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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더 네임-126화 (126/956)

오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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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은 등을 소파에 기대며 고개를 살짝 젖혔다. 소파 위에 박음질 된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숨을 길게 토하며, 천천히 눈을 뜬 자작은 라보네와 루치드를 한 눈에 담았다.

“그대들의 활약은 이미 들었네. 그 쪽이 마법사의 제자라던가?”

“오해십니다.”

라보네가 즉각 대답했다.

“이 아이는 그 미치광이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마법을 쓸 줄도 모르고요.”

자작은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손가락을 탁, 튕겼다.

“미치광이라고 부른 그 마법사가 죽어 있더군?”

라보네는 입을 닫았다.

“가슴에 칼이 박혀 있었다고 하던데, 보고에 따르면 키가 이 만한 사람이 기습적으로 파고 들어서 찌른 흔적이라더군.”

한 손을 머리 위로 치켜 들고 살랑살랑 흔들자, 라보네의 안색이 변했다.

“경비대장은 어디에 계세요?”

루치드가 물었다. 만약 경비대장이 멀쩡했다면, 오늘 아침이라도 여관에 와서 자신들을 잡아가두려 했을 것이다. 같은 편인지 아닌지도 모를 마법사가 죽었다는 사실까지 확인한 마당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경비대장은 내성 내로 진입할 때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빈첸티 자작은 오른손으로 턱을 쓸어내렸다. 손길에 따라 턱수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야기로 들은 것보다 훨씬 발칙한 녀석이로군.”

빈첸티 자작의 눈에는 경멸의 빛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그는 아카넬에 대한 비밀을 다른 경비대원들에게 알렸다. 그는 그 책임을 져야만 했다.”

“경비대장은 어디 있나요?”

루치드가 재차 되물었다. 빈첸티 자작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는 입술을 덮었다. 덕분에 그가 웃는지, 아닌지 알 기 어려웠다. 다만 그의 눈만은 마치 먹이를 앞에 둔 짐승의 그것처럼 빛을 드러냈다.

“책임을 졌다고 말했을 텐데.”

라보네는 등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가지 앞에서 호인처럼 껄껄 웃으며 대화하던 상대가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가 ‘책임’이란 단어를 뱉어내는 순간, ‘대가’를 입에 올리던 제윅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뱉은 두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작님.”

라보네가 서둘러 그를 불렀다. 라보네에게로 시선이 꽂힐 때, 그녀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었던 건 아닌지, 루치드가 너무 버릇없이 굴었던 건 아닌지,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던 것이 아닌지 반성했다.

“벨로, 당신의 가족 일은 안타깝게 생각하오. 하지만, 당신이라도 이 일에 깊숙이 관여되었다면 무사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요.”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하던 자신의 가문이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느껴졌다.

“자작님.”

루치드가 다시 자작을 불렀다.

“제가 어제 제윅이라는 마법사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자작은 대답은 하지 않고 루치드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그냥 자작님의 생각이 궁금해서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 그럴듯 하군. 역시 마법사라서 진실을 보는 눈이 대단한 걸?”

루치드는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어차피 확인해 볼 필요도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물어봤다. 그리고 역시나 같은 대답이 나왔다. 이 세상, 이 곳의 권력자들은 모두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나보다.

그러나 루치드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실험을 생각해냈다. 어제 제윅을 상대로 한 실험도 즉흥적이었지만, 이번 실험도 꽤 흥미로운 결과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작님,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자작님은 강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약한 사람인가요?”

“뭐라?”

빈첸티 자작은 자기 막내아들보다 어려보이는 녀석이 뱉은 말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곧 그 의미를 알아차리곤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대공국의 자작을 모욕하는 것이냐!”

한낱 평민 따위가 귀족을, 그것도 한 성의 성주직을 맡고 있는 귀족을 향해 말장난을 하다니!

“정녕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빈첸티 자작이 벌떡 일어나 바깥에서 대기 중인 근위병을 부르려 했다. 혹시 아카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까봐 바깥에 대기시켜 두긴 했지만, 자신의 호출이면 즉각 뛰어들 준비들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치드의 말이 한 발 더 빨랐다.

“자작님은 죽지 않을 자신이 있으신 건가요?”

고저 없는 루치드의 말에 자작은 말문이 막혔다.

“이 꼬마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라보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루치드를 돌아보았다.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고 소리치고 싶은 라보네는, 하지만 너무 당황스럽고 겁이 잔뜩 난 상황이라서 목소리가 꽉 막힌 목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왜 자작님은 제가 마법사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듣고서도 아무렇지 않을까, 궁금해서요.”

자작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라보네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너, 이 아이가 마법사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더냐?”

“아니, 저기···.”

루치드가 대답을 가로챘다. 호흡을 약간 느슨하게, 하지만 단어는 정확하게 뱉어냈다.

“제가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걸 확신하시는 건가요?”

자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믿, 믿을 수 없다. 너, 너처럼 어린 녀석이 마법사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신 적이 없으실 테죠. 제윅도 그러더라고요. 저 같은 마법사는 본 적이 없다고요.”

자작이 주춤거릴 때, 라보네에게 물었다.

“어제 제윅이 절 뭐라고 불렀는지 기억하시죠?”

“······.”

라보네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루치드는 얼굴을 굳히고 되물었다.

“대답해보세요.”

“···마법사라고.”

확실히 제윅은 루치드를 보고 마법사라고 부르긴 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는 수식어를 붙이긴 했지만 말이다.

루치드는 다시 자작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자작님. 자작님이 강할까요? 제가 강할까요?”

“······.”

자작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작님이 바깥의 사람을 부르는 게 빠를까요? 제가 마법으로··· 빠를까요?”

