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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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스 성을 빠져나온 라보네의 상단은 빠르게 평야를 벗어났다. 북문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한 상단 마차와 행렬은 평소라면 많은 짐들을 싣고 달리느라 속도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단주의 특별명령으로 급하게 떠난 터라 짐을 가볍게 하고 달린 탓에 녹스로 올 때보다 훨씬 빠르게 평야를 질주할 수 있었다.
“이유가 뭐래?”
“모르지. 아침에 급하게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난들 알겠나?”
“자네는 뭐 좀 챙겼는가?”
“챙기긴. 오늘부터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가지고 갈만한 약초나 있나 둘러볼 참이었는데.”
“그나마 가지고 온 걸 다 팔아서 다행인건가?”
어제 내린 특별지시로 오후 늦게까지 중앙대로의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가지고 온 물품들을 모두 팔았던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상인들은 마차를 몰았다. 가벼워진 무게에 신난 것은 마차를 끄는 말들 뿐이었다.
평야를 벗어나 목야지에 들어섰다. 이곳까지 온 것은 처음이라 루치드는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평야를 벗어날 때까지는 마른 갈색 잡초들이 길 옆으로 펼쳐지다가, 목야지에 들어서니 드문드문 녹색 풀들과 야생화들이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자라있었다. 낮은 언덕들이 여기저기에 울룩불룩하게 솟아나고 그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난 길 위를 여러 대의 마차들이 오리 떼들처럼 질서정연하게 달렸다.
라보네는 근위병들이 지금이라도 쫓아올까봐 두려웠다. 연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고, 귀를 기울였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개인의 안위도 걱정이지만, 부단주로서 상단의 안전도 도모해야 할 책임이 있는 라보네는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마법, 진짜 못 써?”
몇 번을 확인하고서도 다시 한 번 물어보고, 또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어보는 라보네였다. 하지만 루치드는 매번 똑같은 대답만을 줄 수밖에 없었다.
가만 보니 그동안 외모에 너무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서 제대로 그녀를 관찰할 틈이 없었다. 지금 단 둘만 마차에 올라탄 탓에 마주보고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그간 알아보지 못했던 그녀의 다른 면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루치드는 라보네가 어수룩한 면이 많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겁도 없이 혼자 제윅을 찾아온 점이라든가, 상단패만 믿고 성주를 만나기 위해 홀로 나선 점이라든가, 위기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자신을 데리고 길을 나선 점이라든가.
솔직히 말해서 루치드는 자신이 이 상단과 함께 하는 것이 본인에겐 좋은 일이지만, 상단의 입장에서는 폭탄을 안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되었다. 이미 자신이 마법사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녹스 성의 성주였다. 게다가 그 성주는 무려 목숨을 담보로 협박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당장 근위병, 경비대, 순찰대 할 거 없이 모두를 동원하여 자신을 추적하러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무슨 자신감에선지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같이 가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이 아가씨는 분명 영리하지 못하거나, 빈틈이 많은 사람임에 분명했다.
“중간에 밥 챙겨먹기도 힘들겠지?”
라보네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루치드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얀 장갑을 낀 두 손이 연신 꼼지락거렸다.
루치드에게 고민거리를 준 또 다른 부분은 바로 라보네의 정신 상태였다. 생각해보면, 이 아가씨는 바로 어제 사람을 죽였다. 비록 ‘복수’라는 명분으로 저지른 짓이긴 해도, 그게 쉬운 일인가 고민해보면··· 솔직히 답을 모르겠다.
만약 ‘지구’였다면 아무리 상황이 그런 식으로 전개된다 할지라도 살인을 저지르기 어려웠을 것이고, 게다가 살인 후에도 태연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야만의 세계인 이곳에서는 오히려 저런 식으로 일상을 보내는 게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치 시험 전날에도 공을 차고 노는 게 별 대수냐 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명수처럼 말이다. 단지 루치드 본인이 이 세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적응을 하지 못해서, 지금 이 상황을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라보네에게 대놓고
“어제 살인한 소감이 어땠어요?”
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아니, 그냥 한 번 물어볼까?’
결국 루치드가 고민하는 이 모든 게 그가 이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니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끝에는 처음과 같이 이 세상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는 결론이 나올 뿐이었다.
루치드에게는 다른 걱정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지금의 이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것. 마법사를 만나려는 애초의 목적은 미치광이 제윅을 만나 위기에 처하는 상황으로 이어졌고,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단지 혜린을 구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받았다.
