게 되나요? 거기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
“···불로장생한다고 하지.”
아, 그래서 이렇게 다들 죽자고 달려드는 것이었군. 단순히 치료약인줄로 알았던 루치드는 그제야 이 반쯤 실성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노려보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사실은 다르다. 전설일 뿐이고, 마법사가 인정한 헛소문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모인 용살대와 근위대에게는 헛소문이 아니었다.
“아카넬 찾으러 오신 거 맞죠? 그런데 저희는 없어요.”
개도 웃지 않을 소리다. 범인이 재판장에서 저 범인 아니에요, 라고 말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믿어줄 재판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놈들 무슨 헛소리들을 지껄이는 것이냐!”
복면인은 일단 아이의 말을 부정했다. 이 일이 ‘아카넬’에 얽힌 일로 진행되면, 아무리 용살대라고 해도 위험하다. 게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증인이 될 터인데, 만약 한 사람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자신으로서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비단 저 앞의 무리들뿐만 아니라, 용살대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무려 아카넬에 관련된 일이니.
“그럼 왜 오신 거예요? 저흴 구하려고 오신 건가요?”
용살대에게 공식적으로 내려온 지시는 까타라 상단의 부단주인 라보네를 붙잡아 오라는 것이었다. ‘붙잡다’와 ‘구하다’가 의미는 다르지만 행위의 결과는 비슷하니 그렇게 밀어붙여도 무방하리라.
“그렇다!”
루치드는 고개를 돌렸다. 근위대장이 칼을 든 채 노려보고 있었다.
“저희는 저분들 따라갈게요.”
뭐? 근위대장의 눈이 커졌다. 누가 봐도 저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저들을 따라가?
“너 바보냐?”
라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저씨들은 저흴 죽이겠다고 했지만, 저분들은 저흴 구하겠다고 하니 저분들을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루치드가 어리바리하게 서 있는 라보네의 손을 잡고 끌었다.
“가요, 누나.”
루치드가 복면인들을 향해 발을 떼는 순간.
“멈춰라!”
근위대장이 소리쳤다.
“한 걸음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루치드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복면인들에게 말했다.
“어떡하죠?”
복면인은 상황이 유리한 것인지, 불리한 것인지 판단이 제대로 서질 않았다. 저들이 순순히 따라온다니 좋은 일이긴 한데, 이대로는 근위병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충돌이 벌어지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와라.”
지금은 이미 늪에 빠진 상황. 어찌해도 충돌이 피할 수 없다면 조금 더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몰아야 했다.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각오해야 하리라.”
복면인이 보니 저쪽은 근위대장을 포함해 8명, 자신들은 10명이다. 수적 우세, 라고 생각할 무렵, 공교롭게도 근위대 뒤쪽으로 새로운 병력이 도착했다.
애초에 녹스에서 출발할 때, 최소한의 근위병을 제외하고 30명이 출발했다. 이후 상단에 발이 붙들렸을 때, 즉시 달려 나갈 수 있는 8명이 루치드의 뒤를 쫓았고, 남은 근위병들은 상단을 수습하여 5명은 상단과 함께 녹스로 떠나고 나머지는 근위대장의 뒤를 쫓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근위병들은 총 24명이 되었다.
복면인의 얼굴이 검게 변해버린 순간이었다.
“근위병 전원 돌격 준비.”
“핫!”
복창 후 일제히 칼을 꺼내든 24명의 근위대. 적어도 이들은 아카넬이란 말에 흔들리기 전에 엄격한 군기에 의해 상명하복이 생활화된 직업군인들이었다. 게다가 근위대장이 침착하게 전투준비를 명하자 기계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명령에 복종했다.
급작스럽게 상황이 변해도 리더가 침착함을 유지하고 부하들에게 신뢰를 보여준다면, 부하들은 안심하고 리더의 명에 따르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부하들은 상황의 복잡성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리더의 명을 따름으로서 상황을 해결하려는 의지에 순응한다.
아카넬이라는 변수는 부하들의 침착성을 뒤흔들 여지가 크지만, 근위대장은 변수를 생각지 않도록 하였다. 지금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적, 복면인들이었으니까.
“제길.”
복면인이 입술을 짓이기며 한 손을 치켜들었다. 뒤에 선 복면인들도 칼을 꺼내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반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