의도적으로 중간에 말을 흐릿하게 했다. 하지만 충분히 의미를 알아들은 자작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땀이 나고, 무릎 아래로 느낌이 없어졌다. 그리고 이내 소파 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다지 신장이 크지 않은 루치드임에도 소파에 앉은 자작을 내려다보기엔 충분했다.

“다시 한 번 물어볼게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 사실인가요?”

자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속으로는 백번, 천 번 외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저 꼬마 놈의 말은 말이 되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 라보네라는 여자애도 저 꼬마 놈이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했었지 않은가.

그런데, 왜, 저 아이는 저리 태평하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협박하고 있는 것인가?

“사, 사실이냐?”

“······.”

라보네에게 물었다. 하지만 라보네는 지금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마법을 못 쓴다고 했는데, 혹시? 라는 가설 때문에 몸이 떨려왔다.

자작은 라보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기보다 더 심하게 몸을 떨고 있음을 목격했다.

‘사실이구나!’

라보네의 말보다, 그녀가 보여주는 몸의 반응이 더 와 닿았다. 그녀 역시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루치드는 자작과 라보네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는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사람이 적을 앞두고 공포를 느낄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왔다. 하나는 싸우고 이기고 싶어 하는 투쟁심, 또 하나는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생존에 대한 욕구. 루치드는 어제 경비대의 모습을 보며 그것을 느꼈다. 센베크와 같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사람과 마법사의 마법에 당한 뒤,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주춤거리던 경비대원들의 모습. 충분히 실험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치드는 저 앞의 자작에게 후자의 반응을 고르도록 강요(?)를 했고, 그것이 성공했다.

물론 그 앞에 한 가지 작업이 필요했다. 상대가 투쟁의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그래서 물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자작은 그 테제를 되새김으로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라는 올가미를 스스로에게 씌었다. 그 후, 루치드가 강자임을 되새겨만 주면 되는 것이었다. 관계가 설정되면 곧바로 ‘마법’이라는 절대적인 힘을 상기시켜 공포심을 크게 키우고, 공황(panic)에 이르게 하는 것. 마치 어제 경비대원들이 제윅으로부터 도망치던 모습처럼.

여러 가지 상황이 돕긴 했다. 근위병이 함께 있지 않다는 것. 혼자였기 때문에 더욱 자신을 약하다고 여기게 만들기도 했고, 라보네의 반응에 지레짐작으로 두려워한 점도 있었다.

“자작님. 지금부터는 제가 말을 하지 않겠어요. 단, 자작님에게서 위험신호가 나온다면, 제윅이 그랬던 것처럼···. 아시죠?”

자작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모호한 표현은 특정되지 않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루치드는 모르지만, 자작의 머릿속에는 새벽에 죽었다는 순찰대원의 이야기에서부터 과거 어린 시절 들었던 잔혹 무도한 마법사들의 일화까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의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기 시작했다.

“라보네, 이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요. 명심해요. 당신도 예외는 아니에요.”

라보네의 어깨를 짚으며 루치드가 자못 근엄한 척을 했다. 이것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는 것인지, 조금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큰 어른들이 고작 초등학교 4학년에 불과한 아이에게 협박당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씁쓸하게도 이것이 가능한 것은 모두 이 세계의 야만적이면서 미개한 사회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야만과 미개함은 루치드에게는 그들 표현대로 ‘어리게’만 보였다.

라보네가 침을 꿀꺽 삼키고 자작을 바라보았다. 자작 역시 라보네를 바라보았다. 자작은 라보네의 눈에 어린 눈물을 보았다. 자작은 자신도 눈물을 흘릴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결론적으로 아카넬은 성에 없었다. 이미 뒤를 봐주는 분에게 가고 없다는 것이었다. 굳이 그 말이 사실이냐고 추궁할 필요는 없었다. 루치드의 마법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보기 딱할 정도로 바른 자세로 대답에 임하는 자작의 모습을 감정 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작은 커다란 심리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자작의 비자발적(?) 배웅과 함께 루치드네는 내성을 빠져나왔다. 성문 앞에서 루치드가 뒤를 돌아보자, 딸꾹질을 하며 황급히 몸을 돌려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자작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저 시선 바깥으로 몸을 숨겨야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벨로.”

“응? 아니 네?”

“좀 서둘러서 가야겠어요.”

“왜? 아니 왜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길 위에서 라보네를 붙잡고 이런저런 이유를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일단 가시죠. 가면 설명해 드릴게요.”

조금 걸음을 빨리해서 여관에 돌아온 두 사람. 그제야 루치드는 라보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니!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한 거야! ···아니 한 거예요?”

여전히 미심쩍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라보네였다. 라보네의 연기 아닌 연기가 루치드의 블러핑을 도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루치드는 라보네에게 무릎 꿇고 빌어야 마땅할 일이었다. 같은 편을 속인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꾸물대다간, 자작이 보낸 군사들에게 당할지도 몰라요.”

“군사를 왜 보내?”

“자기만 안전하다면, 그 아랫사람들의 목숨 따위 신경 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거든요. 제윅이 그랬잖아요. 마법사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서 죽이려 들 거라고. 지금쯤 자작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서 지시를 내렸을 거예요. 꼬마 마법사를 잡으라고.”

“그래도 니가 마법으로···.”

“누나, 저 정말 마법 못 써요.”

그제야 상황을 제대로 알게 된 라보네는 뷰익을 재촉하여 녹스를 떠나기로 하였다.

자작은 자신의 안전을 우선 담보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시간을 지체하였고, 결국 근위병들이 여관에 도착했을 때 라보네의 상단은 이미 녹스 성을 떠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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