설령 다른 마법사를 만나더라도, 혜린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윅의 말대로 인간의 ‘원형’이 ‘신(神)’이라면 말이다.
‘신’이라고 생각하니 ‘종교’가 떠올랐다. ‘지구’에 있을 때, ‘종교’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단순히 숲에게, 하늘에게, 산에게, 달에게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교리와 시스템을 갖춘 단체로서 종교가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었다. 다만 루치드가 처했던 환경이 종교와 직접적인 만남을 가질 기회가 없어서 관심이 덜했을 뿐이었다. 가끔 반의 친구들이 주말에 교회나 성당을 다닌다는 이야기는 전해들었지만, 그 뿐이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소설이나 교양서적을 통해 종교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 뿐, 종교의식을 경험하거나 자세한 교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 루치드였다.
이 정도 호기심에 대해서는 물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루치드는 창밖을 바라보는 라보네에게 물었다.
“여기, 혹시 종교가 있나요?”
“종교? 당연하지. 왜?”
“그냥 궁금해서요. 종교가 있다면 어떤 신을 모시고, 어떤 형태로 종교의식을 치루는지 해서요.”
라보네는 문득 이 아이가 마법사임에도 마법사에 대해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마법사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여러 가지를 배우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떤 종교의 경우, 산 속 깊은 곳에서 은둔하며 세상과 벽을 쌓고 산다든가 하는 그런 거.
만약 루치드도 고약한 마법사 스승을 만나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면 이런 모습도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보네는 자기가 아는 한에서 신과 종교에 대해 알려주었다. 창조신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의 일화와 그 신을 믿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종교의 영향력 등을 알려주었다. 말하다보니 혼자서 불안에 떨며 주위를 감시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래서 라보네는 창조신 뿐만 아니라 그 아래 보좌(寶座)를 가진 신들과 그 신들에 대한 종교, 신전 의식 등을 묻지도 않았는데 열성적으로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 곳에서도 종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루치드였다. 종교는 야만의 시대에도 존재하는구나, 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누나도 신을 믿나요?”
“당연하지. 난 창조신, 카르타의 신도야.”
“그럼 그 신이 저주를 내린 건가요?”
라보네는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창조신 카르타의 저주를 받은 가문이 라보네의 까타라 가문이었다.
“신을 안 믿으면 어떻게 돼요?”
“응? 신을 안 믿다니?”
“신을 꼭 믿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가끔 이 꼬마 마법사는 이렇게 상식에서 벗어난 생각을 생각에 그치지 않고 입 밖으로 꺼내는 바람에 당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다.
“신을 어떻게 안 믿어?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 믿는다는 거야, 아니면 보좌에 앉은 신들을 부정하겠다는 거야?”
묘하게 다른 의미인가? 아니면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 건가? 루치드는 ‘믿다’의 의미가 다르게 받아들여진 것 같았지만 일단 대답을 했다.
“신이 존재하더라도 그 신을 믿지 않을 수 있잖아요?”
마치 기독교, 천주교 등의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도, 그 신을 믿고 안 믿고는 개인의 사정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을 믿는 거지.”
라보네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루치드를 바라보았다. 루치드는 라보네의 얼굴을 가린 면사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신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나요?”
신의 존재를 증명하라. 라보네는 루치드의 요구에 입이 쩍 벌어졌다. 마법사란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신이 없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겠어? 신이 있으니까 이 세상이 만들어졌지. 이 세상 자체가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거야.”
너무 어이없었지만 라보네는 신의 말씀 첫 번째를 언급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그 설명과 동시에 라보네는 망치를 두들겨 맞은 듯 머리를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신언(神言) 1장의 첫 번째 문장은 바로 신의 존재와 역사(歷史)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었어.’
그리고 그것이 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첫 번째 역사(役事)임을 깨달았다.
“오, 카르타시여.”
라보네가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마차 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보통 때도 빛이 나는 얼굴이지만, 이 순간은 더더욱 밝은 빛이 나는 얼굴을 하고 눈물까지 흘리니 그 성스러움(?)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루치드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중얼거렸다.
“빛의 채도가 부위 별로 다르구나. 광대뼈와 입술, 코끝과 콧망울, 눈두덩과 눈꼬리의 채도가 달라지는 것은 곡률 때문일까, 아니면 외부의 빛을 받아들이는 각도의 차이 때문일까?”
라보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머리가 멍해지기 전, 간신히 가출하려는 이성을 붙잡고 주문(?)을 외우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라보네는 한껏 눈물을 흘렸다. 한없이 벅차오르는 깨달음의 감정으로부터 희열을 느낀 탓이었다.
“옆모습일 때와 앞모습일 때의 비율의 변화는 미적 감상의 차이를 줄 수 있을까? 고정된 지점에서 바라보는 얼굴의 면적의 차이가 영향을 주는 걸까, 아니면 새롭게 설정되는 비율의 차이 때문일까? 측면에서 눈썹과 코끝에 이르는 길이와 눈썹 끝에서 입 꼬리까지 닿는 거리의 비율이 정면일 때와는 미묘하게 달라지는 구나. 대략 1:1.5 정도일까?”
포장도 되지 않은 터라 가는 길이 원만치는 않았지만, 마차 속 두 사람의 여정은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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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위대는 지금 당장 까타라 상단의 뒤를 쫓아서 본 성주를 능멸한 이들을 추포하라.”
“예.”
근위대장이 무릎을 꿇고는 굳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갑주가 덜걱거리며 나는 소음은 오히려 그의 발걸음에 반주(伴奏)가 되어 주었다.
“근위대 전원, 출발하라.”
커다란 함성으로 대장의 지시에 대답한 근위대는 곧 말을 몰아 북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성주님. 그 마법사란 놈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근위대장이 아무리 믿음직한 이라도, 마법사 앞에서는 한낱 평범한 기사에 불과했다. 공국 최고의 기사정도는 되어야 마법사에 대항할 기미라도 보이지, 이런 작은 성의 근위대장 정도로는 빵부스러기만도 못할 것이었다.
“지금 이 곳이 그나마 이 성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지 않소? 마법사라도 쉽게 찾기 힘들 것이오.”
내성 지하에서도 한참을 숨어들어온 비밀의 방에서 성주는 평소의 오만함 따위는 전혀 내보이질 못했다.
“그리고 근위대장 혼자라면 몰라도 일백의 근위대와 함께라면 상대해 볼만 하지 않겠소?”
“그래도 마법사입니다. 과거 물의 마법사란 놈이 어떤 짓을 했던가를 떠올려 보십시오. 물론 그 어린 마법사란 놈이 그 정도까지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서기관이 낮은 목소리로 진언을 했다. 하지만 자작은 두려운 가운데서도 결코 복수를 포기할 수 없다는 신념을 보였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목숨을 협박받은 것에 대한 복수가 아니었다. 귀족의 명예와 자존심을 깔아뭉갠 존재에 대한 가르침이고 응당 그렇게 해야만 하는 행동강령이었다.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감수하고 땅에 떨어진 귀족의 품위를 드높이기 위한 각오였다.
‘왜 오전에는 그 각오를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라고 서기관이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입 밖으로 내는 우행(愚行)을 저지르진 않았다.
꼬마가 성을 나간 후, 발작적으로 지시를 내린 자작에 의해 서기관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만들어뒀던 지하실의 존재를 떠올렸고, 수십 명의 하인과 하녀를 동원하여 오전 내내 지하실을 청소했다. 그리고 필요한 물품들과 먹을거리들을 옮겨서 불가피하게 오랜 시간을 갇혀 있더라도 불편이 없게끔 준비한 뒤, 성주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 이후 성주는 근위대장을 친히 불러 ‘명예’와 ‘신념’을 강조하였고, 근위대장은 늘 그렇듯이 성주의 명에 따라 ‘불손한 세력’을 처벌코자 달려 나갔다.
“추포하여 오는 즉시, 형을 집행할 수 있게 준비하라.”
서기관은 그 명에도 머리를 조아렸다. 서기관이 나가면 지하실의 문은 굳게 닫히고 수십 명의 하인과 수 명의 경비대가 앞을 지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또 수십 명의 인부들을 불러 내성 외부의 광장에 단을 쌓고 임시 형장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하루치 일당을 받은 인부들이 단을 쌓고 나면, 임시처형장에 몰려들 사람들의 통제를 위해 순찰대장에게 지시를 내려야 할 테고, 주변 상가들은 몰려든 사람들 덕에 돈을 벌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그만 콩고물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협조하지 않는다면 그 날 하루 가게 문을 열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면 될 것이다. 또 잡혀온 꼬마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공표하고 마법사의 처형을 집행한 공을 중앙에 알리기 위한 공문도 작성해야 한다. 되도록 빨리 일을 처리하려면, 지금 공문 초안을 작성해야 할지도 모른다.
유능한 서기관은 오늘도 언제나와 같이 바쁜 하루를 기획하고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